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1장 1~6절 “돌보시는 하나님”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추운 날씨에도 잠을 깨우고 일어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흉년’이라는 말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농업에 의지한 사회에서 추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과 비극 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여러 곳에서 흉년으로 말미암은 시련을 생생하게 들려 줍니다.
그 중 하나가 룻기의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장이 본문외에는 창세기에만 단 두 번 등장합니다. 바로 창세기 12장 10절과 26장 1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이 구절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은 흉년을 묘사합니다. 둘에게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흉년 자체는 비극 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당신의 커다랗고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기근으로 이집트와 블레셋에 피신했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을 체험하고 복을 누렸습니다.
룻기 저자가 창세기에만 나오는 이 두 문장을 굳이 가져와 나오미가 겪은 흉년을 묘사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시련 가운데 함께 하시어 백성을 위한 당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결국 나오미는 기근을 피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엘리멜렉 가족의 이사를 성경이 비난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 고통을 겪을 때 위로와 공감을 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죄에 둔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을 때 명백히 심판하시는 공의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한 현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 이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적어도 룻기의 의도는 아닙니다.
룻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날카로운 율법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문장을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드넓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룻기는 정죄의 돌을 퍼붓는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포근한 안전지대 입니다. 비난의 칼날이 오가는 사막 속 시원한 오아시스입니다.
모압의 경우 분명 이방 민족이 살고 있는 이방 땅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모압은 복잡한 관계를 유지 했습니다. 다윗이 모압을 공경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서는 자기 가족을 모압왕에게 피신시키기도 했습니다. 즉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게다가 북부 모압은 7~800미터의 고원지대에서 비가 넉넉히 내리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굶주림을 겪는 가족이 살기 위해 그곳으로 이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1절에서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에 나오는 “거류”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구르>입니다. 성경에서 나그네 살이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여정을 바로 이 <구르>로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삭, 야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창세기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곳 저곳을 다니며 ‘거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룻기는 일부러 창세기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였습니다. 엘레멜렉과 나오미가 믿음이 없고 욕망에 속아 모압을 향한게 아닙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굴곡을 겪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모압에 가서 살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시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든든한 두 아들 또한 결혼 후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남은 건 과부 신세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가늠하기 조차 힘든 절망입니다. 고통이 끊임없이 휘몰아 쳤습니다.
얼마전 교인 장례를 위해 벽제 화장장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앞 순서에 평소와 다른 빛깔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스산한 공기가 순식간에 뒤덮였습니다. 곧바로 어린 아이의 관이 들어왔습니다. 어른들의 겨우 절반 크기였습니다. 저는 차마 계속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습니다. 혹시나 영정을 볼까봐 눈을 감았습니다. 이제 겨우 7살된 제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만해도 끔찍한 고통입니다.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어쩌면 이 자리에도 그런 아픔을 겪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한 인간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슬픔을 견뎌내시느라 무척 힘드셨을 것입니다.
하물며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고대 서아시아의 유목 문화는 여자들만으로는 생존 자체가 위협이 되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나오미에게 가족과 이별한 슬픔은 사치였을 지도 모릅니다.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지가 시급한 문제입니다. 가슴이 한 없이 짓눌렸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모압에 머물며 살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월들 돌아보며 부질없는 후회와 자책을 반복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은 시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은 고통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폭풍과 같은 비극을 겪은 인간은 생각 속에서 다시 그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듭니다. 당장 내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도 벅찬데 굳이 그 이유를 찾아 덧없이 헤매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여인이 경험하는 가장 깊고 깊은 절망 속에서 나오미가 어떻게 반응했는 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은 국어 어법을 살려서 원인을 먼저 설명하고 그 결과 나오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행동을 먼저 보여주고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총신대 구약학 김지찬 교수님의 번역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그녀가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였다.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나오미는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속에 주저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냥 슬퍼하고 눈물만 흘리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돌아오려 하였습니다. ‘일어나다.’, ‘돌아오다.’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동사입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나 역사를 볼 때마다 위기를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 빛을 향해 돌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알고는 있습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질척이는 현실의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향해 돌이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지칠 때가 많습니다. 도무지 힘이 나지 않고 의지가 꺾입니다. 어느샌가 고통에 익숙해져 비극의 구덩이 한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누워있는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과연 무엇이 그녀를 일어나게 하고 돌아오게 했을까요? 바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돌보다”로 옮긴 히브리어는 <파카드>입니다. 구약에서 300번 넘게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절반이 상급자가 하급자를 향한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합니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세심하게 돌보다” 혹은 “주목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어인 경우 인간을 “방문하다”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즉, 백성의 치열한 삶 한 복판으로 주님이 찾아오신 행동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생생한 임재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현재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은혜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한 때 기근으로 황폐했던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에게 들려온 소식입니다. 절망에 빠진 그녀를 일으키고 돌이킨 복음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나오미는 자기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소중하게 품고 있습니다. 비록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처량한 과부신세가 되었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오랜 세월을 나그네로 지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하나님이 돌보시고 먹이시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우리 삶 깊숙이 찾아오시어 돌보시고 먹이신다는 복음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폭풍같은 시련이 찾아옵니다. 숱한 좌절과 실패로 마음이 무너지고는 합니다. 억울한 비난과 오해로 지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품어야 합니다. 불안과 욕망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품어 안으시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 길을 오늘도 기쁨으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때때로 휘몰아치는 폭풍같은 시련들을 만납니다. 상처입은 몸과 마음으로 지쳐 쓰러지곤 합니다. 그런 저희를 일으키고 돌이키도록 말씀을 들려주시고 복음을 붙잡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녀들을 찾아오시고 새 길을 열어보이신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로 자신을 살피며 고난 받은 이웃을 따뜻하고 보듬고 돌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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