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7일 토요일

사도행전 18장 24절~19장 7절 “진리에 더 가까이”

2018년 2월 17일, 토,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8장 24절~19장 7절 “진리에 더 가까이”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
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유한한 인간인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알아가고 말씀을 이해하며 적지 않은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교회의 역사가 2천년이 넘는 오늘날도 이렇다면 이제 막 복음이 조금씩 퍼져나가던 바울 시대에는 그런 좌충우돌이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많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몇 차례 말씀 드린 대로 그 때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바울조차 자신을 아직 유대교인으로 생각하며 여전히 율법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생겨났다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던 구약 신앙을 완성시키시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새로운 지평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낡은 옛 신앙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상당 기간 커다란 혼란의 늪을 통과했음을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한 혼란 중 중요한 한 대목을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 중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시대 철학의 중심지이었습니다. 또한 24절에 그가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했는데, 이 때 성경은 구약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는 바울과 흡사하게 구약성경과 헬라철학 모두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것을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에세네파” 출신이었다고 추측합니다. 에세네파는 사막에 함께 모여 금욕하며 살며 하나님의 도래를 기대했던 유대교의 한 분파였는데 요한의 행적은 그들 삶의 방식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에세네파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예언자 전통에 따라 유대교 정통주의 신앙에 충실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오로지 요한의 세례만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예수님이 아닌 요한을 중심으로, 더 나아가 구약의 한계 안에서만 해석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19장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령님께서 계심도 알지 못한 채 요한의 세례만 아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이 전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세례자 요한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방식으로만 진리를 파악했던 사람들이 당시 교회 안에 상당히 심각하게 퍼져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자신들에게 편리하고 유리한 입장에서 왜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사역은 복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 복음을 알고 있긴 하지만 복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진리로 바르게 새워주는 두 개의 사역으로 나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있을까요? 물론 이 땅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평생 저마다의 한계 속에서 말씀에 다가가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스스로 진리를 완전히 알고 있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리 앞에 바르게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으로 대표되는 익숙한 진리에서 벗어나 성령님으로 상징되는 낯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보다 불편하고 불리한 입장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오늘 하루도 성령님께서 도우셔서 참된 생명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댓글 2개:

  1.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글 잘쓴다. ㅎㅎ 화이팅

    답글삭제
    답글
    1. 댓글 게시 기능을 몰라서 이제야 확인했어요 ^^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