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0일, 목,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일서 4장 11~21절 "사랑이신 하나님"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올바로 살아갈 수 없는 지극히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처절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보다 가까이 하길 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이 시작합니다.
문제는 철저히 무능한 죄인인 인간이 감히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역설입니다. 본분 12절 전반부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원문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는 바로 앞 뒤에 있는 11절과 12절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는 달리 관사가 없이 등장합니다. 이런 경우 “그분 자신으로서의 하나님”, 즉 “하나님의 절대성”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곧바로 이어서 “없다”라는 뜻을 가진 부정사가 나옵니다.
이와 같은 원문의 어순에 담긴 요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로, 절대자이신 하나님 그분을 누구도 감히 볼 수 없다는, 결코 그분을 멋대로 자신의 경험 안에 가둘 수 없다는 확고한 강조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곁에 서길 원하면 원할수록 무력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다가감과 멀어짐의 모순 앞에 몸부림치게 됩니다. 성탄은 바로 그 인간의 처참한 실존 가운데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몸소 뒤집어쓰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 세상 한 복판에 다가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속성을 생생하고 명쾌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요한일서와 전통적으로 동일한 저자의 기록으로 알려진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신 일곱 개의 자기 선언들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 (10:7,9),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15:1, 5)
이 일곱 개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볼 시간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선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정확히 알려주려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계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를 가진 요한일서 4장 9~10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셔서 사람으로 살아가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은 단호히 외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감히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온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위대한 계시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궁극적인 진리 앞에 나아갑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증언입니다. 본문 16절 제가 읽겠습니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화요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랑이야말로 그분의 고유한 언어이자 존재방식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나 나아갈 수 없는, 그분을 알고자 하나 알 수 없는 인간의 모순을 뚫고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섬김 못지않게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 역시 성경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명쾌하게 요약하셨습니다.
요한이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저마다의 곁에 두신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볼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긴 사람들, 혹은 내가 함부로 대해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 그렇게 내가 쉽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가늠하게 하는 가장 정확한 기준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게 하고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사랑이 넘쳐나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삼덕교회가 사랑을 충분히 연습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바로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한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포용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 사랑 없는 거짓된 하나님 사랑을 단호히 경계해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말씀처럼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살아갈 수도 하나님과 마주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 안에 함께하시려고, 그런 우리가 당신 안에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철저한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시다 마침내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디 그 사랑 앞에 온 몸과 마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언어에 익숙해지시길 바랍니다. 그 사랑을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한 없이 위대한 은혜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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