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3일, 토,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19장 13~30절, "부자가 천국에 못 가는 이유?"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크게 두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바로 부유함과 영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길 원하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진 힘은 막강합니다. 그런 이유로 누구나 가능한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돈 만으로는 인간의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막대한 부를 가졌음에도 각종 범죄와 추문에 휩싸이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재벌가 사람들을 떠올려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실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돈 외에도 자신들의 내면을 풍요롭게 할 영적인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상류층 인사들이 명상이나 참선에 몰두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청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2절은 그에 대해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재물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집과 땅은 물론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을 포함한 총체적인 소유를 뜻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단 네 번, 그 중에서도 두 번이 오늘 본문과 마가복음 10장에서 바로 이 청년에 대해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젊은 나이에 얼마나 많은 부유함을 누리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재물에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영적인 갈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 그의 귀에 예수라는 사나이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신비로운 이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핵심을 심오하면서도 쉽고 새롭게 해석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자신에게 영적인 길을 제시할 훌륭한 선생님이 될 거라 기대하며 찾아 왔습니다.
16절은 그 청년이 주님께 물은 첫 번째 질문을 소개합니다. 바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입니다. 이러한 문장을 통해 그의 궁극적인 관심이 바로 ‘영생’, 즉 참된 생명을 누리는 것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가 구원에 대해 오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영생의 조건이 ‘선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한 참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익숙한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통해 그 선한 일의 또 다른 종류를 알기 원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17절에서 ‘선한 일’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선하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높이에 맞춰서 구약성경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매우 당돌하게 대꾸합니다. 20절 제가 읽겠습니다.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인간은 계명 한 가지도 제대로 지키기 힘든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십계명은 물론이고 모든 구약 성경 말씀 중 가장 중요한 이웃사랑에 대한 명령 역시 철저히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얼핏 교만해 보이지만 그만큼 진리에 대한 그의 갈급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그런 그의 태도를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호의를 가지고 대한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 마가복음 10장 21절은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기록합니다. 참고로 새번역 성경은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공동번역 성경은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옮겼습니다. 신약 원문이 의도하는, 예수님이 그 청년을 바라보며 가졌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번역들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요구하신 영생의 길입니다. 2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하늘의 보화를 쌓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우선 여기서 분명히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돈을 움켜쥐지 말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중요한 삶의 원리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문 속 부자 청년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읽는 우리 역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흘려보내는 일에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정도입니다.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만큼 적당히 재산의 일부를 나누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실 겁니다. 물론 그 역시 마냥 쉬운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내면의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청년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소유에 대한 전적인 포기입니다. 따라서 그는 영생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도리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22절은 기록하였습니다.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그가 가진 재물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부자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셨습니다. 24절 제가 읽겠습니다.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많은 재산을 가지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낙타’를 뜻하는 헬라어 <카멜론>과 ‘밧줄’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밀론>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가 낙타를 밧줄로 오역해서 잘못 쓴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본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 비유의 목적은 충격적인 과장법으로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입니다. 즉, 돈과 영생이 서로 얼마나 모순되는 지를 명료하게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25절은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적나라한 반응을 소개 합니다. 그들은 몹시 놀라워하면서 그렇다면 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 반문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본문 속 예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은근슬쩍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며 과도한 금액을 교회에 바치라고 요구하는 그릇된 목회자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심지어 전 재산을 팔고 합숙하며 지내는 사이비 종교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런 반사회적인 가르침을 주지 않으십니다. 복음서의 다른 내용들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실적인 삶의 도구로서 돈의 가치를 충분히 긍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경제적인 계급으로 나누어 갈등을 부추기고 획일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교리를 이해할 때, 특별히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특정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시각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자라고해서 구원 못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자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마련한 아리마대 요셉을 비롯해서 의로운 부자들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부자들을 역시 품어 안으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요구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특수한 경우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돈이 가진 근원적인 속성을 깨닫고 주의해야 합니다. 돈은 단지 경제생활에 사용되는 도구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숭배를 이끌어내는 우상이 됩니다. 돈의 정신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외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부자청년과 똑같은 결단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문자 그대로 모든 재산을 다 내다팔고 교회에서만 살라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방식의 극단역시 분명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돈 중에 무엇을 나의 참된 주님으로 삼는 지를 냉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생활에 필요한 돈 외에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맹목적으로 쌓으려 하지는 않는 지, 돈을 위해서라면 주변사람들의 상황과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지는 않는 지, 자녀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을 오로지 돈으로만 설명하지 않는 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도 돈을 섬길 수 있다는 위험 앞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고 수고롭게 봉사하고 많은 헌금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이유가 소위 복 받아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사실 재물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복잡한 세상을 살며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두고 매번 명쾌하게 양자택일을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항상 돈 앞에 흔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람들은 부유함의 욕망과 영성의 욕망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그 두 욕망은 기괴한 형태로 결합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현실적인 필요는 인정하되 재물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한 희생으로 살아가시다가 마침내 죽임 당하신 주님을 나의 삶에 진정한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돈과 명예와 자리에 대한 헛된 탐욕을 이기고 아름다운 나눔과 돌봄과 헌신을 통해 찬란한 부활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은혜가 사순절을 보내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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