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8일 수요일

사도행전 16장 6-10절 “애씀에서 인정함으로”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2016년 5월 1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사도행전 16장 6-10절 “애씀에서 인정함으로”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원래 오늘 예배 본문은 사도행전 16장 6-15절까지 였습니다. 그런데 설교 준비를 하며 분량이 계속 늘어나는 바람에 그대로 계속하면 설교가 3,40분은 훌쩍 지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본문을 둘로 나누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10절까지 말씀을 함께 나누고 다음 주에 바로 이어서 15절까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인데 이 번 기회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대해 깊이 깨닫는 시간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뜻한 대로 잘 안 되는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무심한 몇몇 어른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함부로 판단하고 쉽게 가르치려 들곤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해 정당한 보답을 주기보다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애쓰고 수고했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곧바로 구약학 석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많이 미흡하고 부족했지만 무사히 3학기 동안의 코스웍을 마치고 재작년, 2014년 가을에 논문학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 제가 일하던 부서에 어려움이 생겨서 불가피하게 다른 임지를 급하게 찾아야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한인교회에 재작년 12월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무척 초조했습니다. 인도네시아로 가게 되면 논문작성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출국하기 전까지 졸업논문을 다 못 끝내면 저는 앞으로 영영 학위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과 주말 모두를 논문 작성에 열심히 매달리며 나름 많은 노력과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제 부족한 역량 때문에 논문 진행이 좀처럼 잘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출일은 무섭게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제 몸에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이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청력검사 결과 이상은 없었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 일어난 증상이라고 설명하시며 충분한 휴식을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도교수님께 정중히 사정을 말씀 드리고 과감히 논문 작성을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아직도 완성을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인간의 노력이란 게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됩니다. 막연한 상식과는 달리 노력의 결과는 늘 정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덜 노력했음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를 거둘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끝내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냉정한 사실을 아프게 실감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는 방향이 단지 우리 개개인의 성공이 아닌 복음과 신앙에 관련된 경우일 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 정당하게 돌아오지 않는 건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오히려 안타까운 일들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 주변에도 헌신적으로 목회하시고 선교하시지만 도리어 억울한 오해를 당하고 하시던 사역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 신앙생활 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교회를 향해 싸늘한 냉소를 보내는 모습들을 여러분도 보셨을 겁니다. 그런 이들의 상당수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예배드리고 봉사했음에도 저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겪으면서 신앙과 현실 사이의 아찔한 거리감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함부로 비웃거나 타박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에게서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 쳐봐도 결코 달라지지 않는, 어두운 현실이 주는 괴리감은 도무지 떨쳐버리기 힘든 무력함과 절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에도 이러한 애씀과 노력의 배신에 힘겨워 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지나온 여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오늘 주보 앞면이나 스크린에 띄운 지도를 보시길 바랍니다. 




이 지도는 사도행전 15장 36절 ~ 18장 17절까지 기록된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의 동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29절은 당시 비유대인 기독교인 문제를 주제로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를 통해 복음은 유대인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한 것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자리에서 주요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15장 30절에 따르면 그는 이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지도의 제일 오른쪽 중간에 그 위치가 보일 겁니다. 바로 거기서 바울은 오랜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다투고 나뉘어서 제 각기 갈 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를 선택하여 동행하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서, 16장 1절에 보면 “더베와 루스드라”에 도착합니다. 그는 바로 그곳에서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디모데를 만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곳에서 북서쪽 방향에 있는 “아시아”로 몹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아시아”는 흔히 오해하듯이 ‘아시아 대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지도에 분명히 보이는 데로, 지중해 위편과 에게 해 오른 편에 있는 로마제국의 주요 식민도시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오늘날과 달리 교통과 통신이 매우 불편한 그 시대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한 먼 여정을 거쳐 마침내, 바로 이곳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소원은 여지없이 좌절 됩니다. 우리 다함께 6절 말씀 읽겠습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아시아 선교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가로 막으셨습니다.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아시아 대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지나갑니다. 이곳이 이고니온에서 화살표 따라 바로 옆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거기에서 지도 위편에, 흑해 아래쪽에 보이는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려 애쓰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읽어 드린 7절 말씀에 기록되었듯이, 이번에도 성령님께서는 거듭 그의 발길을 막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방해와 금지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우리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심각한 질병일 수도 있고, 강도떼를 비롯한 외부위협일 수도 있고 혹은 내부적인 심각한 갈등일 수도 있습니다. 



뭐가 됐건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바울 겪었을 깊은 절망과 허무함을 글자와 글자 사이, 여백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서 지도를 통해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무시아까지 바울의 이동거리는 대략 1,700km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하나를 더 여러분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지도는 구글맵스를 통해 부산을 시작으로 서울과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북경을 지나는 1,700km 거리의 동선을 표기한 것입니다. 한 눈으로 보아도 굉장히 먼 거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 있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총 800km이고 보통 한 달에 걸쳐 완주 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무시아까지는 최소 두 달 이상 쉼 없이 계속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머나먼 여정을 비행기나 자동차는 말할 것 없이, 지극히 원시적인 그 시대 이동수단을 통해 지나왔습니다. 본문 말씀이 이 과정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기가 쉽지만 이 몇 구절의 문장 속에는 바울이 선교를 위해 오랜 시간 흘린 땀과 눈물이 진하게 녹아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그 자신의 야망과 성공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 순수한 열망으로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성령님께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를 가로 막았습니다. 이 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을 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과 허무함으로 무시아를 지나, 자기가 원했던 방향과 정반대되는 “드로아”를 향해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곳에서 매우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 다함께 9,1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이 드로아에서 번민에 사로잡혀 뒤척거리며 잠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신비로운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환상 속에서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 한 명이 자신들의 땅으로 바다를 건너와 복음을 영접하도록 도와달라고 그를 향해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가길 원했던 아시아나 비두니아가 아닌, 그 정반대 편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인정”으로 옮긴 헬라어 <쉼비바존테스>는 보다 정확히, ‘그들이 종합하여 결론 짓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일행이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올바로 깨달아 안 것은 그들이 단순히 “환상”이라는 신비로운 일을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동안 거쳐 온 기나긴 여정을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하신 까닭은 이것이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애씀” 속에 꿈틀거리는 고집을 마침내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이적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그전에, 우리의 하루하루 삶의 여정을 통해 먼저 그 뜻을 깨달아 가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허무한 “환상”을 좇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얼마든지 신비로운 일들이 교회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적과 환상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양’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극적으로 신비로운 무언가 보다 저마다의 일상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기나긴 좌절과 실패의 기억들을 곱씹어 봐야합니다. 그리하여 애씀과 노력의 방향을 재점검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울의 인정은 "공동체"를 통해 함께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혼자 있지 않고 실라를 비롯한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이렇게 “우리”라는 말이 두 차례나 나옵니다. 또한 “인정하다”라는 동사도 복수형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바다를 건너 자신들을 도우러 오라는 마게도니아인의 명확한 환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내리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경험을 내세워 사람들을 향해 윽박지르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을 묻고 그 뜻을 함께 인정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 역시 주변에 있는 이들의 말에 귀를 넓게 여는 사람들 되었으면 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셨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역시 기록된 성경은 물론이고 우리의 친구와 이웃들을 통해 들려온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귀를 닫고 자기할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항상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길 바랍니다. 무신론자와 타종교인들, 심지어 우리가 혐오를 느끼는 이들과도 기꺼이 대화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진리는 그 자체를 외치기 이전에 먼저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명료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각자를 향한 온전한 뜻을 전하고 인정하게 하시고자 우리 곁에 소중한 이들을 주셨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발걸음을 맞추는 연습을 날마다 게을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바울과 그 일행은 지나온 멀고 힘겨운 여정의 좌절과 실패 속에서 마침내 환상을 통해 주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힘센 리더의 고집이 아닌, 동역자들과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가야할 곳, 부름 받은 그 곳 마게도니아를 향해 바다를 건너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출항은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아시아든 비두니아든 마케도니아든 모두 같은 로마제국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사이에 유럽을 향한 본격적인 복음 전파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대로 이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 나라 복음은 차츰 유대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모든 사람들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애쓰고 노력했던 아시아와 비두니아 선교를 주님께서 끝끝내 막으시고 결국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복음을 들고 나아갈지언정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깊고 깊은 마음 모두를 결코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러한 주님의 뜻 앞에 날마다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날의 좌절을 뒤돌아보고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슴 아프게도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노력의 결과는 늘 정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번번이 실패와 절망의 언덕 위를 힘겹게 지나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가만히 멈춰 서서 우리가 진정 나아가야할 곳, 정말 우리를 부르는 곳이 어디인지를 일상을 통해 더듬어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고집스런 애씀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차분히 주님의 뜻을 인정하며 그들과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저마다의 바다를 건너시길 바랍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날마다 이끄시어 도무지 상상조차 못했던 위대한 항해를 떠나게 하십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번번이 찾아오는 좌절과 실패에 마음이 무너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집이 아닌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삶의 여정을 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창한 환상을 보려하기 보다는 일상과 이웃을 통해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된 뜻을 곰곰이 묵상하여 인정하길 원합니다. 예담교회가 이 일에 함께 마음을 모으는 신앙 공동체가 되게 하여주셔서 저마다의 바다를 기쁨으로 건너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참된 길이 되신 하나님
우리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모두를 통해 가장 올바르고 선한 길로 이끄신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어 수고하고 애쓴 결과를 공정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끝없이 방황하며 길을 헤매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교회 지체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먼 길을 돌아갈 때도, 바다 위를 표류할 때도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돌보심을 삶 가운데 풍성히 깨닫고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고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을 늘 건강히 지켜주시고 가정 가운데 참 평화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일상의 좌절 가운데, 그리고 소중한 이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인정하며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뛰어넘는 위대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저마다의 바다 건너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나아가야할 정확한 방향은 살펴보지 않고 무작정 애쓰고 달리기만 했던 어리석음을 반성합니다. 신비로운 환상을 보려하기 전에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눈과 귀를 열고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뜻하신 그곳을 향해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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