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9일 토요일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제국에서 천국으로”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2019년 3월 8일, 목사 정대진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제국에서 천국으로”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신 아버지께서는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저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셨습니다. 바로 당시 24살의 홍정욱 씨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지은 ‘7막7장’입니다.  

물론 그가 ‘최우수 졸업’인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가 아닌, 바로 그 아래 단계인 ‘마그나 쿰 라우데’(magna cum laude)로 졸업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한국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하버드 대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소식은 온 국민을 열광시켰습니다. 특히나 부모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제 아버지도 그 중 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많이 먹먹해집니다. 배움이 짧으셨던 제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힘겹게 일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그런 두 분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저에게 거는 기대는 몹시 컸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는 비록 지금 당장은 자식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지는 못하지만 아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하버드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꿈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이루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후로도 저는 서울대를 비롯한 세계 여러 명문대 졸업생들의 수기들을 종종 찾아 읽곤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시련을 딛고 일어나 저마다의 분야에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명망가들의 자서전을 20대 초반까지 무척 즐겨 읽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비루했지만 누가 봐도 우러러 보이는 높은 위치에 올라 비행기를 타고 푸른 하늘을 가르며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는 화려한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쾌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학생 때와 신대원 졸업 이후 외국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경험 탓에 저는 주위에 힘겹게 유학생활 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이 듭니다. 또한 원대한 꿈을 품고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멋있게 보이고 응원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승의지’는 분명 건강한 활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90년대 중반 ‘홍정욱’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과 그로 말미암아 벌어진 사회적 현상 자체를 함부로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모두는 분명 나름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승자독식의 냉철한 경쟁 사회에서 모두가 피라미드 위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면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은 패배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힘의 질서는 반드시 어두운 그림자를 가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성공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세상 한 복판에서 차분히 무엇이 진리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은 교회 안에서 조차 참된 성공에 대한 왜곡과 오해가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그럴듯한 종교언어로 포장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참석한 청소년 신앙 집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설교 내내, 미국 아이비리그에 재학 중인 아들 자랑을 하며 큰 야망을 품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 앞에 ‘주님 안에서’라는 형식적인 단서를 붙이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의기양양한 모습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기독교 서점과 방송에서 소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교인들의 간증을 쉽게 접합니다. 저는 그분들의 진정성과 신앙을 감히 함부로 비난할 생각도, 그럴 자격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용하는 강자의 언어 앞에 때때로 참담함을 느낍니다. 상승을 추구하는 사회는 자연스럽게 제국을 건설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철저한 희생과 섬김으로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의 방향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해 대기업에 다니거나 전문직을 가지거나 큰 사업체를 경영해야만 하나님께 더 높이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속의 논리에 부합해 학벌과 지위와 재산을 이용해 주님을 흔들려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경쟁에 밀려난 사람들을 함부로 부정적으로 규정짓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고단한 일상을 마치 나태와 불신의 결과로 여기는 오만한 생각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뜻은 번번이 입시와 취직에 실패하고 청년들,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에 충실 하느라 경력이 단절되어 허무함을 느끼는 어머니들, 연거푸 진급에 누락되거나 혹은 기울어져가는 회사를 붙잡고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해 하는 아버지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의 손길은 그 모든 좌절과 결핍을 초월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대받던 변방 성읍 갈릴리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외치신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생명의 진리를 교묘한 욕망의 논리로 뒤바꾸는 현실 앞에 종종 분노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어느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켜 ‘눈물을 흘리며’ 격정적인 어조로 강하게 질책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문법형태는 ‘탄식하고 흐느낀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의도적인 어휘 선택은 현재 그가 가진 어두운 감정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까지 거리낌 없이 부르며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을 기독교 신앙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앙의 절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믿음 없는 비종교인이거나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관리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에 속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사도 바울이 극단적인 표현까지 주저하지 않으며 복음의 적으로 몰아세우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이 아닌,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며 세례를 받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입니다. 이 당혹스러운 역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바울이 목소리를 높여 꾸짖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공동번역)

이 구절을 통해 “십자가의 원수들”의 특징을 알게 됩니다. 먼저 그들은 ‘자기들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이 어떤 뜻일까요? 우선 1차적으로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나 문란한 성생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본다면 이들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 지 아닌지를 과도하게 따지는 사람들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즉, 음식 규정을 비롯한 율법에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매달리는 무리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함께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십자가 보다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도리어 자랑’한다는 두 번째 특징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뽐냈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복음의 신비 앞에 겸손히 무릎 꿇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신앙을 과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단지 신앙생활의 방법만 틀린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오해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할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입니다. 화면을 보시고 다함께 읽겠습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을 바라보는 당시 유대교의 판단을 명확하게 정리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거북하고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처형당한 목수의 아들을 도무지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메시아란 태평성대를 다시 가져올 강력한 전제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복음의 원수들이 가진 숨겨진 욕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비록 교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또 다른 강대국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거룩한 성경 말씀을 들먹이며 로마에 맞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제국의 힘과 부유함을 탐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천상의 세계를 노래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이 땅위에 보다 높은 곳에서 더욱 강한 힘을 휘두르길 바랐을 뿐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가리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며 그분이 가르치고 몸소 살아내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깊이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님을 모세나 다윗과 같은 비범하고 화려한 영웅으로 여겼을 따름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주님의 고난을 부정하여 마침내 복음의 “원수”가 되는 비극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겸손히 그리고 아픈 마음으로 스스로를 향해 되물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기 원한다면서도 정작 복음의 원수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그 철저한 낮아짐과 연약함을 통한 구원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이를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쉽게 눈에 띄고 화려한 무언가를 통해 증명하려하지는 않으십니까? 성공을 향한 광기어린 무한경쟁과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하지는 않으십니까?


이러한 왜곡된 신앙을 바로잡는 진리를 바울은 20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그 시대 정치용어를 사용하여 신앙을 변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시민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폴리튜마>입니다. 직역하면 ‘국가’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표현은 당시 로마제국의 정복 정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각 식민지마다 본국의 시민들과 퇴역 군인들이 편안하게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대사관과 같은 ‘치외법권’ 지역으로서 그곳이 위치하는 나라와는 관계없이 제국 시민권자들의 이익을 철저히 우선하는 공간입니다. 

특별히 빌립보가 로마의 대표적인 식민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빌립보서에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현실 상황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시민권’, 즉 ‘궁극적인 소속’이 바로 하늘에 있고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은 단순히 자연 환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은 비록 빌립보 교인들이 발을 딛고 생활하는 무대는 분명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땅이지만 결코 이 세상의 법칙과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닌 ‘하늘’을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소테르>역시 <폴리튜마>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단어입니다. 바로 신격화된 황제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로마 황제는 제국에 속한 시민들의 건강과 재산을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소테르, 즉 ‘구원자’로 온 제국 영토에 선전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소테르>라고 부르며 세상을 참으로 구원 하는 길은 드높이 치솟은 로마제국의 화려하고 거대한 힘과 군대가 아니라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를 그럴듯하고 세련된 거짓으로 왜곡하는 이들에 의해 흔들리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속한 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와 같은 진리를 이토록 격정적으로 부르짖은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자신이 제국의 유혹을 거부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울은 상당히 독특한 성장 배경을 가진 인물입니다. 빌립보서 3장 5~6절의 고백대로 그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 출신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으로 흠 잡힐 만한 게 없는 정통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출생과 함께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자 헬라 철학과 수사학에도 능통한 사람입니다. 즉, 자기가 혈통적으로 속한 전통과 그 시대 초강대국의 문화 모두에 능숙한 촉망받는 지도자 후보였습니다.

굳이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뿌리 깊은 양반 가문 출신으로서 성균관에서 정통 유학 수업을 받은 유생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그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영어를 유창하게 잘할 뿐 아니라 서양 고전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어느 곳에서나 환영 받는 유능한 인재로서 그 앞에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환하게 열려 있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바라는 기대에 부응하여 성공을 이루기 위해 철저히 상승 질서를 따라 맹렬히 달려 나갔습니다. 그가 열정적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가 야망에 사로잡혀 치열하게 내달리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돌연히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을 자신의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후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화려한 성공과는 거리가 먼, 누가 보기에도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복음전도자로서 끊임없이 짓밟히고 억눌리는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결단이 그에게 유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도 얼마든지 지금껏 누린 기득권을 움켜쥐며 살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로마 제국 사이를 약삭빠르게 오가며 계속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히 비겁하게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몰래 교회를 도우며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악하거나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그 나름대로 충분히 이해할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 곳곳에는 귀족 계급에 속한 교인들이 언급지만 바울은 어디에도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참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그를 압도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는 결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엄중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진정 죽어야 다시 사는, 완전한 패배와 실패 가운데 찾아오는 부활의 위대한 복음을 온전히 신뢰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제국이 손짓하는 화려한 성공의 길을 뒤로하고 십자가가 보여주는 희생과 섬김의 길을 걸었습니다.


1919년 2월 8일, 그날 일본 동경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폭설이 내렸습니다. 그 거센 하얀 눈발을 헤치고 어느 건물 2층 강당으로 결연한 표정의 조선유학생들 600여명이 몰려왔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정기총회로 소집되었지만 총회는 곧바로 ‘조선청년 독립단’의 ‘독립선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유학생 대표 백관수가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주창했습니다. 곧이어 강당 안은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했습니다. 바로 3.1운동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2.8독립선언입니다.

마침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뜻깊은 시간을 맞아 우리 교단은 총회 차원에서 삼일절 백주년 기념 예배를 각 교회에서 드리도록 권했고 우리 교회 역시 동참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합니다. 3.1운동은 단순한 독립 요구 시위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던, 행동으로 보인 신앙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2.8독립선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언서에 서명한 11명의 대표 중 여섯 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또한 장소로 사용된 ‘재일본 도쿄 조선YMCA’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조선 유학생들을 섬긴 쉼터이자 재일동포들이 세운 첫 번째 교회인 ‘동경교회’의 예배처였습니다. 따라서 동경교회 청년 청년들이 이 위대한 사건에 주도적으로 앞장 섰습니다.

마침 저는 대학시절 일본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도쿄조선YMCA의 후신인 ‘재일본한국YMCA’안에 있는 일본어 학원을 다닌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건물 안 2층에 마련된 2.8독립선언 기념관을 둘러보며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유학생들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로서 일제에 요령껏 협력하여 막대한 권세와 재물을 누리고자하는 욕망에 끊임없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훗날 친일파로 변절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동경은 아시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도심 한복판에는 거대한 신궁이 건설되고 있었고 골목마다 신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은 당시로서는 소수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식민지 출신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어떻게 그 모든 험난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비록 제국의 풍요와 종교에 둘러 싸여 그 한 복판에 살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슴 깊이 품었기 때문입니다. 천황을 자처하며 막강한 무력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일왕이 아니라 갈릴리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유일한 왕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전통에 따라 부활절까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참회와 절제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본문을 통해 엄중한 질문 앞에 마주서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국을 욕망하고 있습니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에서 도망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충분히 긍정합니다.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보다 여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 대학 입학과 취직 등을 통해 더 높이 오르고자 정직히 노력하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다만, 삶의 태도와 방향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탐욕에 굴복하고 익숙해져 심지어 신앙마저도 이용하는 죄악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비록 휘청거리고 때때로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슴에 끌어안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약자들을 짓밟고 올라 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와 온유함으로 천국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복음을 바탕으로 결론적으로 본문 4장 1절의 말씀으로 교회를 향해 권면하였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이 구절을 조심스럽지만 다음과 같이 저 나름대로 보충하고 바꾸며 설교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성별과 외모와 학벌과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드넓은 품안에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가난하고 병들고 비굴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자신을 세상의 욕망에 따라 애써 포장하지 말고 그 어떤 좌절과 실패에도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위대한 패배자인)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기도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때때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화려한 성공을 향한 그릇된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새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갔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회개합니다. 참된 시민권이 오직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며 이 시대의 탐욕의 질서를 결연히 거부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평화를 따르고 전하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자료
https://news.joins.com/article/23269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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