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5일 화요일

누가복음 20장 27~40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부산진교회 오후예배, 2017년 4월 23일,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20장 27~40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본격적으로 핍박과 위협을 겪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된 그분의 행적을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때 예수님과 맞선 무리들이 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 파당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는 그들 가운데 ‘사두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흠잡을 거리를 노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사두개’라는 말은 다윗 왕을 보좌하던 대제사장 ‘사독’으로부터 나온 호칭입니다.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당대 최고 교육을 받은 엘리트이자 대지주로서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특징을 누가는 27절에 매우 간략한 문장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당시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확대해석 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결론적으로 부활을 부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현세의 시간들을 그 어느 누구보다 풍족히 누리고 있는 그들로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이 지극히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처럼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게 한 가지 거친 질문을 들이밀었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 28~33절에 담겨있습니다. 이를 좀 더 쉽게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한 여인이 일곱 형제의 맏아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만 남편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절에서 모세가 기록하여 전해준 율법과 같이 그 남편의 동생 곧 둘째가 그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마저도 슬하의 어떤 아이도 갖지 못한 채 죽고 말았고 셋째부터 마지막 일곱째 까지 모두 그렇게 자녀 없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믿고 있는 그 부활이 훗날 이루어졌을 때 과연 그 여자는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는 당시 생활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고대 중동 여성들은 결코 스스로의 노동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남편 혹은 아들의 든든한 그늘이 있어야만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남겨진 과부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앞에 언급한 신명기 25장 5절의 ‘형사취수혼’ 즉,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그의 남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자녀를 낳아 그녀를 돌보는 율법을 정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제도를 배경으로 한 사두개인의 질문은 사실 매우 정확하고 예리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절대 권위의 대상인 모세 율법을 인용하였기에 섣불리 반박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없고 연약한 당신의 딸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선포하신 생명의 말씀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도리어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거룩한 성경말씀을 부활의 눈으로 읽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를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문속 사두개인들과 같이 도리어 성경을 주님을 대적하는 수단으로 모독시키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방송을 통해 여자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남자 성악가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을 가리켜 카운터 테너라고 하는데 독특한 발성훈련을 통하여 그와 같은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음색을 뿜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카운터 테너의 시초가 있는데 그것은 영화 ‘파리넬리’로 잘 알려진 카스트라토라는 사람들입니다.

1562년부터 로마가톨릭 교황청은 성당 찬양대에 여자가 서는 것을 금지하였고 더 나아가 교황 식스투스 5세 때부터는 성당뿐만이 아니라 오페라 극장에서도 여자가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소프라노와 알토를 대체하기 위해 양성한 남자 가수들이 바로 “카스트라토”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카스트라토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교황청은 주로 고아나 가난한 집안의 아들들 중 목소리가 고운 아이들을 골라 거세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남성호르몬 분비를 어릴 때부터 차단하여 성인이 되어서도 높은 음역을 노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세 수술은 극심한 부작용을 유발하였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런 그들에게 미사곡을 부르게 하여 그 노래를 들으며 은혜와 감사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카스트라토는 1903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금지되기까지 무려 34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중세 가톨릭교회가 이처럼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왜 여성이 찬양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하여 결과적으로 카스트라토라는 비극을 잉태하였을까요? 그것은 허무하게도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겪은 혼란스러운 특수한 상황 속에서 당시 교회를 포위하고 있는 이교 문화와 달리 여성이 질서 있고 정숙하게 예배드릴 것을 권면하기 위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활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을 때, 성경을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시키고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켰을 때 그 어느 곳도 아닌 교회의 폭력에 의해 수 없이 많은 어린 소년들이 목숨을 잃고 평생을 끔찍한 고통 속에 불구로 살아야 했는지를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겠습니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여행 중에 많은 이들이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극진한 호의를 다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청교도들은 한 세기에 거쳐 무려 1억 명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숫자의 원주민들을 끔찍하게 학살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이 토벌에 나서면서 자주 언급했던 히브리어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말 성경에 ‘진멸’ 이라고 번역된 <헤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선교라는 미명아래 완전 멸절을 외치며 순박한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손에는 총을 또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서 승리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결과, 현재 미국에 남아있는 원주민은 고작 25만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부활 생명을 공유하는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청교도들이 망각했을 때, 신대륙 개척이라는 그들의 목적을 부활 통치보다 우선하였을 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든 끔찍한 살인집단으로 변질 되고 말았음을 또한 역사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진실 앞에서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에 기록된 사두개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냉정히 스스로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혹시 우리도 부활의 생명과 은혜 없이 성경말씀에 다가서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손에 쥐어진 성경구절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오늘날의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34~36절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부활 이후의 세계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활은 결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지루한 연속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전적으로 새로운 다스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그리고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결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아직 철저하게 감추어진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연결되는 모든 어두운 그늘들이 결코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영원한 참 빛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시기 원하는 최고의 영광과 축복은 아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부활의 자녀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진리를 사두개인들이 아직 모르고 있었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다스리심은 여전히 철저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을 겸허히 인정하며 부활의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죽은 자의 살아남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정면으로 지적하셨습니다. 37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며 분명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였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 오늘 본문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38절 다함께 읽으시겠습니다.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앞서 37절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명확한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살아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나 한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갖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 자녀 없는 수치심을 이기다 마침내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삭은 사막 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물을 무려 세 번씩이나 강탈당하였습니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들로 말미암는 갈등을 겪어야 했고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이렇듯 그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람으로서 맞이하는 온갖 아픔과 상처와 절망을 그들 역시도 온 몸으로 부딪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음 앞에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의 삶이 그렇게 죽음으로 영원한 종결을 맞이한다면 그것보다 더 허무하고 비극적인 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일생을 걸고 믿고 의지한 부활의 하나님께서 그들 역시도 다시 살리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아있는 자들이 되고 주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제 대학 동기 가운데 나이가 무려 19살이나 많았던 ‘큰 형님’이 계셨습니다. 그 형은 한참 나이어린 동생들을 항상 잘 챙겨주며 여러모로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를 자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본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곳 부산장신대에 다녔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중퇴하고 그 후로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여 형수님의 도움으로 어렵게 저희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또 다시 신학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대 후 2007년 여름부터 일본에 있는 한인교회를 일 년 간 섬기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또 그 형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원래 그 전에도 한 쪽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발달장애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췌장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통화를 하며 저는 마음 깊이 형을 위해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저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그 형님에 관한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형님께서 그만 별세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 동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의 삶에 끔찍한 비극들이 연이어 겹칠 수 있는 건인지, 너무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온갖 슬픔과 비극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망을 이겨내고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형님의 그 혹독한 비극과 죽음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참 생명으로 변화시키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가장 끔찍한 비극과 모욕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 십자가는 영광의 상징으로 변하였습니다. 부활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죽음이 결코 삼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부활의 자녀들로 거듭나게 됩니다. 비록 죽음의 그늘이 우리의 얼굴을 잠시 가릴지언정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기어이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아직 감추어져 있는 주님의 놀라운 통치 앞에 우리 모두 기꺼이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비롯한 수많은 “살아있는 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장엄한 부활의 행진에 감격으로 동참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길 마음 깊이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기록된 말씀을 부활의 생명과 신비로 이해하지 않을 때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두개인들의 어리석음을 덩달아 범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부활의 참 생명과 주님의 새로운 다스리심을 기대하며 우리가 결코 죽지 않음을 기쁨으로 믿고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 2개:

  1. 아멘..우리는 살아있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원의 영광의 하나니믜 자녀들 입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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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멘..우리는 산 자 ...영원히 영광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 입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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