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요일

예레미야 33장 1~9, 14~16절, “주님은 우리의 의”

2024년 4월 5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 33장 1~9, 14~16절, “주님은 우리의 의”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성경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의 내용과 정서와 감정을 인간 형태로 빚는 다면 어떤 모양일까요? 하얗고 고운 살결을 지닌 귀부인은 아닙니다. 자신만만하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근육질 용사도 아닙니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으신 분들은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성경이 만약 사람이라면 그는 온 몸 구석구석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을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걸을 겁니다.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랗고 끔찍한 상처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붕대를 칭칭 감아도 여전히 고름 섞인 피가 묻어 있습니다. 살짝만 건드려도 신음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그 어떤 약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서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처참한 아픔이 가득 스민 책입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지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예레미야가 처한 극단적인 위기 상황을 보여줍니다. 1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정보를 확인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앞장인 32장의 전반부 상황을 전제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애워쌌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성읍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성과 함께 유다 왕국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드높은 자존심도 완전히 부서져 내릴 심각한 위기입니다.

사람들은 시련을 겪을수록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진리로 포장한 달콤한 거짓을 원합니다. 특히나 막중한 종교 권위를 지닌 예언자에게 그러한 욕망을 들이밉니다. 예레미야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심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명료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말씀만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듣기 원하는 거짓이 아닌 들어야 할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바로 유다의 멸망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를 향해 거침없이 선언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 왕은 포로로 끌려갈거라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궁을 지키는 정예부대가 있는 마당에 갇혔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임금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엄중한 특별 조치입니다. 

게다가 “시위대 뜰”은 느헤미야에서 한 번 언급하는 것 외에 구약 전체에서 예레미야서 후반부에만 등장합니다. 예례미야가 처한 어둡고 어두운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그는 33장 1절에서 ‘아직’ 그 곳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 성경에 나오는 가장 슬픈 두 글자입니다. 예레미야 32장 2절과 33장 1절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그 시간의 무게는 매우 무거웠고, 질감은 무척 거칠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의 온 몸과 마음이 다치고 찢기고 상처 입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 그 깊고 깊은 좌절과 절망의 한 복판에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 본문 2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향해 지금 자기가 전할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입니다. 이것은 지난날 출애굽 사건을 암시합니다. 여호와, 즉 ‘야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시며,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거듭 분명히 알리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담긴 인격대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창조과 구원을 행하시고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입니다. 예레미야는 과연 어떤 이유로 유다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힘주어 소개했을까요? 바로 그들이 되새겨야 할, ‘잊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건져주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야 하나님답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들 기대와 정반대되는 패배와 실패를 예고하는 예레미야를 증오하고 위협했습니다. 그 결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수없이 거론하며 거창한 종교 행위는 집중했지만 정작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표대로 주님이 움직이지 않을 때, 저마다의 시위대 뜰에 갇혀 서늘한 냉기와 어둠 속에서 신음할 때, 누구나 진리를 왜곡하고 복음을 멀리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잠잠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주님께서 고난받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3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부르짖는 백성에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은 마치 히브리 노예들이 경험한 출애굽처럼, 도무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6~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6~9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6 그러나 보아라,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이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옛날과 같이 다시 회복시켜 놓겠다. 8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저지른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9 그러면 세상 만민이 내가 예루살렘에서 베푼 모든 복된 일들을 듣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나에게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도성에 베풀어 준 모든 복된 일과 평화를 듣고, 온 세계가 놀라며 떨 것이다.

이 단락의 주제는 6절 전반부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을 이렇게 곧바로 옮길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그것에게 새살과 고침이 돋아나게 하리라. 그리고 내가 그들을 고치리라”(박동현)


하나님께서는 훗날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놀라운 계획을 예레미야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살이 돋아나는 치유’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평화와 안전”을 누립니다. 회복되고 죄사함을 얻습니다. 온 세상 가운데 기쁨과 찬양과 영광의 대상 됩니다. 너무나 가슴 설레는 눈부시고 찬란한 미래입니다. 마음 깊이 사모하고 꿈꾸게 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앞날을 예언자가 선언하지만 당장 현실은 어둡고 처참합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 주위를 바벨론 군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유다 지도자들은 공포와 광기에 휩싸여 백성을 위기로 몰아놓고 있습니다. 이 거센 혼란 속에 예레미야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언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 전에 가혹한 폭력과 모욕을 견뎌내야 합니다.

이렇듯 현재 유다가 처한 어두운 상황과 미래에 주님께서 이루실 영광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살은 깊은 상처가 아문 뒤에 새롭게 돋아납니다. 주님의 평화와 안전은 공포와 위기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파괴를 전제합니다. 기쁨과 찬양과 영광은 슬픔과 저주와 암흑을 지나 다가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진실입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불편한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쁜 선물을 손쉽게 안겨주지 않으십니다. 눈물 맺힌 삶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탈출시키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질퍽이는 땅 위에 굳게 발을 딛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의 터전에서 진정한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선뜻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뼈와 살을 지니고, 심장 박동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힘겨워하는 백성을 향해 당신 성품을 오롯이 담은 이름을 들려주십니다.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그날, 예루살렘이 패배와 정복을 거쳐 포로기를 지나 다시 놀랍게 회복되고 구원 받을 그날, 비로소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날 그날, 예루살렘을 향해 사람들은 한 가지 이름을 부릅니다. 그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바로 <야훼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핍박한 유다의 마지막 왕 이름은 ‘시드기야’입니다. 히브리어 발음은 <치드키야>입니다. 풀이하자면 “여호와는 ‘나의 의’”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예루살렘을 향해 불릴 <야훼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절묘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주님은 세상 권세자가 그럴듯하게 선전 선동하는 권력을 뛰어넘는 진정한 통치자입니다. 우리 주님의 다스림은 이 땅의 헛된 이념에 메이지 않는 참된 정의와 공평입니다. 우리 주님의 통치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진정한 생명과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그 뜻을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계획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피맺힌 현실을 향해 사람들만 억지로 내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참 사람이 되시어, 예루살렘을 거닐며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한의 고통과 좌절 속에 파묻히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렇지만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주님은 사람들이 도무지 알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시어 기어이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믿고 고백합니다. 살아가며 경험하는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 어느 시위대 뜰도 시드기야도 바벨론 군대도 절대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죽지만 결코 죽지 않고 주님과 함께 회복되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꺼낸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성경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온 몸에는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을 것입니다. 눈물과 피로 흥건히 적셔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막연하게 추측하지 않으십니다. 흉터투성이인 당신의 온 몸으로 끌어안으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새 살이 돋아나게 하시어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 주님과 동행하여 회복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된 회복과 구원의 하나님
살아가며 때로는 시위대 뜰에 갇힌 것 같은 암흑을 경험합니다. 바벨론 군대에 둘러싸인 절망 가운데 휩싸이곤 합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자녀들을 마침내 치유하시고 구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의지합니다. 새살을 돋게 하시어 완성하실 하나님의 의를 바라봅니다. 성도의 간구에 응답하시어 끝내 이루실 크고 놀라운 일을 소망합니다.
저희의 연약한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붙잡게 하옵소서. 어떤 시련에도 낙심하지 말고, 지금 이곳에서 이루시는 주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