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주일, 2016년 5월 22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저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20살 때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고향 대전을 떠나 혼자 서울에 와서 살게 된 일입니다. 분명 그 이전과 이후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대전에서 보냈던 제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떠올려 보면 상대적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들 보다, 어둡고 슬픈 기억이 더 많습니다. 반면 서울에서 보낸 20살부터는 주위 사람들의 과분한 사랑과 격려로 차츰 자존감을 회복하며 보다 밝게 웃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본문 18-19절은 20대 초반에, 그 이전 힘겨운 기억들을 떠올리는 제게 무척 은혜롭고 달콤하게 들리는 말씀이었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애초에, “이전 일”과 “옛날 일”을 기억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저에게 이 말씀은 놀랍고 위대한 주님의 약속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과 전혀 다른 주님의 새로운 일들이 또한 무척 기대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시절 한창 뜨겁게 찬양집회에 참석하며, 이 말씀을 가사로 한 찬양을 흐를 때마다 더욱 간절히 불렀던 기억들이 지금도 애잔하게 떠오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신학을 점점 더 공부하면서 오랜 시간 이 말씀에 대해 가졌던 그런 이해가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더 이상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는 “이전 일”과 “옛날 일”이 일반적으로 짐작하듯이 어둡고 슬픈 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의아하게도 그와 정반대되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추억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스스로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호칭에서 뚜렷이 드러납니다. 14-1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여기에 보면, 이사야서에서만 주로 등장하는 독특한 명칭인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크도쉬 이스라엘)가 이 두 구절 속에서 각각 한 번씩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15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거기에 더해 당신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창조자”이며 “왕”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지난날 하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16-17절 말씀 읽겠습니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 두 구절이 묘사하는 사건이 무엇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출애굽 사건의 절정에 피어난 홍해바다가 갈라진 이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완전무장한 이집트의 최정예부대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살아나고 이집트 파라오의 군대는 전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극적인 홍해 사건은 “구원자” 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가장 역동적으로 드러나는 성경의 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홍해 바다위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자이심은 물론이고 동시에 “창조주”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할 성경 말씀이 바로 창세기 1장 1,2절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과 더불어 그 창조사건 이전의 상황에 대해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의 수면, 즉 물 위를 하나님의 영이 오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결코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하는 “물”은 동네 개울이나 옹달샘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바다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절망과 죽음과 공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이 “거대한 물”, 곧 바다 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말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이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쪽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강렬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의 실체는 곧 성령님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거대한 바다의 힘과 위력은 차츰 균열과 위기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의 창조 직전에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바로 홍해바다가 갈라진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포로 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홍해 사건을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이와 무척 비슷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들은 어떤 생각과 깨달음에 이르렀을까요? 그리고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진정 드러내 보이시려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신 하나님께서는 곧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는 주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긴밀하고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따라서 본문 15절에서 스스로를 “창조주”라고 일컬으신 하나님께서 홍해에서의 구원사건을 언급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이 분명, 한 뿌리로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우울한 기억이 아닌 감격적인 “출애굽 사건”을 잊으라 하셨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왜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약속인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함께 다시 한 번 18-19절 말씀 읽겠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우리가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18절에서 말씀하시는 “이전 일과 옛날 일”은 아픈 기억도 모호한 과거도 아닙니다. “홍해 사건”으로 대표되는 출애굽이라는, 이스라엘 민족 최고의 영광스러운 추억을 구체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살이 하는 그들로서는 다시금 일어나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하는, 따라서 결코 잊고 싶지 않은 신앙 경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냉정하게도 그 모든 일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이르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은 이제부터는 출애굽과 정반대되는 절망과 고통의 선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신 놀라운 은혜들을 잊으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홍해 바다 위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곧 모든 혼돈과 공포를 제압하는 창조와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과거에 맞이했던 은혜로운 구원 경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새로움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창조적인 상상력의 일부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절 후반 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히브리어 특유의 반복, 강조 법으로 20절에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렇게 19절에 이어 20절이 반복해서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사막 길에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물들로 말미암아 포로 귀환 행렬에 참여한 무리들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사막 생태계를 구성하는 승냥이와 타조 역시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인다는, 파격적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지 몇몇의 사람들만이 아닌 사막의 모든 생명들이 풍요로운 강물로 인해 소생과 회복을 경험한다면 그 사막이, 그 광야가 이전과 같겠습니까? 여전히 사람들 눈에 광야 혹은 사막으로 보이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광야는 더 이상 광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원하시는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새 일은, 단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를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늘 고맙고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로 항상 고통스러운 기억들만 가진 사람들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릇,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고 꾸준히 객관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옛 기억들 안에 밝음과 어둠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더 이상 지난날들에 얽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옛 경험들로 오늘 우리 가운데 새롭게 이루시는 주님의 구원을 더 이상 제한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불가능할 것 같은 이집트 노예살이로부터의 탈출과 바벨론 포로생활의 해방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경험과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새로운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은혜로운 추억들”까지도 과감히 지우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광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그 모든 “옛 일”들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검은 바다 위를 가르신 주님의 창조가 여전히 살아 숨 쉬어, 우리를 향한 희망들을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를 더욱 신뢰하며 우리 앞에 주님께서 열어 가시는 길과 강물,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참 생명의 질서가 회복되는 이적을 함께 바라보며 거기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새로움”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심지어 조상들로부터 오랜 시간 말씀을 읽고 배운 독실한 유대인들에게 조차 낯설고 심지어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신앙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움을 맞아들일 용기와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익숙해 질 수 없는 그 낯설고 불쾌한 새로움이 마침내 온 세상을 구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창조의 생명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셨고 사람들의 그 모든 어둠과 좌절을 깨뜨리시고 참 구원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품에 안긴 자녀들이 함께 외쳐 부르는 찬양 소리에 귀 기울이십니다.
본문 마지막절인 2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의 존재 이유를 단순명료하게 "찬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당신의 자녀들이 기계적으로 노래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구원과 창조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과 응답을 뜻합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삶과 일상을 통해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려 오늘도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더욱 기대하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새로움에 온 몸과 마음으로 반응하여 진정한 찬송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구원과 창조의 하나님.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주님의 새 일들을 바라보며, 지난날의 은혜의 추억들로부터 더욱 자유롭게 벗어나길 원합니다. 낡은 전통이 하나님의 얼굴 전체를 그려낼 수 없음을 명심하며 주님의 위대하고 새로운 구원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주신 새 길 위를 걸으며 날마다 찬송하며 행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우리를 구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봉헌기도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
날마다 새로운 은혜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심을 믿으며 삶의 결실을 이 예물에 담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지난 상처와 어둠에 아직도 짓눌린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합니다. 몸과 마음 항상 건강히 지켜주시고 가정 안에 평화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다가올 때, 그 고통들이 주님의 새로운 은혜를 향해 이끄는 통로임을 믿고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주님을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믿음의 백성들로 살아가십시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로운 새로움으로 저마다를 향한 구원의 길을 열어 가십니다.
예담: 아멘! 지난 전통과 영광에 얽매여 주님의 넓고 크신 뜻을 따르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며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찬양을 받아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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