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6일 금요일

고린도전서 15장 8~11절 “하나님의 은혜로 된, 나”

2018년 4월 6일 삼덕기억학교 설교
고린도전서 15장 8~11절 “하나님의 은혜로 된, 나”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어느새 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다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움터오는 부활의 생명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어르신들에게 더욱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어르신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자리에 계신 어르신 모두 최소 70년 넘는 기나긴 세월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셨는데 그 시간들을 돌이켜 볼 때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 중에는 스스로 으쓱 거릴 정도로 충분히 잘해왔고 자랑스런 모습이 있으실 겁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못나고 부족한 모습도 존재하실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안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잘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잘난 모습에 지나치게 교만하지 않고 나의 못난 모습에 지나치게 움츠러들지 않고 이 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절한 긴장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긍정하며 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기우뚱 거리며 이쪽저쪽 끝을 오가는 것이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사실 굉장히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정통 유대교 지도자 교육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로마 시민권자로서 당시 그리스 철학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로 따지면 안동 양반집 자제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제대로 유학 공부를 하면서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영어도 아주 잘하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변 사람들의 많은 기대를 받는 촉망받는 인재였고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의 성공이 보장돼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부터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제가 이때의 바울이라면 적당히 타협하며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유지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만 예수님을 믿고 무난하게 뒤로 교회를 도와주면서 설렁설렁 신앙생활 해도 큰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중간한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눈 앞에 놓인 화려한 성공을 포기한 채 자기가 속했던 유대교와 로마제국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복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예수님만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전했고 그 때문에 심각한 목숨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한 사람 아닐까요? 당연히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옳은 일을 위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특히나 그것이 가진 값어치가 비싸고 그로 말미암아 얻을 지위가 한 없이 높으면 놓을수록 그는 보통사람들이 감히 다다를 수 없는 훌륭한 성품을 가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 쉽게 만족하며 으쓱거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내면 속에는 또 다른 모습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바로 한 없이 음침한 그림자 였습니다. 이 역시 그의 과거 행적과 연결됩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무한한 지지와 신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싫어했던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교회를 괴롭히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감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과거가 현재 사도로 살아가는 그에게 어떻게 다가올까요?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죄책감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 직접 기록되진 않았지만 바울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숨을 잃은 당사자나 그들의 가족들의 얼굴을 수시로 마주 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가 얼마나 민망하고 괴로웠겠습니까?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아픔으로 그의 가슴을 옥죄어 왔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살아온 극적인 삶은 그의 마음에 양 극단의 빛과 그림자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린 훌륭한 사람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 때 성공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 악랄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8~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이 때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일찍 태어났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장애”를 포함한 인간의 비참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가 가진 죄책감이 얼마나 무겁게 그의 목을 조였고, 자기 자신을 얼마나 초라하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10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위대한 모습, 누구보다 헌신하고 희생한 것은 결코 그 자신이 남달리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비참하고 어두운 내면이 더 이상 그를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그 모든 아픔을 통해 더욱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에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양극단의 모습을 아우르고 스스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복음 덕분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분명합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은 참된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모든 아픔과 절망을 짊어진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 깊이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어둠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과 연약함과 그 모든 한계를 몸소 겪으시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모든 빛을 가득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빛 앞에 교만을 누르고 겸손히 찬양하게 됩니다.

앞서 드린 질문을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어르신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괜찮은 모습과 못난 모습이 복잡하게 뒤엉키실 것입니다. 그 때문에 때로 괴롭고 어지러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시고 품어 안으신다는 진리 가운데 날 마다 더욱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길 바랍니다.

마침 지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었습니다. 부활의 놀라운 빛과 생명 가운데 바울과 마찬가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를 지으시고 날마다 이끄시는 은혜의 하나님
저마다 마음 속 안에 있는 빛과 그림자를, 희망과 절망을 발견합니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때로 교만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바울의 고백이 곧 우리 자신의 고백이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교만과 좌절을 넘어 균형 있는 눈길로 나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우리를 품으시어 하루하루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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