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2018년 4월 20일,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만약 여러분의 자녀 혹은 손주가 납치되었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나 죄송할 정도로 그것은 매우 끔찍한 상황입니다. 그 순간 자신의 이익을 따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험에 처한 그 딱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태도입니다. 단, 그가 제 정신일 때 말입니다. 

석유재벌인 존 폴 게티는 1966년 세계 최고의 부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마피아가 16살 된 자신의 손자를 납치하여 4개월 넘게 협박하고 심지어 몸에 큰 상처를 내어 신문사에 사진을 보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납치범들이 처음 금액보다 훨씬 낮은 300만 달러를 요구하자 그는 그마저도 220만 달러로 더 깎았습니다. 왜냐하면 220만 달러까지 세금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마저도 아이의 아버지, 즉 자신의 아들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준 돈입니다. 따라서 그는 값비싼 미술품을 수집하고 젊은 미녀들과 어울려 노는 데는 흥청망청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납치당해 폭행에 시달리며 공포에 떠는 손자를 위해서는 자기 돈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5개월 만에 풀려난 그의 손자는 정신 충격으로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 시력을 잃고 반신마비를 겪은 채 오랜 시간을 보내다 지난 2011년 2월 5일, 54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유명한 납치 사건은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추악해 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한 채 광기에 휩싸인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지금 전쟁을 지휘하는 중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보급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 어떤 군대라도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극한의 체력을 소모하는 병사들에게 안정적으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책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리석은 영웅 심리에 빠져 상식과 전혀 다른 무모한 결정을 내립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그 어떤 음식도 먹지 말라는 금식령을 온 군대에 전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 했습니다. 이는 사울이 단순히 왕명을 내린 것이 아니라 제사장 권위를 제멋대로 도둑질해서 또 다른 율법을 선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수풀을 지날 때 하필 달콤하게 흐르는 꿀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지 못한 채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한 편, 사울의 그 어리석은 명령을 듣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그 순간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있지 않고 자신의 부하와 함께 단 둘이서 블레셋 군인 20명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이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 채 수풀 안에 있는 꿀을 주저 없이 지팡이로 찍어 먹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이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치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사울은 블레셋을 추격하여 싸워야할지 말지,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 때, 기대했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그 원인이 이스라엘 군대 지휘관 중에 누군가 분명히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은 그 누군가를 향한 엄중한 저주를 퍼부으며 장교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범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장남 요나단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자신이 전투를 마치고 눈앞에 흐르는 꿀을 무심결에 먹었음을 솔직하게 고백 하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제비뽑기를 통하여 자신의 장남이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지목받았음에도 사울이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44절에 보면 사울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였습니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와 같은 독기어린 말을 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설령 자신의 자녀가 맞아 죽을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부모로서 마땅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그러지는 못할망정 아무런 죄 없는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러한 요나단의 결백을 오히려 이스라엘 군대가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왕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용기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5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탐욕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 알 게 되는 사울의 내면세계는 무엇일까요? 사울은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나 밖에 없는 맏아들과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이용 대상이자 걸림돌로 여기는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때,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희생했던 사울 왕의 추악한 변질을 우리는 여기서 가슴 아프게 확인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역사가는 이와 같은 사울의 생애를 본문 52절에서 이렇게 간단히 요약합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바로 여기에 역사가 가진 무서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복잡한 수식어들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단 하나의 결정적 사건, 혹은 단 한 줄의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후대에 전해집니다.


가령, 조선이 낳은 최고의 유학자인 이황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황(李滉)은 사람됨이 기질(氣質)이 뛰어나고 총명하게 슬기로우며 가을달·얼음항아리 같이 깨끗하고 위엄이 있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숨어서 수양하고 물러나 도를 간직하는 데 뜻이 있었고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5월 8일 계축 2번째 기사)

반면 조선 최악의 간신으로 손꼽히는 김자점에게 내린 왕의 교서를 역시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역적의 괴수 김자점(金自點)은 악독한 것이 본래의 성품으로 거간꾼이나 백정 같은 자이다. 그런데 (중략) 기세가 치성해지자 온 세상을 오만하게 깔보았으며, 탐장(貪贓)이 낭자하여 팔도에 두루 미쳤다. (중략) 늙은 역적의 끝없는 욕심이 통탄스러울 뿐이다.”(효종실록 7권, 효종 2년 12월 20일 계해 1번째 기사)

저는 이황과 김자점에 대해 무지하지만 이 냉철한 역사 기록을 통해 두 사람이 평생 쌓아온 대조적인 성품을 충분히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사울을 가리켜 그가 일생 동안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명기 17장 16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요약하자면 최신 무기를 통해 군사력 증강에 몰두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율법을 이스라엘 왕들을 향해 남기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분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원리는 결코 힘과 폭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 더해 신명기 17장 18, 19절에 이스라엘 왕은 반드시 율법책을 직접 옮겨 적어, 곁에 두고 읽으면서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모든 계명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율법책, 즉 모세오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그들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와 그들의 왕이 다른 나라들과 그들의 권력자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출애굽을 비롯한 모든 구원과 승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구별된 백성들과 왕은 온 세상이 탐욕에 취해 갈구하는 온갖 성공과 풍요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정의와 공평에 따라 약자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서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추악한 독재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사울은 역사상 그 누구 못지않게 화려한 성취를 이룬 사람입니다. 평범한 청년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며 살았습니다.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불신앙을 드러냈음에도 본문 47~51절은 역설적으로 그가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권력을 유지할 든든한 가족을 이루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자신에게서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진정, 왕이며 하나님인 까닭입니다.


반면 그가 저주했던 아들 요나단은 정 반대의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요구되는 훌륭한 인격과 실력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즉,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권력 계승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생을 결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세우길 원하시는 왕이 자신이 아닌 다윗임을 깨닫고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권력을 기꺼이 양보하며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기 자신의 성공과 욕망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에 그 일은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사울과 요나단은 비록 부자지간 이었지만 그들은 사는 날 동안에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평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엇이든 움켜쥐려고 몸부림쳤지만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같은 날, 같은 곳 길보아 산위에서 똑같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나단이 살아온 날들은 사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무척 초라하였지만 그는 진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세상과 이별할 때, 반드시 누군가의 기억 한 곳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더 나아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온 나날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했다고 인정받기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과 삶의 자리들 그리고 손에 쥔 모든 것들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짓밟아 올라서고 힘을 모으는 데만 애를 쓴 다면 그것은 마치, 지난 날 사울이 걸었던 바로 그 어리석은 길을 똑같이 따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또 다른 사울들의 등장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시대의 요나단을 바로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과감히 결단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왕이라 일컬음 받았고 또한 스스로도 자신을 왕으로 여겼지만 결코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사울 대신,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왕의 권력을 주저 없이 포기한 요나단의 길을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참 하나님이심에도 기꺼이 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오르셨던 예수님의 걸음과도 일치합니다. 요나단의 그 위대한 희생은 곧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죽음이 결코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듯이, 섬김과 나눔을 꾸준히 실천할 때 부활의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 역시 진정한 생명과 희망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나단의 삶을 통해 늘 명심해야할 부활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귀감이 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소설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선생님는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거주하며 종지기로 살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시선으로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를 비롯한 많은 소설을 지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서서히 널리 알려지게 되셨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 때,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이제 고생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누리고 살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지내며 질병과 싸워온 끝에 아름다운 문학을 꽃 피워낸 그가 조금 여유 있게 산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익을 탐하고 명예를 얻는 것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맑은 성품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 있습니다. 1995년, 아동문학의 대부인 윤석중 선생님이 그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서울에서 그의 토담집까지 내려와 권위 있는 “새싹문학상”을 직접 수여하셨습니다. 하지만 권 선생님은 그것을 마치 형벌처럼 느끼시며 결국 5일 뒤에 상패와 상금을 우편으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그는 수필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전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성취한 노력의 대가로 만족해야지 다른 누구한테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중략) 상을 주고받는 일이니 신문에 내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열흘 전에 우리 이웃에선 잇따라 초상이 났다. (중략) 온통 이웃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우리 집에 경사 났다고 축하 손님이 찾아왔으니 어찌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우리들의 하느님』 148쪽)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화려한 성공과 출세가 아닌 이웃을 향한 따뜻한 공감을 잃지 않았던 선생님은 재산 전부를 기증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가난하고 병든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발자취는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 믿고 따르는 이의 삶이 얼마나 향기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권 선생님처럼 가난하고 고지식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삼덕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정당하게 일해서 얻은 풍족한 결실을 마음껏 누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만, 삶의 지향점을 정직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혹시나 좀 더 남들보다 높이 올라 더욱 많은 돈을 손에 움켜쥐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위해 나보다 힘없는 이들을 함부로 짓밟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그 대신, 좀 더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기 위해 부단히 몸부림 쳐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본문 속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폴 게티와 권정생 선생님이 보여주는 삶의 대조를 통해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는 부활 신앙을 늘 가슴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깊고 넓은 진리를 항상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사울들이 끊임없이 멸시하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 자신조차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구원과 승리는 오직 주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감히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다만 우리의 사는 날 동안에 잠잠히 진리의 길을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화려한 성공과 업적이 아닌 하나님만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의 따스한 은혜 아래서 참된 부활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여주시길 간절히 구합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마침내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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