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5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신명기 19장 1~21절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9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11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구약 성경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할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땅”입니다. 구약에서 땅은 단순한 지형지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땅은 태초부터 변하지 않고 사람들과 제일 가까이 존재하는 거룩한 피조물입니다. 또한 땅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할 가장 기초적인 삶의 터전입니다. 특별히 가나안 땅은 주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약속하시고 선물하신 곳입니다. 따라서 땅의 고결한 의미를 탐욕으로 변질시키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런 맥락에 따르면 구약에 나오는 살인금지는 곧 땅을 피로 더럽히지 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을 향해 꾸짖으신 창세기 4장 10~12절 말씀이 그러한 땅과 피의 역동적인 관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당신의 통치를 새롭게 이룰 이스라엘을 향해 십계명 제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드러내는 율법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기록된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 대한 규례는 본문 외에도 민수기 35장 9~34절과 여호수아 20장 1~9절에서 무려 두 번이나 더 언급됩니다. 그 만큼 이 제도는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확고하게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집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곳의 도피성을 정하셨습니다. 그 여섯 도피성의 위치는 이스라엘 전역에 고르게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길도 넓게 닦여 있어서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 중 의도치 않게 실수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한 사람이 거기로 도망쳐 안전히 숨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본문 5절은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생생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웃과 함께 숲에 나무를 베러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 그만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곁에 있는 사람을 죽게 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때 그는 전혀 살인을 의도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엄연히 실수이고 사고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사고를 저지른 당사자는 결백하다고 말할지라도 피해자 가족들의 심정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무런 목격자가 없다면 당연히 가해자의 속내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무지 억누르지 못한 분노 속에서 보복하려는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또 다시 피로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도피성을 정하셨습니다. 6절에 “그 피를 보복하는 자”는 1차적으로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가리키지만 최근 연구는 그들에 의해 고용된 살인 청부업자로 이해하기도합니다. 그만큼 복수는 치밀하고 집요하곤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세심한 제도 장치를 통해 더 이상 억울한 피 흘림이 없도록 살인자를 보호할 든든한 도피성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조금 더 묵상해 보면 이는 단순히 사고를 저지른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율법이 아닙니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살인을 저지를지 모르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죄의 유혹에서 지켜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끊고 죽음의 저주가 아닌 생명의 질서를 이스라엘 가운데 굳건하게 세우시려는 주님의 단호한 의지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통해 더 이상 땅이 피로 얼룩지지 않고 생명을 싹 틔우는 세상을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은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분노의 노예가 되어 살기어린 눈빛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적개심의 방향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갔고 그 결과 진리를 외친 수많은 예언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희생의 정점입니다. 주님은 억울하게 피 흘린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참 하나님이시지만 몸소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고통과 무관한 허공 위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점은 그 십자가가 부활 생명을 안겨줌으로써 죽임당한 예수님은 도피성으로 찬란하게 변화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떤 살인자도, 그 어떤 죄인도 진정한 도피성인 십자가 그늘 아래 쉼과 평안을 누린다는 진리를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도피성 율법에 담긴 생명의 질서를 일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분명히 다짐해야 할 것은 살인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형법적 의미로서 살인을 했거나 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1~22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역시 요한1서 3장 15절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늘 관계가 원만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안에는 상대를 향한 적개심, 더 나아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내면 속 미움을 덜어내기 위해 자신을 늘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누군가의 “도피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이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온갖 멸시를 겪는 이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청량한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분명합니다.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와 같이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것입니다.
주어진 힘을 휘두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어 쉴 여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비워낼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여러 위협으로부터 숨을 헐떡이며 도망쳐온 누군가를 지켜 보호 할 수 있는 도피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고될 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몸소 앞서 가셨음을 명심하며 날마다 새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마다 주어진 삶의 자리를 피로 얼룩지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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