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0일 토요일

느헤미야 13장 15~31절 "극단에 이른 이유"

2019년 3월 18일, 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느헤미야 13장 15~31절 "극단에 이른 이유"

15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
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20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21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24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26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27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3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10년 전을 떠올려 신앙생활 하셨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지금과 같으십니까? 믿음이 좋아졌느냐? 나빠졌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신앙 색깔의 변화를 여쭤보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믿음의 태도와 방식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기 마련입니다. 저의 경우 어릴 때부터 기도는 무조건 크게 부르짖어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통성기도가 어색해 졌습니다. 그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제가 어느 샌가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하루에도 수도 없이 변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에 비친 하나님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그런 복잡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고 교단에 속하고 더 멀리 나아가 전세계적인 교파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신앙인들 사이에 하나님 누구인가를 두고 계속해서 논쟁이 일어났고 심지어 다툼도 적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신앙의 다양성이 성경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결코 획일적인 신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상황과 시각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의 기록과 편집과 완성 자체가 주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우리가 함께 읽은 느헤미야는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구약의 그 어떤 책보다 강한 보수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느헤미야의 결론에 해당되는 오늘 본문은 그러한 보수적인 신앙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바로 앞 절인 14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여기에 언급되는 ‘이 일’은 13장 4절 이하에 기록된 느헤미야의 성전 정결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개혁이 끝나고 나오는 14절의 간구는 그 사건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전체의 결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상당수 학자들은 오늘 본문인 15절 이하의 내용은 느헤미야의 회고록에서 인용하여 추가적으로 덧붙인 내용으로 판단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내용 흐름상에는 없어도 상관없지만 느헤미야의 주제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끝맺음으로 등장해야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개혁 작업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5~22절은 안식일 계명을 어긴 사람들에게 행한 징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5, 16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장사 한 사람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특히 16절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두로 사람들’입니다. 

이 때, 두로는 세계사 책에 등장하는 ‘페니키아’의 수도로서 해상 무역으로 커다란 부를 이룬 곳입니다. 그런 두로 상인들이 예루살렘이 가져온 각종 먹음직한 해산물과 화려한 상품들은 이스라엘 부유층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그 장사꾼들이 언제 떠날지 몰랐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얼른 물건을 사라는 재촉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음을 느헤미야는 지적했습니다.

그 결과 19~22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문으로 장사꾼이 드나드는 것을 완전히 봉쇄하였습니다. 그러자 상인중에는 아예 성 밖에서 잠드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감시가 소홀해 진 틈을 타 성벽 빈 공간을 이용해 몰래 장사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시도들까지도 단호하게 차단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느헤미야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묵상하며 일주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드리는 안식일 규정은 분명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헤미야의 모습이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요즘에도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 중 일부는 주일에 돈을 못 쓰게 한다거나 심지어 비행기 승무원처럼, 주일에 교대 근무하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안 좋게 보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의 의도는 분명 귀하지만 한편으로 답답한 게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느헤미야 역시 ‘장사’로 유지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백성들의 삶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3절 이하의 장면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어느 날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유다 사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혈통을 중요시 하는 구약성경 안의 보수적 시각에서 분명 그러한 혼인은 큰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에 반응하는 느헤미야의 행동은 충격적일 정도로 극단을 보여줍니다. 

25절을 보시면 그들을 책망할 뿐만 아니라 저주하며 때렸고 심지어 머리털까지 뽑아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과연 이 정도까지 분노할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마침 2주에 걸쳐 주일 예배 시간에 룻기를 본문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룻기는 잘 아시다시피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모압 여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구약 성경의 포용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혈통과 신분을 초월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해줍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룻기가 느헤미야의 극보수 개혁에 대한 반발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룻과 똑같은 모압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해서 체벌은 물론이고 극심한 모욕까지 주는 느헤미야는 얼핏 편협하고 옹색한 지도자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말과 행동 이전에 그가 놓인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새벽 시간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그는 본래 유다 포로민 출신으로서 페르시아 황제를 보좌하는 관리로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동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 재건이라는 굉장한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유다 민족 공동체는 주변 민족들의 위협 앞에 여전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지금껏 공들여 이룬 예루살렘 귀환의 결실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지 모를 여러 문제들에 수시로 직면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어 다시금 다른 제국의 침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느헤미야는 안식일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격노한 이유를 본문 2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4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이 때 느헤미야가 분노한 것은 단지 피가 섞여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아들, 딸들이 외국인 어머니들의 언어는 서툴게나마 하지만 히브리말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회당에서 제사장이 읽어 주는 율법을 자녀들이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의 단절은 곧 신앙의 단절을 의미했고 여기에 그는 굉장한 위기감을 느꼈고, 그 결과 과격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처럼 느헤미야가 보인 겉모습에는 그리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므로 경제 활동 자체를 지나치게 옭아매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은 모든 민족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그의 진정성입니다. 더 나아가 진리 앞에서의 민감함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세련된 문화에 젖은 도시민인 우리는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는데 어느새 둔감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 보다는 요령껏 그 빈틈을 찾아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데 익숙합니다.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출세의 길에만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영어 교육은 열심히 시키면서 정작 성경을 읽히고 말씀 앞에 스스로를 깨우치게 하는 일에는 게을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느헤미야의 열정은 그런 우리의 아둔함을 깨우칩니다. 나태한 영혼을 다시 일으키게 합니다. 부디 오늘 하루 느헤미야를 본받아 그동안 방치 했던 신앙의 그릇된 습관에서 벗어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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