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8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일서 3장 13~24절 "사랑의 몸을 입고"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전통적으로 사도요한의 기록으로 알려진 요한복음과 요한 1~3서의 중요한 특징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과 같이 극명하게 대조적인 개념의 비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적절한 표현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어둠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모든 죽음은 마침내 그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어둠과 죽음을 물리치고 주님의 빛과 생명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혼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복잡한 인간에게 양면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마냥 착하기만 한 사람도 늘 나쁘기만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리와 거짓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가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함부로 악하다고 규정하고 비난 하는 것은 복음으로부터 오히려 한 참 벗어나는 행동입니다. 그 무모한 비난에는 빛이며 생명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 자기 스스로를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길을 제시합니다. 14절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향하는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정죄와 미움과 교만을 내려놓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생명을 호흡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우리가 이루어야할 사랑이 결코 막연하거나 모호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먼저 16절은 그 사랑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제가 군복무 중에 열심히 읽은 신앙 서적이 있습니다. 바로 릭 워렌 목사님이 지은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미숙하고 힘겨웠던 시절이라 더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여전히 잊혀 지지 않은 강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은 그리스도인들 누구나 즐겨 암송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방금 읽은 요한1서 3장 16절은 쉽게 무시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가 지켜야할 형제 사랑의 종착점은 곧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이 전해야할 사랑입니다.
물론 우리가 문자 그대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솔직히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16절은 순교가 비일비재했던 초기 교회 특수한 상황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말씀이 주는 분명한 진리는 희생과 나눔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형제 사랑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곧바로 이어서 설명합니다. 17~18절 제가 읽겠습니다.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진정한 사랑은 입술로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요한이 지금까지의 형이상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그 사랑의 예를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가난한 형제를 재물로 돕는 일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분명 현실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식과 경험 너머에 존재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뜬구름 잡는 관념의 영역으로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셔서 철저히 참 사람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아가신 주님을 본받아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한 손길들이 곧 그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는지, 진정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기준 중 하나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결핍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입니다. 17절에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에서 “보고도”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흘낏 쳐다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시’ 혹은 ‘관찰’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도와줄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가 설령 아무리 그럴듯한 화려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과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는 철저히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살아 숨 쉬는 몸을 입을 수 있도록 나보다 약한 이들을 향한 따뜻한 관심의 눈길을 끊임없이 건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가장 구체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도록 자신의 성공과 풍요를 위한 지나친 관심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 모든 성도들을 향한 소중한 약속을 요한은 23, 24절에 기록하였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우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보답은 바로 그들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야말로 주님의 그 임재를 더욱 생명력 있게 깨닫고 누리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온갖 좌절과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진정한 힘은 바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주님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그분의 고유한 언어이며 존재방식입니다.
따라서 행함과 진실함 없이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죄악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당신께 모여든 소외되고 병든 이들에게 몸소 보이신 위대한 사랑을 본받아 오늘 하루도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며 주님의 빛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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