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넷째 주일, 2025년 2월 1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어리석고 연약한 하나님”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일본 나가사키현 소토메 마을에 있는 “침묵의 비”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그곳은 일본의 국민 작가 엔도 슈사쿠가 쓴 소설 “침묵”의 배경입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일본 막부에 의해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있었던 17세기입니다. 그때 로마에 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33년간 일본 선교사로 충직하게 사역한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보고입니다. 고난 가운데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그가 신앙을 저버렸다는 이야기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젊은 신부가 먼 일본 땅으로 건너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참혹한 박해를 목격합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후미에’입니다. 화면에 보시는 데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새긴 금속판입니다. 당시 일본 막부는 후미에를 밝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가늠했습니다. 형식적이더라도 예수님의 얼굴에 발을 대면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부한다면 잔혹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소설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성화를 밝으라고 한다. 시장에 팔려 나온 나귀처럼 신도들은 일렬로 세워졌다. (중략) 파수꾼이 허리를 굽혀 천으로 싼 성화를 승창과 농민들 사이에 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중략) 명부를 들추며 관리 한 사람이 이름을 불렀다. (중략) 몽둥이로 두세 번 등을 밀어도 몸을 앞으로 굽힌 채 무릎을 꿇고 앉은 자리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구보우라 조오기치’, 애꾸는 사나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두 번 저었다.
(중략) 돌연 누군가가 안뜰로 달려 나왔다.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신부가 창살에 바짝 붙었을 때는 이미 처형을 끝낸 관리가 예리하게 빛나는 칼을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애꾸는 사나이의 시체는 땅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파수꾼이 그의 발을 잡고 질질 끌며 신도들이 판 구덩이로 천천히 시체를 옮겨갔다. 그러자 그 시체에서 검은 피가 물줄기처럼 한없이 흘러 나왔다.”
무릎을 꿇은 채 후미에 밝기를, 예수님의 성화를 모독하기를 끝까지 거부한 에꾸눈 사나이는 결국 관리가 휘두르는 예리한 칼날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신부는 소설에서 이렇게 자신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읊조립니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 소리와 파리의 날개 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한 심정을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너무나 허무한 장면입니다. 신앙이라는 이유로 한낱 금속판에 발을 대지 않고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 너무나 어리석어 보입니다. 일본에서 실제 일어난 박해였기에 우리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비슷한 순교 장면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일꾼으로 세움 받은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붙잡혀 이스라엘 공회에 끌려갑니다. 대제사장 앞에 선 그는 당당하게 복음을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구약 이야기가 증언하는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시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서 동일한 영광을 지닌 분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사실상 공개 자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분노한 군중이 순식간에 스데반을 둘러쌌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을 던졌습니다. 잔혹한 즉결처형 입니다. 성경은 그 현장에 있었던 한 청년의 이름을 들려줍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고대사회에서 옷은 가장 비싸고 소중한 재산입니다. 군중 속에 섞여 죄인을 향해 돈을 던지다 자칫 더럽히고 상할 수 있습니다. 옷을 벗어 어딘가 보관해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의심없이 사울, 곧 바울의 발 앞에 옷을 두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신념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처형에 적극 동의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한 때 그토록 혐오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약 1년 반을 머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많은 애정과 헌신으로 교회를 일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로부터 나쁜 소문이 들립니다. 그들이 복음을 변질시키고 왜곡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편지를 씁니다. 18,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본문에서 여러차례 반복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미련’입니다. 사실 지나치게 점잖은 다소 아쉬운 번역입니다.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를 곧바로 옮기면 ‘바보같다.’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 달리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마치 유대인들에게는 ‘따뜻한 얼음’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바울 자신이 과거에 분개했던 이야기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너무나 멍청하고 황당한 생각입니다.
소설가 황순원이 지은 단편 ‘별’에 한 소년이 등장합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혼자 공상에 사로잡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꾸며냈습니다. 그러다 옆집에 사는 과부 할머니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소년의 누나가 어머니와 똑 닮았다고 알려줍니다. 집에 들어가 물끄러미 누나의 얼굴을 살펴보다 불쑥 화가 치밀었습니다. 상상했던 어머니의 고운 모습과 달리 누나는 못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후 소년은 애꿎은 누나를 미워하고 괴롭힙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한 태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실제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장 처한 민족의 위기를 구해줄 강력한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한 눈부신 영웅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등장을 간절히 기대하며 온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남자가 나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나사렛은 로마 군대가 주둔지 인근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절대로 메시아가 나올 수 없는 비천한 동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무시한 망나니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의 반역범들에게 주어지는 사형틀인 십자가에 메달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눈에 보기에 가장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매우 과격한 신성모독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입니다. 그런 그가 드디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골치 아픈 일은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숨어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 나타나 그의 무덤이 비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살아나 자기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올라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바보 같고, 멍청한 소리’입니다. 그런 궤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른 다는 것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짓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거듭 지적하는,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한때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며 또다른 참담한 슬픔에 잠깁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모여 예배하는 교회 조차 복음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샌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외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참 진리를 어리석게 여기며 소홀히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바라보며 분파를 이루고 싸웠습니다. 세상 사람도 저지르지 않는 부끄러운 죄를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24, 25절 읽겠습니다.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모습은 철저히 약하고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며 주님의 참 권능을 온 우주에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위세를 자랑하는 힘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철저히 낮아지는 능력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끝임 없이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몹시 우둔해 보입니다. 고결한 이성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우매한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백합니다. 철저히 바보 같아 보이는, 그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 온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은 어리석고 약하게 여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지혜와 능력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놀라운 반전이 드러납니다. 20절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0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대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바보 같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이성과 욕망을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철저한 낮아짐과 희생으로 진정한 지혜가 드러났습니다. 그러한 참 지혜로 세상의 지혜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들이 확고하고 옳다고 고집하고 주장하는 것이 실상 얼마나 거짓인지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엄중히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에게 진정한 지혜와 능력의 기준은 과연 무엇입니까?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저 모호한 교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막연한 관념으로 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선명한 푯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바보로 평가하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힘있고 화려해 보이는 거짓 메시아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 대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신 대로 남들 위에 높이 서려 하기 보다는 더욱 낮아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저하고 불편해 하는 섬김을 실천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오해를 받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으로 ‘전도를 미련하게 하는 것’을 정당화 하면 안 됩니다. 미련한 것 같은 노방전도를 통해 교회 신자가 늘어나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문맥과 단어의 정확한 뜻을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서 전도는 흔히 생각하는,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게 아닙니다.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 즉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미련’의 진정한 뜻은 앞서 설명 한대로 ‘바보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21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세상은 자기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무맹랑해 보이는 것 곧 선포를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좋게 여기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지혜로 행하신 선택입니다. 그분의 확고한 사랑을 드러낸 의지입니다. 주님은 일부러 허무맹랑해 보이는 십자가를 움켜 쥐셨습니다. 거기에 당신의 아들이 오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십자가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기를 쓰고 남들 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야 합니다. 내가 당연히 머물 수 있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힘겹고 때때로 상처 입을 지라도 누군가에게 밟히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부활로 향하는 생명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찾아 일본으로 간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배신당해 관리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만약 자기가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죄 없는 일본 신자들이 끔찍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을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를 향해 일본 관리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집요하게 설득합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숭고하게 품었던 신념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그 장면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여, 긴긴 세월 동안 저는 수없이 당신의 얼굴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이 일본에 오고 나서는 한층 더 그랬습니다. 도모기 마을의 산에 숨어 있을 때, 산속을 방황할 때, 그리고 저 옥사에서 밤에 기도드릴 때마다 당신이 기도하고 계신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고독할 때는 당신이 축복하고 있는 얼굴을 생각해 내고, 체포되던 날에는 당신이 십자가를 짊어진 얼굴을 다시 생각하고, 그리고 그 얼굴은 내 영혼에 깊게 새겨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어 나의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나는 이 발로 밟으려고 합니다.(중략)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릅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밝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다. 소설 속 이 상황 속에서 꿋꿋하게 계속 후미에를 거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교회는 신사 참배를 강요당했습니다.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순교한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지 종종 자신에게 불어봅니다.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정확히는, 무엇이 옳은지도 쉽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순교하며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이들의 절개는 분명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얼굴을 밟은 사람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짓밟히려 이 땅에 오셨고 그 절정인 십자가에서 온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따라서 숭고한 신앙 형식을 지키려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지극히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랑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철저히 바닥에 떨어지고 상하고 먼지에 나뒹굴 때 비로소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망해야 합니다. 거기에 담긴 사랑을 닮고자 애써야 합니다.
그 사랑이 청년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지극히 모욕적인 발언이 놀라운 복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혐오스러운 십자가가 눈부신 은혜의 증거라는 진리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그가 인생의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고독한 순례의 길을 걷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지, 그 핵심을 깊이 들여다 봐야 합니다. 유대인이 구했던 허무한 이적을 바라지 않았는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찾았던 공허한 지혜를 구하지 않았는지 되짚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여긴 믿음 이면에 혹시나 부풀어 오른 욕망이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닌지 가만히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어리석은 기대로 주님께 세련된 옷을 입히고 크고 화려한 왕관을 씌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나온 여정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십자가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세상의 조롱과 핍박을 넘어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품고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본문 24~25절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24 그러나 유대아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부름받은 그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나님의 ‘허무맹랑해 보이심’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고, 하나님의 ‘약해 보이심’이 사람들보다 더 힘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능력과 지혜의 주 하나님
유대인들처럼 이적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처럼 지혜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느라 어느샌가 십자가의 복음이 흐려지는 잘못에 빠지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바보 같다며 비웃고 경멸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저희를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임을 고백합니다. 그 어리석어 보이는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한 삶으로 진리를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