여백 여정
2024년 3월 4일 월요일
2024년 2월 27일 화요일
데이비드 M. 카 "거룩한 회복탄력성"(서울: 감은사, 2022) 서평
작년 5월 마침내 글감옥에서 벗어났다.
드디어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전공서를 탐독하고 싶었다.
주저없이 "거룩한 회복탄력성"(2022, 감은사)를 선택했다.
틈틈이 읽어가며 감탄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여유를 뺏겼다.
분주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목.박 과정에 합격했다.
'읽어야 할 책'들로 이뤄진 거대한 물결이 보였다.
거기에 휩쓸리기 전에 이 책 독서를 마치고 싶었다.
마침내 오늘 이루었다.
감격적인 포만감을 느낀다.
저자는 구약학자다.
그런데 '트라우마'라는 사회과학 개념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를 토대로 신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를 조망한다.
'성서학자'로서 매우 존경스러운 자세다.
협소한 자기 영역에 갇히지 않고 외부와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깊고 넓은 성찰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논지를 전개하며 보인, 본래 자신의 주특기인 '히브리어 성경 본문 형성 연구'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관련 분야를 더욱 탐구하고 싶은 충분한 매력을 느꼈다.
그의 다른 대표작들도 찾아 읽고 싶어졌다.
동시에 '목회자'로서 닮고 싶은 공부 태도를 보여준다.
오래전 고대 문서에 담긴 하나님 말씀과 눈 앞에 펼쳐진 현실 속 고통의 관계를 풀어내는 의미있는 예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를 꾸준히 탐구하며 동시에 오늘날 인문사회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참고할 때 복음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풍성한 깨달음이 맥박소리를 내는 설교와 목양으로 이어지게 한다.
책의 내용과 방법론 모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걸작이다.
유려한 글 솜씨도 일품이다.
한편,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목박과정을 앞두고 읽기 매우 적합한 책이었다.
1년 전 선택에 만족하며 여러 다짐을 하게 했다.
부디 그 결심들이 내 목회와 신학 가운데 따스한 결실로 이어지길 소망한다.
그 과실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온기로 다가가길 기도한다.
한 글자씩 음미하며 소리내 읽은, 이 책 결론부를 소개하며 서평을 마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지도층을 미화하거나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들은 세계의 폭력과 인간의 결점에 눈을 크게 뜨고 있다. 게다가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상관 없이, 그런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 많은 승리주의적 문서가 스스로 칭송했던 제국들과 함께 사라졌지만 이러한 성서의 문서들은 지속됐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혼란스럽고 종종 임의적인 트라우마 세계 안에서 지속력을 입증했다.
나는 성서가 트라우마와 생존으로 어떻게 가득 차 있는 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성서가 사람이었다면, 흉터, 도금되고 부러진 뼈, 찢어진 근육, 장기적으로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때 평범했지만 이제는 정체성이 완전히 트라우마로 형성된 사람일 것이다. 이 사람은 분명히 기쁨과 일상의 삶을 살았을 것이지만, 수 세기에 걸쳐 몸과 마음에 트라우마가 주는 지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트라우마와 생존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또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예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눈을 돌리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사람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325~26.
2024년 2월 21일 수요일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땅에서 하늘 살기”
2024년 2월 21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목사 정대진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땅에서 하늘 살기”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입니다. 밤늦게 퇴근하신 아버지께서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저에게 무언가를 불쑥 건네셨습니다. 바로 홍정욱씨가 지은 “7막7장”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책 선물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많이 기억하실 겁니다. 어쩌면 집에 아직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24살 한국 청년이 무려 하버드대학교를 우수졸업상을 받고 졸업했습니다.
이 소식에 온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그야말로 ‘홍정욱 신드롬’이었습니다. 조기유학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그가 지은 수기 “7막 7장”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 열기에 많은 학부모가 휩싸였습니다. 제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제 부모님은 남해안 섬마을에서 어렵게 자라셨습니다. 가정 형편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습니다. 삶의 여러 풍파를 겪다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도시에서 힘겹게 일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는 지금 당장 자식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읽기 좋아하는 아들이 홍정욱씨처럼 하버드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꿈을 품고 이루길 바라셨습니다.
이 사건이 어린 저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 저는 국내외 여러 명문대 졸업생의 에세이를 종종 찾아보곤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련을 딛고 일어나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명망가들의 자서전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후에는 외국 유학을 몇 차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 탓에 원대한 꿈을 품고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러한 ‘상승 의지’는 분명 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 건강한 활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90년대 중후반 ‘홍정욱’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과 그로 말미암아 벌어진 사회 현상 자체를 함부로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승자독식의 엄혹한 경쟁 사회에서 모두가 피라미드 위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면 나머지 수많은 사람은 패배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힘의 질서는 반드시 어두운 그림자를 남깁니다. 따라서 승리를 거머쥐려 맹목적으로 달리는 세상 한 복판에서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를 차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은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참된 성공에 대한 왜곡과 오해가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일류대학교를 졸업해 번듯한 직장에서 많은 연봉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물론 그분들의 선한 의도는 공감합니다. 그 안에 수긍할 만한 내용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때때로 복음을 심각하게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뜻은 번번이 입시와 취직에 실패하는 청년들, 자녀를 돌보고 가정에 충실 하느라 경력이 단절되어 허무함을 느끼는 어머니들, 억울하게 직업을 잃거나 애써 일군 사업장을 눈물 머금고 닫는 아버지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은 그 모든 좌절과 결핍을 초월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천대받던 변방 성읍 갈릴리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외치신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생명의 진리를 교묘한 욕망의 논리로 뒤바꾸는 현실 앞에 마음이 아프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어느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켜 강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1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로 번역한 원문은 ‘탄식하고 흐느낀다.’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런 표현은 현재 바울을 짓누르는 어두운 감정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 그들을 가리켜 거침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까지 말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앙의 절정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이기에 바울이 이렇게 거침없이 비판했을까요? 그들의 정체를 1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당 구절을 논리 구조로 나누어,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결론 -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근거3 -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근거2 -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근거1 -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들을 향해 ‘멸망’이라는 결론을 먼저 선언합니다. 이어서 그 근거를 역순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먼저 ‘땅의 것’만 생각하고 마음을 씁니다. 여기서 ‘땅’은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상징하는 ‘하늘’과 대비되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탐욕이 꿈틀거리는 세속 영역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땅의 질서와 성공에 집착합니다. 이 땅에서 성취하고 승리하는 일에 삶의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를 오히려 ‘영광’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얻어낸 거대한 성과물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사람들 보기에는 휘황찬란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으스대며 자랑합니다. 끊임없이 과시하고 함부로 휘두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끄럽고 추합니다. 땅에서는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하늘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의 원수들은 마침내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습니다. 이 문장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상당수 학자들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 지 아닌지를 과도하게 따지는 걸로 보았습니다. 즉, 음식 규정을 비롯한 율법에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을 찬찬히 살피면 이 땅에서 거둔 허무한 영광에 취해 배를 가득 채우는 탐식과 음란 등의 방탕으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경제생활의 기초는 ‘조합’입니다. 같은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합의 단체식사 자리에서 여러 무질서하고 방종한 추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그런 불건전한 행태를 비판했던 문서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회 문화를 토대로, 이와 비슷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그들은 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통제받지 않는 욕망이 곧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바로 멸망입니다. 주님께서 내리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엄중한 심판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바울이 이렇게 분개하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불신자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매 주일 함께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삶의 목적과 태도와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방탕한 조합원들처럼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을 언뜻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매우 놀랍게도 그들은 빌립보교회 교인, 즉 신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면서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끔찍한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교회 생활은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자기 탐욕을 정당화할 이용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 분께 매력은 느끼지만 십자가의 정신과 삶은 부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될 주님의 다스림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땅에서 일어나는 세상살이에만 골몰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더 높이 오르려 했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 더 많은 것을 손에 움켜쥐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눈부시게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주님 보시기에 더럽고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은 성공에 취해 예수님이 아닌,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 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존립을 뒤흔들 정도로 복음이 심각하게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격정적으로 아픔을 토로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왜곡된 신앙을 바로잡는 참된 진리를 20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시민권’으로 번역한 헬라어는 <폴리튜마>입니다. 곧바로 옮기면 ‘국가’인데, 상당히 복잡한 의미를 지닌 정치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로마제국의 정복 정책을 반영합니다. 로마는 각 식민지마다 본국 시민과 퇴역 군인들이 편안하게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습니다. 해당 지역과 상관없이 제국 시민권자의 이익을 철저히 우선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을 가리켜 <폴리튜마>로 불렀습니다.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 있는 미군기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스’의 경우, 여의도 3배 규모입니다. 거기에는 학교, 도서관, 병원 뿐만 아니라 영화관과 대형체육관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느 도시 풍경과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작은 미국’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통 신호체계를 비롯한 모든 문화와 질서가 미국과 같습니다. 그곳에 있는 미군과 가족들은, 한 마디로 한국에서 미국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빌립보에서 로마를 산다.’라는 높은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로마의 대표적인 식민 도시, 즉 ‘폴리튜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자기 편지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생생하게 와닿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 즉 ‘궁극적인 소속과 다스림’이 바로 하늘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참된 정체성은 하늘에 속해 있다고 알려줍니다.
바울은 로마 지배 아래 있는 땅의 현실을 분명 인정했습니다. 땅은 빌립보 교인들이 매일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충분히 존중해야 할 삶의 터전입니다. 하지만 땅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탐욕의 법칙이 아닌 ‘하늘’ 뜻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구원하는 자”로 옮긴 헬라어 <소테르>는 신격화된 황제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을 제국 시민의 건강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소테르, 즉 ‘구원자’로 온 제국에 선전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소테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을 참으로 구원 하는 길은 화려하고 거대한 로마제국의 힘과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진리를 이토록 뜨겁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자신이 하늘 시민권을 따라 담대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관련하여 바울의 일생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곳은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헬라 철학과 수사학을 익히며 자랐습니다. 동시에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으로 흠 잡힐 만한 게 없는 정통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대 최고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로 들어가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삶을 일제 강점기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민족이 깊은 위기에 빠진 때에 어떤 사람이 미국 뉴욕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잘할 뿐 아니라 서양의 최신학문도 해박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안동에 있는 서원에서 정통 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연히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일으킬 유능한 인재로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그 앞에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넓게 열려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민족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국제정세도 능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 소멸해 가는 이스라엘을 건질 유능한 인재로 많은 격려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손에 든 배경입니다. 그 역시 자신을 향한 기대에 부응하려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야망에 사로잡혀 다메섹을 향해 맹렬하게 내달리던 길에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돌연히 만났습니다. 마침내 그 분을 자신의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바울에게 일어난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화려한 성공과는 철저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웠고, 끊임없이 짓밟히고 억눌리는 삶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결단이 바울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도 얼마든지 기득권을 움켜쥐며 살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와 로마 제국 사이를 약삭빠르게 오가며 성공가도를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을 감추고 몰래 교회를 도우며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늘 시민권이 그를 강력히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에게도 후회할 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동문수학 했던 친구들의 화려한 성공을 바라보며,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라며 수 없이 스스로 되물었을 겁니다. 그런 자신을 초라하게 여겼던 순간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꿋꿋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외롭고 고된 소명을 묵묵히 살아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학문과 배경을 성공 수단이 아니라 선교의 통로로 사용하였습니다.
그에게 복음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진실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진정 죽어야 다시 사는, 완전한 패배 가운데 찾아오는 부활의 위대한 능력을 온전히 신뢰 하였습니다. 제국이 손짓하는 화려한 성공의 길을 뒤로하고 우직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땅에서 하늘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며 제 마음에 떠오르는 역사 속 한 장면이 있습니다. 1919년 2월 8일, 그날 일본 동경에는 30년 만에 폭설이 내려 온 도시가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 사이를 헤치고 조선인 청년 600여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YMCA회관에 모였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정기총회로 소집되었습니다. 하지만 총회는 개회기도 후에 곧바로 ‘조선청년 독립단’의 ‘독립선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유학생 대표 백관수가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주창했습니다. 곧이어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이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바로 기독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3.1운동으로 이어지게 한, 2.8독립선언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총회파송 견습선교사로 1년간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마침 제가 다닌 일본어 학원 건물에 2.8독립선언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종종 둘러보며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유학생들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땅의 일’만 생각했다면, 일제와 손을 잡고 얼마든지 막대한 권세와 재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동경은 아시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도심 한복판에는 거대한 신궁이 건설되고 있었고 골목마다 신사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꺾은 일본의 힘과 돈과 종교가 너무나 막강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제국의 눈부신 영광은 영원해 보였습니다.
반면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유학생들은 당시로서는 소수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식민지 청년이었습니다. 조국에서 뒷바라지 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비겁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과는 한 걸음만 물러서고, 열심히 교회 생활하는 것으로 충분히 자기 정당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든 험난한 유혹을 어떻게 결연히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제국의 풍요에 둘러 싸여 그 한 복판에 살았지만, 비록 일본 땅에서 일본어로 공부하며 일본 문화에 젖어 생활했지만, 그들 가슴 깊은 곳에는 하늘 시민권이 뜨겁게 살아 숨 쉬었기 때문입니다. 천황을 자처하며 막강한 무력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일왕이 아니라 갈릴리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유일한 왕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득실거리는 배를 하나님 삼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삶의 기준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2.8 운동의 후예입니다. 한국교회 정신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가오는 엄중한 질문 앞에 마주서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따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땅의 일만 생각하여 부끄러움을 자랑하고 탐욕을 섬기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너무 비장하게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에서 도망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정당하게 열심히 노력해서 필요한 물질과 지위를 얻고 그것을 누리는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일입니다. 다만, 근본적인 삶의 태도와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탐욕에 굴복하고 익숙해져 심지어 신앙마저도 이용하는 죄악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비록 휘청거리고 때때로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슴에 끌어안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 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함으로 천국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자신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땅의 욕망에 휘둘려 하늘의 복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위한 참으로 소중한 위로와 권면이 있습니다. 4장 1절 말씀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이 말씀은 앞서 나눈 빌립보서 3장 후반부 내용에 대한 결론입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경청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따뜻하게 위로 하셨습니다. 그 위로 가운데 주님 안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 구절을 오늘 설교 내용에 비추어 문장을 덧붙여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학벌과 재산과 지위와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드넓은 품 안에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삶의 여러 시련으로 비굴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허무한 욕망을 따라 애써 자신을 포장하지 말고) 이와 같이 (그 어떤 좌절과 실패에도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위대한 패배자인)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기도
참된 왕이신 하나님
때때로 이 땅의 어리석은 경쟁에 골몰하였습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 부끄러운 성공을 자랑하였습니다. 허무한 탐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죄악을 회개합니다. 십자가를 대적하며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오직 멸망뿐임을 올바로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삶으로 고백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발은 땅의 현실 위를 굳게 디디지만 마음의 중심은 저 높은 곳을 향하며 하늘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신명기 6장 1~9절 "야훼 우리 하나님"
2024년 2월 1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신명기 6장 1~9절 "야훼 우리 하나님"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4절과 5절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흔히 <쉐마>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4절 앞부분을 원문 어순대로 직역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들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가 ‘쉐마’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은 어떤 내용일까요?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주님의 백성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즉 온 인격과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진리입니다. 어쩌면 뻔하고 당연하게 들립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씀을 쉽게 오해하곤 합니다. 사랑을 또 다른 낡은 율법으로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쉐마 말씀을 앞뒤 맥락 속에서 차근히 살펴봐야 합니다. 이 위대한 구절의 본래 의미에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 하나님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입니다. 본문 4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들으라!”라고 외치며, 그들이 귀 기울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야훼 우리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야훼’는 하나님의 생생한 인격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모세는 그 야훼께서 곧 ‘우리 하나님’이라고 외칩니다. 어쩌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고백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 진리일수록 항상 낯설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켜,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실 근본적으로 불가능 한 일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신성모독일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위험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조금만 곱씹어 보면 너무나 놀랍고도 충격적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복음이 시작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막연한 관념으로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공허한 논쟁과 궤변으로 진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도록, 주님께서 몸소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펼쳐 보여줍니다. 따라서 본문을 포함한 신명기 전체가 놓인 삶의 자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나요? 출애굽 공동체는 40년 광야 여정의 종착점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모압 평지에 모인 그들은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마침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힘차게 흐르는 강물 소리와 저 멀리 지중해에서 불어와 뺨을 간질이는 바람이 그들을 맞이하며 손짓합니다. 이스라엘은 흥분하며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육중한 삶의 현실이 그들 가슴을 짓누릅니다. 우선 가나안에 먼저 살고 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가만히 반겨줄 리가 없습니다. 처참한 전쟁이 곧 펼쳐질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거대한 물음표가 그들 머리 위에 그림자처럼 어둡게 드리웁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는 늘 행복한 일만 있을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은 아닙니다. 엄연히 사람 사는 땅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문화에 익숙합니다. 반면 그들을 기른 부모님은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가나안에 건너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농경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부모로부터 들은 적도 없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낯선 나라로 이민을 떠나 새로운 직업을 가지고 힘겹게 일하며 적응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이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고난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생활과 종교는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옛 사람들은 특정 공간과 특정 직업을 관장하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집트와 광야에서는 그럭저럭 힘을 발휘하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뿌리내릴 땅에도 과연 그 능력이 변함없을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가나안 신들보다 약할 수도 있다는 거대한 불안과 공포에 그들은 휩싸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그들이 앞서 경험한 은혜를 마음에 거듭 새겼습니다. 그 말씀들을 정리한 성경이 신명기입니다. 그 중심에 ‘쉐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쉐마를 포함하는 6장을 시작하며 모세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1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여기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얼핏 모세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을 가리켜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향해 알려준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 말씀을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3절부터 십계명이 시작합니다. 따라서 2절은 십계명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십계명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어서 그 위대한 구원을 이룬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알리십니다. 바로 ‘주 너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존경하는 위인, 가령 주기철 목사님께서 지금 우리 눈 앞에 서 계십니다. 목사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시며 “나 주기철은”이라고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다음 말을 경청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름을 걸고, “나 아무개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에는 누군가가 스스로 이해하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자기 이해는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너무나 깊고도 찬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알리셨을까요? 백성들이 바짝 엎드려서 맹종해야 할 대상, 혹은 마냥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숭배해야 할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너희 하나님’이 되시고자 이스라엘을 고난에서 건지신 구원자이십니다. 당신의 백성과 따스하고 친밀한 관계와 사귐을 이루시려 그들의 눈물에 응답하신 인도자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물론이고,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입니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그 놀라운 복음을 모세에게 다시 들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1세대의 자녀들입니다. 열 재앙과 홍해 이적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돌보심을 따라 광야를 지났습니다. 그 야훼께서 여전히 ‘너희 하나님’이라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습니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을 향해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난날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 가실 구원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그 어떤 모양의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능력과 구원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 다른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항상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성공과 부와 명예로 유혹하는 가나안 신들은 모두 허상이며 반드시 무너질 우상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유일하십니다.
그러한 ‘우리 하나님’께 믿음의 자녀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제 우리는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께 드릴 ‘사랑’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됩니다. 그것은 감정에 겨운 감상이 아닙니다. 의무적인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자랑하려는 율법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너희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출애굽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치열하게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담긴 눈부신 사랑을 마음에 품고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진심으로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문 6~9절에 따르면 쉐마 구절을 몸에 지니고 집 곳곳에 붙여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상당히 오묘합니다. 직전인 5절에서 하나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그 다음에 관련한 종교 행위를 자연스럽게 추측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가정 안의 자녀 신앙 교육으로 이어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참된 신앙은, 그의 하나님 사랑은 가족들과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에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 사랑에 참으로 감격한다면 자녀들에게 더욱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잔소리 하고 다그치며 교회 생활을 강요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쉐마가 되어 가정 안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 온기로 말미암아 모든 일상 가운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이 가득히 울려 퍼지길 바랍니다.
그 소망 가운데 오늘 하루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삶의 어떤 변화와 시련에도 항상 함께 하시고 돌보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기도
야훼, 우리 하나님
설렘과 공포가 교차하는 눈빛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저희도 저마다의 모압 광야를 지납니다. 삶의 끝없는 모순을 절감하며 지치고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자격 없는 죄인을 일으키신 놀라운 구원을 바라봅니다. 저희를 향해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외치신 위대한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여 주님을 향해 진실로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유일하신 주님만 사랑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길 다짐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 하루도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 더욱 진실한 사랑의 관계로 이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4년 2월 12일 월요일
영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1995) 리뷰
*스포일러 포함
그는 강하다
화려한 성과와 경력을 자랑한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부하로 압도한다.
"Shut the fuck up!" 외칠 때 그의 권력은 절정에 이른다.
노련한 핵잠수함 함장인 프랭크 램지 대령의 말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그의 치명적인 취약성이 드러난다.
꼭꼭 숨겨온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폭발한다.
그 결과 판단력과 절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잠수함 같은 자기 세계에 갇혀, 아집에 휩싸여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조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
반면 부함장 론 헌터 소령은 정반대 인물이다.
엘리트지만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지 않았다.
부하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고 존중했다.
위기 상황에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해결했다.
그 덕분에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재앙에서 구했다.
이렇듯 함장은 미국의 위대함은 감동적으로 외치는 탁월한 웅변가지만 정작 그 핵심인 민주주의를 배격했다.
반면 부함장은 비록 경험은 부족하지만, 더 넓은 시야로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고 실천으로 옮겼다.
이처럼 영화는 두 주인공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두 사람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청문회가 끝나고 프랭크 램지는 론 헌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옳았고 나는 틀렸네"(You were right, and I was wrong.)
그는 강하다
화려한 성과와 경력을 자랑한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부하로 압도한다.
"Shut the fuck up!" 외칠 때 그의 권력은 절정에 이른다.
노련한 핵잠수함 함장인 프랭크 램지 대령의 말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그의 치명적인 취약성이 드러난다.
꼭꼭 숨겨온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폭발한다.
그 결과 판단력과 절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잠수함 같은 자기 세계에 갇혀, 아집에 휩싸여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조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
반면 부함장 론 헌터 소령은 정반대 인물이다.
엘리트지만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지 않았다.
부하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고 존중했다.
위기 상황에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해결했다.
그 덕분에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재앙에서 구했다.
이렇듯 함장은 미국의 위대함은 감동적으로 외치는 탁월한 웅변가지만 정작 그 핵심인 민주주의를 배격했다.
반면 부함장은 비록 경험은 부족하지만, 더 넓은 시야로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고 실천으로 옮겼다.
이처럼 영화는 두 주인공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두 사람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청문회가 끝나고 프랭크 램지는 론 헌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옳았고 나는 틀렸네"(You were right, and I was wrong.)
이로서 그는 훌륭한 군인으로서 명예를 회복했고, 영화는 단순한 전쟁 액션 영화를 넘어 지도력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안겨주는 걸작이 되었다.
독선을 내려놓고 자기 오류를 겸손히 인정할 때 비로소 위기를 이겨내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실천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를 참으로 지킬 수 있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실천해야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힘과 권위를 내려놓는 용기와 섬김이다.
가장 가까이 날마다 마주하는 이들을 참으로 존중하고 돌보아야 한다.
목회자의 진가는 그의 감동적인 언변이 아니라 일상에서 무던히 실천하는 목회적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독선을 내려놓고 자기 오류를 겸손히 인정할 때 비로소 위기를 이겨내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실천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를 참으로 지킬 수 있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실천해야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힘과 권위를 내려놓는 용기와 섬김이다.
가장 가까이 날마다 마주하는 이들을 참으로 존중하고 돌보아야 한다.
목회자의 진가는 그의 감동적인 언변이 아니라 일상에서 무던히 실천하는 목회적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이 알려주는 복음의 신비 속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새 40대 목회자가 되어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기득권을 손에 쥔 나 자신을 여러모로 돌아보게 한 영화다.
중후반부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더욱 씁쓸하게 다가오기에, 오히려 깊은 울림을 안겨준 램지 대령의 초반 명대사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자네(부함장 론 헌터 소령)에게 몇 가지 충고를 좀 하고 싶군.
자네도 언젠가 함장이 되고 싶다면 가장 하면 안 되는 일은 자신만 생각한다거나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일세.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놈은 싫어. 아첨꾼은 절대 싫고.
언제나 자네 임무와 대원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네."
Allow me to give you a tiny bit of advice.
If you want your own boat someday.
the very worst thing you can do is worry about yourself or try to impress me.
I can't stand save-asses, and I won't abide kiss-asses.
You keep your priorities straight:
Your mission and your men.
어느새 40대 목회자가 되어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기득권을 손에 쥔 나 자신을 여러모로 돌아보게 한 영화다.
중후반부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더욱 씁쓸하게 다가오기에, 오히려 깊은 울림을 안겨준 램지 대령의 초반 명대사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자네(부함장 론 헌터 소령)에게 몇 가지 충고를 좀 하고 싶군.
자네도 언젠가 함장이 되고 싶다면 가장 하면 안 되는 일은 자신만 생각한다거나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일세.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놈은 싫어. 아첨꾼은 절대 싫고.
언제나 자네 임무와 대원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네."
Allow me to give you a tiny bit of advice.
If you want your own boat someday.
the very worst thing you can do is worry about yourself or try to impress me.
I can't stand save-asses, and I won't abide kiss-asses.
You keep your priorities stra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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