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7일, 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일서 3장 1~12절 "자녀의 감격"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1)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 번 한 주간 요한일서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 나누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의 핵심을 편지 형식으로 압축했다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특별히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떤 성경 못지않게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3장 1~12절은 요한일서 후반부의 서두입니다. 먼저 1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사도요한의 감격입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과 신약원문 모두 “보라!”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그 감탄의 대상은 바로 사랑인데, 사랑을 수식하는 형용사인 ‘어떠한’과 결합되어 감탄의 폭과 넓이가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어떠한’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형은 신약전체에서 본문을 포함해 단 6차례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 대부분 엄청난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서로 되물으며 놀라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장 29절에는 천사로부터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인사를 들은 마리아가 놀라며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의 “어떠한”과 “어찌함” 모두 오늘 본문 3장 1절에 나오는 “어떠한”과 동일한 헬라어 어근 <포타포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이신 주님의 영광과 마주했을 때의 즉각적인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도요한의 감격은 결코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의미의 감탄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영광에 대한 본능적인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그토록 감격하고 감탄하는 그 사랑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복음이기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한, 자격 없는 죄인인 우리를 아들, 딸로 여겨주시며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린 대로 오늘 본문인 3장은 요한일서의 두 번째 단락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앞선 1~2장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빛”이라는 고백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어둠도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빛”이십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기서 빛은 자연계의 물리적인 의미의 빛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광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친밀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진리 앞에, 이 위대한 복음 앞에 어떻게 감탄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에 의지하여 묻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의 감격을 지키고 계십니까? 솔직히, 앞에 서있는 저 역시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 원인은 분명합니다. 어느 샌가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당연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참 사람으로 오셔서 죄인을 위해 죽임 당하신 것은 그분으로서는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 희생입니다. 그 위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발견하며 사도 요한처럼 복음 앞에서의 감격을 회복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가져야할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바로 ‘깨끗함’입니다. 본문 3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의해야할 점은 이 ‘깨끗함’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막연한 결벽이 아니라 ‘주님의 깨끗하심을 닮아가는 깨끗함’입니다.
요즘은 거의 나았는데 사실 저에게는 오랜 지병이 있었습니다. 바로 ‘결벽증’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개인위생에 약간의 강박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출할 때 늘 휴대했던 것 중 하나가 조그만 손 소독제입니다. 요즘은 음식물 쓰레기 버릴 때만 사용합니다.
사실, 청결은 분명 유익한 미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결벽’은 병리적으로 판단할까요? 그 차이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청결은 사람이 필연적으로 병균을 완전히 피할 수 없고 다만 꾸준히 물리치는 것이라는 실존에 근거하지만 결벽은 아예 병균 없이 살려는 잘못된 강박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둔감한 것이 옳지 않듯이 우리가 전혀 죄와 무관한 완전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역시 건강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자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불신앙이자 교만입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하라는 사도의 권면에 담긴 의미가 바로 그러합니다. 죄인인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온전히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보혈에 의지하여 나의 더러움과 결핍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그저 안길 뿐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결코 외면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시고 따뜻한 품으로 품어 안아 주심을 반드시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밀쳐내지 않고 드넓은 사랑으로 늘 반겨 맞으시는 분이심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하늘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숨어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자녀들의 모든 눈물에 사랑으로 함께하시고 피 흘린 두 손으로 닦아 주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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