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8일 화요일

사무엘하 6장 12~17절 "마침내 기쁨으로"

포항제일교회 주일예배, 2023년 7월 16일, 목사 정대진
사무엘하 6장 12~17절 "마침내 기쁨으로"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기뻐합니다. 체면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격렬하게 춤까지 출 정도입니다. 여기서 ‘기쁨’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로 이어지는 긴 이스라엘 역사서에 단 세 번만 나옵니다. 그 모두,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한 경사를 표현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본문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다윗 혼자가 아닙니다. 온 이스라엘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궤가 그들 가운데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거리마다 환호성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사람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감정은 ‘기쁨’이라는 두 글자로 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쁨 아닌 기쁨입니다. 한 꺼풀만 들춰봐도 그 내면에는 복잡다단한 아픔과 설움이 뒤엉켜 있습니다.

관련해서 ‘베레스웃사’에 대해 기록한, 본문 앞 단락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사건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읽겠습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권위적인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면 집안 공기가 차가워집니다. 무능한 직장 상사가 열등감에 찌들어 철없이 짜증 부리면 회사 분위기가 무거워집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것도 매우 격정적으로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의 노여움을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거대한 공포가 이스라엘을 압도하였습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점은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수레를 끌던 소가 휘청거려 언약궤가 땅에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얼른 붙잡았습니다. 얼핏 보면 민첩한 대처입니다. 오히려 칭찬받을 행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엄중한 심판이 내려져 그 자리에서 곧바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장면이 이해되십니까? 사실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괴팍하고 심술궂어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체 언약궤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궤’는 법궤, 언약궤, 증거궤 등으로 다양하게 불립니다. 그 거룩한 상자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위를 천사 조각 두 개로 장식 했습니다. 이 자체로 주님의 강력한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실로 성전에 있었던 법궤를 전쟁터에 가져갔습니다. 법궤와 함께라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궤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나라의 존립 자체가 무너지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보관했습니다. 의도는 분명합니다. 자기들 신이 이스라엘 신 야훼보다 강하다는 우월감입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블레셋은 놀라서 새 수레를 만들고 소에 메어 언약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커다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은 마음이 얼어붙었습니다. 주님의 궤를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님의 궤’를 잘 지켰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에 다시금 온기가 돌았습니다. 그 후 7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렇듯 언약궤에는 이스라엘이 그동안 겪은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실행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궤를 훌륭하게 모신 아비나답 가문이 맡았습니다. 그중에서 웃사와 아효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둘을 가리켜 ‘아비나답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정황상 알리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 두 사람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부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어명에 의해 진행하는 국가 행사를 총괄하며 더욱 우쭐거렸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누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언약궤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 뜻을 순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들을 욕망에 따라 하나님을 움켜쥐고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먼저 사무엘하 6장 3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궤를 새로 만든 수레에 실었습니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입니다. 바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벧세메스로 보낼 때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의 행동입니다. 반면 모세 율법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 4:15)

이 규정을 웃사와 아효가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버지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무엘하 6장 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서 몰았습니다. 자기들을 더욱 돋보이려는 야망과 편의를 위한 행동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6장 4절 보겠습니다.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 앞에서 가고

사무엘하 6장에서 언약궤는 총 15번 나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궤” 혹은 “주님의 궤”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을 강조합니다. 4절에서 다윗이 보낸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왔다고 언급합니다. 반면, 바로 이어서 웃사가 법궤보다 압장 설 때는 유일하게 그냥 “궤”라고만 언급합니다. 

사무엘 역사가의 너무나 의도적이고 냉정한 기록입니다. 즉, 웃사와 아효 형제가 법궤를 단순히 상자로 대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거룩한 소명이 아닌, 형식적인 노동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결정적으로 사무엘하 6장 6절 보겠습니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히, 아하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가장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앞서 이 장면이 얼핏 난해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맥락을 살펴보면, 여기에 드러난 웃사의 악한 의도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는 단순히 법궤를 보호하려고 손을 댄 게 아닙니다.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움켜쥐려 했습니다. 구약 원문에 이 의미가 생생하게 잘 드러납니다.

6절의 “붙들었더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하쯔>입니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유명한 창세기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출생입니다. 알시다시피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과 싸웠습니다. 그러다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창 25:26). 그때, “잡았으므로”라고 옮긴 히브리어 역시 <아하쯔>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관통하는 몸짓입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집요한 집착과 치열한 야망을 드러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웃사가 법궤를 붙잡은 것은 야곱이 에서의 뒷꿈치를 잡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아하쯔>는 ‘소유로 삼다.’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앞서 소개한 민수기 4장 15절은 언약궤를 포함한 성물을 두고 “만지지 말라”는 명령도 함께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죽으리라”라고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섭게 윽박지르고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법궤에 함부로 손을 대기 시작하면, 점점 자기의 느낌과 경험으로 익숙하게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감히 소유하려는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웃사와 아효가 그러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 자기 집에 언약궤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주님의 궤를 모시는 것을 매일 보고 자랐습니다. 이웃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우리 가정을 우러러보며 존경합니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언약궤가 친숙해 졌습니다. 경외심이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신 저 기이한 상자를 통해 더 유명해지고 부유해지고 싶은 탐욕이 커져갔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임금께서 직접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겠다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옵니다. 각종 악기가 웅장하게 찬양을 연주합니다. 그 화려한 대열의 중심에서, 웃사는 법궤가 실린 수레를 내려다보며 기세등등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얌전하던 소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도착하자 갑자기 몸을 심하게 흔들어 댔습니다.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갑니다. 이대로 계획을 망칠 수 없습니다. “안돼!”라고 외치며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었습니다. 있는 힘껏 법궤를 움켜잡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가차 없이 내리치셨습니다. 그날 그 순간, 웃사가 보인 단 하나의 행동만을 두고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그가 주님을 억지로 붙잡고 마음대로 흔들려 했던 죄악 가득한 태도를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가장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화를 냈습니다. 다윗은 분명 궤를 메어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명령을 무시하고 수레에 실었다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내 말을 잘 들었다면 아무 일 없었을지 모릅니다.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냉철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영웅 서사’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6장 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무심결에 자기 죄를 실토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9 그 날 다윗은 이 일 때문에 주님이 무서워서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 순간에 본심이 나옵니다. 억지로 붙잡은 체면이 무너지고 덜컥 속마음을 말하곤 합니다. 지금 다윗이 그러합니다. 그는 자기가 계획한 이 법궤 행렬의 종착점을 언급합니다. 바로 ‘내가 있는 곳’입니다.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6장 전반부에서 언약궤의 출발점이 기럇여아림의 다른 이름인 ‘바알레유다’라고 분명히 언급합니다. 하지만 정작 목적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암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 어딘가에 다윗이 준비한 장소입니다. 관련해서 사무엘하 이야기의 흐름을 가운데 5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러 위기를 이겨내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예루살렘성은 여부스 사람들이 살았던 매우 견고한 요새입니다. 지금까지 이어오는 이스라엘의 중심지입니다. 나라의 혼란을 끝내고 발전해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도입니다. 그 눈부신 성과에 다윗은 감격하며 벅차 올랐습니다. 자기 이름을 따서, ‘다윗 성’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지난날 언약궤를 뺏어가 이스라엘에 수치심을 안긴 블레셋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승리와 번영의 분위기가 점점 활기차게 움터 올랐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입니다. 더 이상 아비나답의 집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기필코 예루살렘성으로 모셔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윗은 온 나라의 힘을 모아 화려한 이벤트를 연출합니다. 먼저 사무엘하 6장 1절을 보면 군사 3만명을 모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굳이 3만명일까요? ‘3만’은 지난날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뺏겼던 전투의 전사자 숫자입니다(삼상 4:10). 지난날 조상들에 의해 무너진 나라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굉장히 치밀한 연출입니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깊게 상처받고 움츠러든 백성의 마음을 치유하기 원했습니다. 주님의 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되길 소망했습니다. 임금으로서 너무나 탁월한 판단과 추진력입니다. 어찌보면 무척 당연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당연하다고 해서 옳은 건 아닙니다. 다윗은 정작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인 사무엘하 7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두고 예언자 나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 모습과 비교하면 다윗의 잘못이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왜 하나님의 궤를 무모하게 옮기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야망에 눈이 가려 조급하고 불안해서입니다. 

다윗은 오랜 도망자 생활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여전히 많은 위험 요소가 남아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하루속히 확보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왕으로서 정통성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상징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법궤였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법궤를 가져오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자기 명령을 무시하고, 율법을 어긴 것을 뻔히 알고서도 내버려 둔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이 지은 죄는 하나님께서 벌하신 웃사와 그리 다를 바 없습니다. 오히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기에 훨씬 큰 책임과 잘못이 있습니다. 그 역시 웃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움켜쥐고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언약궤의 이동 방법과 시기와 장소를 제멋대로 결정했습니다. 거창한 행사로 야망을 감추려 했습니다. 보기 좋고 듣기 그럴듯한 화려한 명분과 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핵심은 다윗이 권력에 취해 주님을 ‘내가 있는 곳’으로 끌어들이려 한 오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에 의해 놀아나지 않으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영광과 존귀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스스로 이루어 가십니다. 거룩한 진노를 뿜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가증하게 세운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축제를 장례로 바꾸셨습니다. 그 결과, 들떠 올랐던 열기가 차갑게 식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 어떤 누구도 감히 희망을 꿈꾸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득한 절망 속에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쓰린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은 침묵했고, 다윗은 괴로움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본문 1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언약궤를 대신 맡아 보관하던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주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는 제한적입니다. 분명 좋은 소식인 건 맞지만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아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도 좋다는 분명한 계시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기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함께 즐겁게 환호했습니다. 마침내 기쁨으로 예배드렸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그들의 감정과 표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기쁨이란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 아닌 기쁨입니다. 서러운 통곡과 좌절과 신음과 분노를 거쳐 피운 웃음과 미소입니다.

우리가 늘 마음에 새겨야 할, 성경에 기록된 가장 극적인 예배 장면입니다. 순도 100%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마다 근심과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속 어딘가에 흉터를 안고 예배하러 나아옵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품어 안으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돌보시는 복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마침내 기뻐하며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것이 곧 참된 예배임을 내면 깊이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본문은 온전한 예배 가운데 있었던 중요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3절입니다.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히, 짜아드>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은 베레스웃사의 죄악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 주님의 궤를 율법에 따라 사람들 어깨에 메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조급해하며 얼른 움직이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섯 걸음 뒤에 제사, 즉 예배 드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걸음’은 히브리어로 <짜아드>입니다. 구약에서 그리 자주 나오지 않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래한 단어가 사무엘하 5장 24절에서 앞서 나가시는 주님의 걸음 소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 가운데 새롭게 깨달아야 할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걸음에 내 발걸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부추깁니다. 더 빨리 더 멀리 쉬지 말고 달려가라고 합니다.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중요한 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남들보다 느리고 때로는 멈춰 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보폭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검하고 돌이키며 바로잡으며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곧 예배라는 사실을 거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 예배의 중심에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처음 만들었을 때는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분명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쟁터에서 블레셋에게 뺏기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곳곳에 흠집이 생겼습니다. 여기저기 벗겨지고 갈라지고 뒤틀렸습니다. 때때로 비바람을 맞고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느 소년 병사의 검붉은 핏방울이 눈물 자국처럼 묻어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하지만 분명 사람들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탓에 낡고 상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가며 겪은 온갖 시련과 아픔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저 멀리 하늘 위에 찬란한 영광 가운데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각자 원하는 욕망에 따라 예수님을 붙잡고 거세게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묵묵히 자기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수많은 공포에 짓눌리며 눈물짓고 근심하는 모든 이들에게 참된 기쁨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예배받으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거친 현실을 넘어 지치고 상처 입은 몸으로 우리를 품어 안으신 주님만이 우리 삶과 예배의 중심이십니다.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님을 움켜쥐고 끌어당기려는 어리석은 욕심을 내려놓고, 마침내, 기쁨으로 예배하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으로 예배받기 합당하신 주 하나님.
때때로 저희는 웃사와 아효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주님을 움켜쥐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 욕망이 바라는 길로 하나님을 끌어당기곤 합니다.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전쟁터와 우상의 신당을 나뒹굴며 생긴 수없이 많은 흠집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언약궤처럼, 상하고 지친 모습으로 저희 가운데 오신 예수님만이 예배의 중심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살이의 그 어떤 고달픔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기쁨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성공을 향한 조급함과 실패에 대한 불안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걸음에 저희 걸음을 맞추게 하옵소서.
심판을 넘어서는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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