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5일 수요일

서울노회 담임목사 계속교육

 

가평우리마을 두 번째 방문이다.
참 절묘한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모든 게 다르다
그날, 그 밤과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많은 걸 실감하며 그저 감사드린다.

2026년 2월 24일 화요일

마태복음 4장 1~11절 “광야로 이끄사”

2026년 2월 22일, 사순절 첫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4장 1~11절 “광야로 이끄사”


세례 받으시고 광야로 가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신약 원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토테>라는 헬라어가 1절의 첫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매우 즐겨 사용하는 낱말입니다. 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을 강조합니다. 즉, 바로 앞에 기록된 내용과 긴밀하게 다음 내용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문맥을 이해해야 합니다. 특정 구절과 단락에 눈이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치에서 어떤 흐름을 따라 전하는 말씀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마침 지난 1월 11일 주일예배 때 함께 읽었던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하늘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무나 황홀한 풍경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예수님을 향한 가장 위대한 찬사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이미 앞선 세례 장면에서 성령님이 등장하셨기에 자연스러운 연결입니다. 여기까지만 끊어보겠습니다. 익숙한 성경 지식을 내려놓고 낯설게 보시길 바랍니다. 세례 받으시며 화려하게 첫 걸음을 내디디신 예수님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셨습니다. 자연히 눈부신 승리와 영광의 무대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1, 2절 함께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광야, 금식, 시험. 이런 단어들이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읽는 마태공동체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네 권의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은 가장 히브리적인 복음서입니다. 구약 성경을 자주 언급합니다. 이 책을 읽는 첫 번째 독자들은 구약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토막내어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과 달리 귀로 듣고 외우는 게 익숙했습니다. 구약 성경 속 중요한 주제어나 장면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긴 맥락을 연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태공동체는 본문 1, 2절에 묘사된, 광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출애굽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하나님께서 길을 여신 홍해 바다를 건너는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계속 이어 광야를 향한 웅장한 대열을 진행할 것만 같습니다. 눈부신 이적을 계속되길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거친 시련을 겪었습니다. 쓴물을 마주하며 자기들 의 밑바닥을 발견하였습니다. 처절한 한계와 직면하는 시험 을 내내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무려 사십일이나 금식하시고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있었 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겪는 고난은 그 한 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생의 광야 여정을 지나는 모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을 몸소 짊어지셨습니다. 홍해 이적과 마라의 쓴 물이 공존하는 삶의 현실을 온 몸으로 끌어 안으셨습니다.


시험인가 유혹인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에 의해 광야로 가셨는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시험 받으셨습니다. 상당히 모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고된 시험으로 몰아넣는 다는 게 얼핏 잘 와닿지 않습니다. 굳이 당신의 아들을 시험해 자질을 검증하려는 것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런 이유로 ‘시험’이라는 단어 선택에 대한 논란이 분분 합니다. 해당하는 헬라어를 시험 대신 ‘유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험의 장소인 광야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다가가 악한 손길을 건넨 존재는 하나님이 아닌 마귀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헬라어 단어를 두고, 대한성서공회가 출간한 네 가지 성경이 각각 다르게 옮겼습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성경과 새번역 성경은 ‘시험’으로, 새한글 성 경과 공동번역은 ‘유혹’으로 옮겼습니다. 그만큼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은 일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시험 당하셨을까요? 마귀에게 유혹 당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둘 다입니다. 어느 한쪽만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험당하시며 유혹당하셨습니다. 동시에 유혹당하시며 시험 당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탄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마귀는 감히 하나님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 안에서 활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예수님이 시험을 받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왜 그러한 유혹을 감수 하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지금 예수님께서 겪는 시험이 단지 그 한 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는 모든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고통을 몸소 짊어진 희생입니다.


시험의 내용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주한 시험 혹은 유혹의 의미를 차근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세 가지 제안으로 주님께 다가와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먼저 3절 함께 읽겠습니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 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먼저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어 먹으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사십 일 금식으로 몹시 허기진 상태입니다. 배고픔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마귀는 그런 연약함을 저격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굶주림을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품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에게는 얼마든지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도 있습니다. 즉, 주님의 존엄과 자격에 대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배고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인간을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음식입니다. 먹어야 사는 존재에게 먹을 게 없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집니다. 또한 그런 처지에 놓인 자기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보입니다. 그런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어떤 짓이든 하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단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여러 종류의 허기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 온갖 굶주림을 게걸스레 채우려 합니다. 인정을 받고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추태를 부리기도 합니다. 사랑을 갈구하며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혼 깊은 구멍을 메우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다음으로 5~6절 읽겠습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 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번에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거기서 뛰어 내려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한 걸음 더 교묘한 술책을 씁니다.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들이 보호할 거라는 말씀을 가져와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끄떡없을 테니 뛰어보라고 유혹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확인합니다. 성경 문자 자체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성경 본문이 정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더욱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을 때, 오히려 악한 세력에 의해 함부로 이용당할 위험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인 ‘신뢰’를 도전합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인생의 아찔한 추락을 경험합니다. 그때, 주님의 극적인 개입과 도우심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구해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녀들 의 고통에 무감한 듯이 냉랭하게 버려두신 것만 같은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부여잡고 끌어 당겨 이용하려는 인간의 절박함을 사탄은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이어서 8~9절 함께 읽겠습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번에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 갔습니다. 실제 있는 산에 물리적으로 이동했다기 보다는 시각적인 환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럽습니다. 천하만국이 한눈에 보이는 산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온 세계와 그 찬란한 영광을 주님께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역시 우리 삶과 매우 긴밀합니다. 바로 ‘숭배’의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 눈앞에 고대 종교의 신상이 서 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 앞에 머리 숙여 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사탄은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을 흔들어 댑니다. 과도하게 높은 지위를 우러러보게 만듭니다. 심지어 신앙으로 합리화 하기도 합니다. 대놓고 마귀에게 절을 하지 않을 뿐 인간 내면의 뿌리 깊은 탐욕은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를 경배하게 만듭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굶주림과 신뢰와 경배, 이 세 가지를 두고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광야로 향하신 모습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다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여러 위기를 겪으며 하나님의 즉각적인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황금으로 만든 소를 비롯해 우상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이를 통해 더욱 명확히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대표해 광야로 가셨듯이, 그곳에서 당한 시험 역시 인류의 근원적인 결핍과 고통을 짊어지신 결과입니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치열한 시험을 통과 하셨습니다. 처절한 한계를 직면하고 몸부림치셨습니다.


말씀으로 이기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셨을까요? 먼저 4절 함께 읽겠습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 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어서 7절입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지막으로 10절입니다.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시험과 유혹을 대처하는 예수님의 가장 확실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이 속삭일 때마다 주님은 말씀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진리를 선포하시며 거짓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만이 자녀를 참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영혼 깊은 곳을 멍들게 하는 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굶주림을 채웁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주님을 뒤흔들려는 조급함과 불안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탐욕으로 그려낸 거짓 우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경 구절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6~8장에 몰려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백성에게 했던 설교입니다.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 어린 권면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낯선 세상에서 올곧게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명심해야 합니다.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 숱한 좌절에 부딪히고 맞서는 모든 사람이 거듭 기억해야 할 생명 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에 담긴 진리를 뻔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항상 새롭게 대하며 공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마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를 깊이 묵상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완성하는 승리

시험과 유혹에 맞서 싸운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주님은 나무에 달려 “내가 목 마르다”라고 신음하며 내뱉으셨습니다. 극한의 굶주림입니다. 몸과 영혼 의 처절한 허기에 시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천사들에게 안기실 수도 있었습니다. 온갖 위험과 위협을 극적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반역범의 사형틀인 십자가를 거부하고 황제의 권력을 경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또다른 제국을 세우고 그 힘을 숭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온갖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 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 바라고 의지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진정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분의 삶과 인격을 닮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만이 저마다의 광야에서 지쳐 쓰려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진정 살아날 길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만이 이 세상의 거짓과 폭력을 이겨낼 참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를 지날 때 두려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홍해를 통과하고 광야에 서 있는 이스라엘처럼,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예수님처럼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여정이 다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까닭은 미워하고 버리셔서가 아닙니다. 좌절을 안기고 무너뜨리려는 게 아닙니다. 그 모두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이며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위대하고 놀라운 과정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중국 역사 가운데 주전 475년에서 221년까지 일곱 개의 제후국이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던 시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온 나라에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혼란의 시대 한복판에 활동한 사상가 맹자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깨달음을 남깁니다.


"순(舜)임금께서는 밭두둑 가운데에서 농사짓다가 떨쳐 일어나셨고, 부열(傅說)은 성벽 쌓는 일을 하다가 등용되었고, 교격(膠鬲)은 어물과 소금을 팔다가 등용되었고, 관이오 (管夷吾)는 옥에 갇혀 있다가 등용되었고, 손숙오(孫叔敖)는 바닷가에서 살다가 등용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시장에서 등용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어떤 일을 행함에 그가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하니,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과실이 있은 뒤에 고치니, 마음이 고달프고 생각에 순조롭지 못한 것이 있은 뒤에야 분발하며, 사람들의 낯빛에 드러나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야 깨닫는다. 나라에 들어가서는 법도 있는 대신의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라 밖에 나와서는 적국과 외환이 없는 나라는 항상 망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문장을 끝맺습니다. 然後 知生於憂患 而死於安樂也


뜻은 이러합니다. “그런 뒤에야 사람은 우환 가운데에서는 살아나고 안락함 가운데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맹자> 告子章句 下, 제 15장 국역출처: 전통문화연구회


광야 여정을 지나는 이들에게 주는 너무나 고귀한 통찰입니다. 나그넷길을 걷는 이들에게 괴로움과 궁핍과 좌절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렇지만 근심과 환난은 결코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 시련을 통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됩니다. 부르심을 따라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은 우리를 억누릅니다. 여러 모양의 굶주림으로, 서늘한 불신으로, 어지러운 혼란으로 몰아붙입 니다. 광야에 지쳐 주저앉게 합니다. 그럴수록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광야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끄셨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다. 거룩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때로 사탄의 속삭임이 들려오지만 하나님께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는 한 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모든 시련을 담대하게 이기고 나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저희는 모두 광야에 서 있습니다. 화려한 승리의 기억도 잠시뿐입니다. 곧 광야의 모레 바람 속에 힘겨워 합니다. 여러 모양의 유혹으로 방황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험이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결국 저희를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는 은혜의 여정임을 믿습니다. 사순절, 주님의 고난을 더욱 마음에 새기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길에 진정 승리와 소망이 살아 있음을 온전히 깨달아 누리고 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6년 2월 17일 화요일

창세기 32장 22~32절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산상변모 주일, 2026년 2월 15일
창세기 32장 22~32절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우리는 성경에서 질문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하여 숨었을 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의 아들 가인에게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처럼 인간에게 물음표를 건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 의아합니다. ‘질문’이란 1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아는 이에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연약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질문의 또 다른 기능을 알게 됩니다. 바로 ‘확인’입니다. 사람들은 질문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하시는 까닭은 답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확인시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인생의 벼랑 끝에 홀로 서 있습니다. 지난 날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모든 청춘을 다 바쳐 마침내 많은 가족과 가축 떼를 이루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수성가입니다. 야곱에게 그 모두는 단순한 피붙이와 재산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전투 끝에 거둔 소중한 전리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잃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지금 형 에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에서에게 야곱은 자신의 복을 가로채어 굴욕적인 패배감을 안겨준 동생입니다. 그는 강렬한 증오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복수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빨리 세상을 떠나길 고대할 정도입니다.

야곱은 이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형에게로 향하는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깊은 염려와 불안 가운데 애타게 마음을 졸였습니다. 금세 닥쳐올 재난을 철저히 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자기를 찾아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곱은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몸부림치며 절규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나타나 그와 씨름하였습니다. 주님은 천사를 통해 야곱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당신을 붙잡으며 간구하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부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야곱에게 주님은 불쑥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당혹스럽지 않으십니까? 한 인간이 처한 극한 절망의 순간 속에서 왜 난데없이 야곱의 이름을 물어보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정말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이름, ‘야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그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형과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모는 ‘발꿈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케브>에서 유래하여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아코브>, 우리말 음역으로는 ‘야곱’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말은 관용적으로 ‘남을 걸어 넘어뜨리는 자’, 혹은 ‘속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와 같은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을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치는 사람’이라고 풀어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자기 이름처럼 성공을 향한 치열한 욕망과 좌절로 어지럽게 뒤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형은 물론이고 시각 장애가 있는 연로한 아버지도 주저 없이 속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외삼촌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라반의 교활한 속임수에 빠져 번번이 인생의 쓴맛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위태로운 패배자 신세입니다. 

결국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급히 탈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반의 추격에 붙잡혔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입니다. 형을 속였던, 과거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자기 이름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승리자가 되길 꿈꾸었으나 끝없이 좌절과 마주했던, 그의 내밀한 인격과 존재를 가장 정확히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야곱’은 과연 무엇입니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초라함. 지나온 시간 가운데 새겨진 가장 경멸 어린 패배의 자취, 여전히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좌절의 상처들,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안의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름을 물으신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요? 정확하게는 그 질문을 통해 야곱이 무엇을 확인하고 깨우치길 바라셨을까요?

주님은 “야곱”으로서 나, 사람들 앞에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삶의 온갖 실패와 좌절로 지쳐 쓰러져 울고 있는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따뜻하게 바라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야곱을,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감추지 말고 솔직히 드러내길 바라십니다.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스캇 펙 박사의 “거짓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정신적 성장에는 자신이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의 증거를 없애 버리려 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악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는 ‘이미지’, ‘외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말들이 퍽 중요하다. 그들은 선해지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겉으로 선해 보이려는 욕망은 불처럼 강하다. 그들의 ‘선함’이란 모두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 선함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이 ‘거짓의 사람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 거짓은 남을 속이려는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것일 때가 훨씬 많다. 그들은 자기 비난의 고통이라면 절대 참지 못하며 참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예의와 매너는 자신들을 의로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울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야곱 때문에 괴로워하고 움츠러드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나를 꾸미는 것 자체가 악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내 허물과 직면하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영혼의 방향이 정반대로 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 안의 야곱에게 얽매여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저마다의 야곱을 증오하거나 부정하는 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길 진정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선한 진리의 빛을 향해 나아가,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그 위대한 사랑의 시선 앞에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당신과 정직히 마주하여 ‘저의 이름은 야곱’이라고 토로하길 원하십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28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자기 이름을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바꾸시는 모습이 창세기에서 익숙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름 짓기’의 참된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 반듯이 참조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입니다.

간략히 정리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이름 짓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심으로 천지창조의 서막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닙니다. 그 안에, 야곱을 향한 당신의 창조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쓰라린 좌절과 실패를 품고 나아온 야곱을 결코 지난날의 모습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온 생명과 의지를 다 해 이스라엘로 기어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얍복 나루에 지쳐 쓰러져있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야곱으로 겪었던 모든 비참한 패배를 두 눈에 담으시며 이스라엘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시선을 보내시며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의 의미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이름은 28절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져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호칭의 배경이 되는 24절과 25절의 ‘씨름하다’입니다. 이 동사의 히브리어 어근 <아바크>는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단 두 번 등장합니다. 오직 야곱에게만 해당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곱을 가리키는 원어와 자음이 매우 흡사합니다. 그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히브리어 언어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이 씨름했다.”라는 문장을 “야곱이 야곱 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이러한 어휘 사용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간의 우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었습니다. 어떤 속임수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번번이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수도 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얍복 강가에서 치명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야곱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싸움입니다. 이기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그를 위해 져 주셨습니다. 은혜로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승리에는 막중한 대가가 뒤따랐습니다. 주님은 그의 견고한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평생 신체장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매우 모순되는 장면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기세등등한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겉모습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승자의 화려한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시합 중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쓰러진 격투기 선수처럼 영락없는 패배자의 몰골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얍복 나루’ 경험이 있습니다. 학업과 취업과 승진 등, 그토록 간절히 손에 넣길 원하며 애써 발버둥 쳤지만 끝내 닥쳐온 패배의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영혼의 엉덩이뼈가 부러진 채 크나큰 고통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비참한 절뚝거림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미처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져 주시는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뜻밖의 다소 엉뚱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32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에는 창세기를 하나의 책으로 최종 정리한 사람이 등장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단지 한 개인의 호칭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이 땅 위에 역사상 실존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당신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이름은 시조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아닙니다. 손자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얍복 나루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을 때 그분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훗날 이 땅에 세울 언약공동체를 향한 그분의 기대와 소망이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즉,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펼쳐 보이실 다스림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관련해서 32절에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라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과연 언제일까요? 학자들 대부분은 창세기가 완성된 때를 바벨론 포로기로 추정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던 때, 다음으로 가장 절뚝거리던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포로민 가정의 남루한 식탁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자녀가 질문합니다. “아빠, 우리는 왜 옆 마을 친구네 집처럼 아무거나 마음데로 먹을 수 없어요?” 그러자 가난한 아버지는 비장하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옛날 옛날에 우리 조상 중에 야곱이라는 분이 계셨단다. 그 분이 얍복 강가에서 혼자 남아 있었던 일이야” 이런 대화가 흔하게 이어졌을 겁니다.

이렇듯 32절에 기록된 음식 규정은, 모세율법의 다른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의미심장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본질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얍복 나루 사건을 날마다 명심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이룩한 화려한 업적만이 아니라 비참한 좌절과 실패를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일상의 성례전이 펼쳐지는 식사 시간, 야곱의 부러진 엉덩이뼈를 떠올렸습니다. 지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주님의 위대한 창조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패배할 때에, 진정 승리한다는 찬란한 진리를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현재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말씀에서 참된 희망을 새롭게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 번째 이스라엘은 시간이 흘러 그 고귀한 정체성을 놓쳐버렸습니다. 힘겨웠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성전을 복구하자 이제 걸음걸이를 완전히 회복했다는 오만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엄중한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로서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참된 이스라엘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나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이름을 받아들인다면, 마땅히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깨닫고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내면의 위로만 누리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교회 생활만을 열심히 하여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참 이스라엘’로서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온전하고 향기로운 삶으로 그분의 나라를 넓혀가길 기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승리에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야곱과 정반대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져 주는 삶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력하게 의지를 꺾는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나태와 태만을 정당화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공을 향한 숭배를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정당하게 경쟁해서 필요한 걸 얻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자녀들이 가능한 한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도록 격려하는 것, 이왕이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노력하고, 승진 혹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서 거기에 합당한 성과를 누리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세속적인 성공과 승리만을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하며, 패배와 좌절을 추하게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기꺼이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살아야 합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알기 때문에 참고 품으며, 한 걸음 더 물러서 져주어야 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지나치게 높이 오르고 과도하게 움켜쥐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나 이 사회의 거친 경쟁에서 밀려난 연약한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얍복 나루 너머 골고다 언덕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실패해야 참으로 승리하며, 온전히 죽어야 진정 살아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패배자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언제나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만이 우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창조하며 진정한 회복을 안겨줄 줄 믿습니다.

앞서 소개한 스캇 펙 박사는 자신의 대표작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다음과 같은 위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 자신과 의식적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성장과 진보를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느낌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존재는(우리가 일단 그 존재를 용납하기만 하면) 인간의 영적 성장이 인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존재에게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이 어떤 존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은총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실재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돕는다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입증해 주는 증거다.”

“이 우주라고 하는 도약대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뛰어넘어야 한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따뜻이 맞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오늘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찬란하게 변화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끝에 주님께서 얼마나 눈부신 영광을 예비하셨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다. 마침 설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병오년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새롭게 다가오는 한해를 맞이하며 중요하게 지녀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나의 진정한 정체성 확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따뜻하게 맞아들여진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자신과 가정과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나서며, 우리 역시 더욱 인내와 용서를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품어야 합니다. 탐욕과 분노를 내려놓고 섬기고 나누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때때로 지치고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저마다의 얍복 나루 위에 지쳐 쓰러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음성 앞에 주저 없이 ‘제 이름은 야곱’이라고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숱한 좌절과 절망으로 멍들고 무너진, 있는 그대로 나를 주님 앞에 정직히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실패입니다. 패배입니다. 또한 좌절입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굴욕을 겪었고 절망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이름에 담긴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기꺼이 져 주시는 놀라운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저희 모두도 그 사랑 가운데 어리석은 탐욕에서 벗어나 물러서고 양보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참된 이스라엘이 되게 하옵소서. 나누고 섬겨야 진정 승리하는, 복음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란한 패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 상념

온통 겨울이었다. 지난 한 해 내게 다른 계절은 없었다. 화사한 봄꽃도 화려한 단풍도 모두 싸늘하게 얼어붙어 빛깔을 잃었다. 음울한 무채색으로 이어진 긴 시간을 보냈다. 거친 계절의 한가운데, 아늑한 녹색을 보았다. 담임 청빙 설교 하던 날이었다. 예배당 창밖으로 청초하게 무리 지어 자란 볏잎이 보였다. 해사한 풍경이 나를 감싸안고 위로해 주었다. 담임목사가 되어 정배리로 돌아왔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오롯이 겨울을 보냈다. 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고, 눈을 쓸고, 바짝 얼어붙은 강물을 보았다. 하지만 내 인생 가장 따뜻한 겨울이었다. 들판은 눈을 뒤집어쓴 채로 계속 나를 품어주었다. 교인들이 베푸신 결코 당연하지 않은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지금껏 걸어온 길의 의미를 발견하며 벅차도록 뭉클한 온기를 느꼈다. 어제, 교회 앞 하천에서 흰 새 한 마리가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편에, 눈을 털어내고 일어난 싱그런 풀들이 보였다. 봄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확인했다. 설이다. 지난 한 해, 겨울 아닌 겨울을 지나며 겨울을 맞이했다. 참으로 겨울다운 겨울 보내며 마침내 깨달았다. 겨울을 이겨냈다. 기어이 봄이 왔다.

2026년 2월 12일 목요일

출애굽기 12장 1~28절 “첫날을 기념하라”

2026년 2월 1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출애굽기 12장 1~28절 “첫날을 기념하라” 찬송가 250, 251장

출애굽기는 1장부터 시작해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노예의 아들로서 죽을 위기에 처했던 모세가 이집트 공주에게 극적으로 구해졌습니다. 이집트 왕실 교육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친어머니 요게벳 품에서 자라 자기 민족 정체성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야로 쫓겨나 비천한 목자로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가긴 했지만 오히려 거부를 당했고 마침내 아홉가지 재앙이 연달아 몰아치며 거대한 제국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출애굽기를 소재로한 영화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열 번째 재앙과 홍해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이적 등 화려하고 신비로운 구원 사건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극적인 순간에 불쑥 출애굽기는 이야기의 흐름을 멈춥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장르인 ‘율법’을 제시합니다. 현란한 장면에 주의를 뺏기기 전에 꼭 해야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 분명히 명심해야할 핵심을 전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본문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하나님은 먼저 ‘유월절’을 제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열 번째 재앙, 즉 장자의 죽음을 피하고 이집트를 떠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집의 문 양쪽 기둥과 위쪽 가로대에 발라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재앙이 그 피를 보고 지나갈 겁니다. 그렇게 ‘넘어 감’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날이 유대인 달력의 새해 첫 날입니다. 마침 다음 주에 설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1월 1일을 한 해의 첫 날로 여깁니다. 혹은 음력 기준으로 첫 날을 설날로 기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그 날을 일년의 시작으로 여깁니다. 양력으로는 3~4월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이날로 시작하는 첫 달을 ‘아빕월’로 부릅니다. 이러한 달력을 통해 출애굽 사건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대림절로 교회력을 시작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어디에 두는가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현실의 달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충실한 게 당연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의 시간을 신실하게 이끄심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규정을 그 한 날의 규칙으로만 그치지 않고 매년 기념해야할 율법으로 세우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6~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6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모세는 훗날 있을 상황을 가정합니다. 시간이 흘러 유월절을 지킬 때 아들, 딸이 유월절을 지키는 이유를 묻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 때 자연스럽게 첫 번째 유월절날 있었던 구원 사건을 자녀들에게 들려주라고 합니다. 이 역시 유월절을 새해 첫날로 지키는 이유와 같습니다. 영원히 반복하며 이어가야 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명심하는게 자녀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담긴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복음만이 개인과 가족과 나라를 참으로 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구원을 새롭게 마음에 품고 삶의 여러 재난을 딛고 일어나 나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구원의 주 하나님.
유월절이 이스라엘 달력의 시작이듯이, 주님께서 저희를 죄악에서 구하신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인생 여정을 이어가는 근본을 이루길 구합니다. 날마다 삶의 온갖 재난에서 구하시는 주님의 손길 아래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복음 이야기를 감격으로 듣고 전하는 가정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