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7일 수요일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2024년 7월 17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세월은 흘러 지나가지 않습니다. 영혼 깊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나날만큼, 세월의 퇴적층을 지닙니다. 각기 고유한 빛깔과 질감을 지닙니다. 결정적인 순간 그 생생한 단면이 드러납니다.

1973년 7월 10일 새벽, 이탈리아 로마에서 16살 청소년이 마피아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담하게 1,700만 달러, 지금 환율로도 230억이 넘는 거액을 몸값으로 요구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질의 할아버지 존 폴 게티가 어마어마한 석유 재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계 최고 부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납치범의 요구에 응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자녀 혹은 손주가 납치된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사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송합니다. 상상만 해도 무척 끔찍합니다. 그 순간, 누구나 피가 거꾸로 솟기 마련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위험에 처한 내 아이를 한시바삐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당연은 늘 당연하지 않습니다.

폴 게티는 손자가 마피아에게 납치 되었음에도 무려 사 개월이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범인들은 몸값을 320만 달러로 대폭 낮추었습니다. 게티는 그제야 협상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100만 달러를 더 깎아 22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220만 달러까지 세금 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220만 달러마저도 아이의 아버지, 즉 자기 아들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준 돈입니다. 

존 폴 게티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거대한 미술관을 세울 정도로 값비싼 예술품 수집을 즐겼습니다. 또한 젊은 미녀들과 어울려 노는 데는 흥청망청 지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납치당해 공포에 떠는 손자를 위해서는 자기 돈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자는 납치된 지 5개월 만에 겨우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정신 충격으로 건강을 크게 잃었습니다.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다가 54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 “올 더 머니”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납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뚜렷이 확인합니다. 오로지 욕망을 따라 살아온 세월이 풍기는 악취를 맡습니다. 그 퇴적층의 단면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를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하며, 광기에 휩싸여 인생을 쌓아 올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지금 전쟁을 지휘하는 중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보급입니다. 탁월한 지휘관이 통솔하거나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병사들이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백전백패합니다. 

따라서 지금 사울에게 왕으로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터에서 극한 체력을 소모하는 병사들을 향한 안정적인 먹을거리 제공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상식과 전혀 다른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금식령입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가 제사장 권위를 함부로 훔쳐 또 다른 율법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참 묘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수풀을 지날 때 하필 달콤하게 흐르는 꿀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왕의 명령 때문에 그 꿀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던 그 때, 부하와 함께 단둘이서 블레셋 군인 20명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수풀 안에 있는 꿀을 주저 없이 지팡이로 찍어 먹었습니다. 그 결과 요나단은 전혀 의도치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금세 밝혀졌습니다. 요나단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심결에 꿀을 먹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장남을 향해 사울이 격분하였습니다. 끝까지 어리석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합니다. 본문 4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서슴없이 외칩니다. 이렇게 독기 어린 말이 이해 되십니까? 설령 자기 자녀가 맞아 죽을 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부모로서 마땅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군대를 통솔하는 왕으로서 질서를 지키고 싶었을 겁니다. 사심 없이 원칙을 세우길 바랐을 겁니다. 이를 통해 전쟁터 기강을 굳건하게 유지하길 원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 명령일 경우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사울의 명령은 정반대로 몰상식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누가 봐도 죄 없는 요나단이, 그 명령을 일부러 어기게 하셨을지 모릅니다. 사울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이스라엘 군대가 요나단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본문 4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백성이 왕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 행위입니다. 게다가 전쟁 중에는 즉결 처분 대상입니다.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울 앞에 나섰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왔을까요?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탐욕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울은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든 이용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욕망을 가로막는다면 무엇이든 걸림돌로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전쟁터로 끌려와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의 굶주림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맏아들에게 거침없이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권위를 도둑질하여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지난날 청년 사울은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추하게 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본문 47~48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사울은 즉위한 이후 블레셋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거듭되는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랜 적대 국가인 아말렉까지 쳐들어가 이겼습니다. 백성이 그를 향해 “사울! 사울!” 외치며 열광합니다. 한없는 정복감과 희열을 사울의 영혼 깊이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뜻을 살피며 내면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나라를 위해, 묵묵히 섬겨야 할 다른 책무에는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승리를 갈구하며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행적은, 얼핏 왕으로서 합당한 의무 수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군통수권자로서 정당한 국방 활동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신명기 17장에 기록된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은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병마와 같은 최신 무기를 통해 군사력 증강에 몰두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율법책을 직접 옮겨 적어 항상 곁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정의와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이스라엘의 군주는 그러한 주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그들의 왕이, 주변 나라들과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왕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탐욕 대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점차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갈수록,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자신만이 진정, 왕이며 하나님인 까닭입니다. 

사무엘상 역사가는 이러한 사울의 생애를 본문 52절에서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요약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여기서 ‘사는 날 동안에’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모든 날에’라는 뜻입니다. 즉, 사울이 일평생 붙잡은 삶의 태도를, 그가 살아온 시간의 퇴적층을 가리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블레셋과 벌이는 끝없는 싸움입니다. 죽음과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은 자칫 오해 소지가 있습니다. 그가 원치 않게 부득이 전쟁 상황에 놓인 것으로 착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통해 진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앞서 본문 47~48절을 통해 확인했듯이 전쟁은 곧 사울의 최우선 관심사입니다. 그 스스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용사들을 불러 모아 강한 군대를 키우는 일에 무엇보다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며 살았습니다. 참 기묘하게도 광기에 사로잡혀 불신앙을 드러냈음에도,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전보를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49~51절에 따르면, 권력을 유지할 든든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승리에 취했습니다. 성공에 중독되었습니다. 이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권력만이 삶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숱하게 보내신 애정 어린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헛된 탐욕을 이루기 위해 고귀한 생명들을 희생 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사로잡은 승리의 화염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음울하게 흩날리는 뿌연 재만 남긴 채, 그를 불사르고 사라졌습니다. 사울은 그토록 열광하며 내달렸던 전쟁터에서 마침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승자의 함성을 외쳤던 그곳에서 패배자의 신음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왕으로서 소명에는 무관심하고 철저히 은혜로 주어진 권력에 목을 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쟁터로 나서는 아버지의 군복을 붙잡고 울먹이는,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셨습니다. 행군하는 군인들의 발걸음에 배인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남편을, 아들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여인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울의 권세에 눌려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임금 주위에서 아부하는 권력자들 어느 누구도 그들의 탄식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사울의 일생을 관통한 범죄를 냉정하게 평가하셨습니다. 그로 인한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평생 쌓아올린 세월의 선명한 단면을, 이스라엘 역사가를 통해 서늘한 문장으로 기록에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경에 담아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5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52 사울은 일생 동안 블레셋 사람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서 사울은, 용감한 사람이나 힘 센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에게로 불러 들였다


반면 사울이 저주했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요구되는 훌륭한 인격과 실력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하듯 백성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지지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즉, 요나단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권력 계승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기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우기를 원하시는 왕이, 자신이 아닌 다윗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위해 권력을 기꺼이 양보하며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나 개인의 성공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진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 따라 요나단은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위대한 섬김과 희생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훌륭한 신앙과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입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개심이 극한으로 치달았습니다. 공공연히 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둘 사이에서 다윗을 보호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약속대로 다윗을 들판에서 만납니다. 그는 운명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제 다시는 다윗을 보지 못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부둥켜 안고 함께 울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요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20장 42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42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사울과 달리 요나단이 추구한 삶의 기준은 다름 아닌 ‘주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내밀한 뜻과 성품입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바탕으로 자기를 살폈습니다. 다윗을 바르게 평가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통해 다윗과 관계를 올바로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충실히 순종했습니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 과감히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누가 봐도 당연히 소유할 수 있는 권력과 재물을 주저 없이 포기했습니다. 아버지 사울과는 전혀 반대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의 퇴적층입니다. 

이처럼 사울과 요나단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그들은 사는 날 동안에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극명하게 다른 세월을 쌓아올렸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평생 자기만을 위해 무엇이든 움켜쥐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렇지만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같은 날, 같은 곳 길보아 산 위에서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요나단이 살아온 날들은 사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미련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나단은 진실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왕이라 불렸고 또한 스스로 자신을 왕으로 여겼지만, 결코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사울 대신, 당연히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주저 없이 왕의 길에서 벗어난 요나단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참 하나님이심에도 기꺼이 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오르셨던 예수님의 걸음과도 일치합니다. 요나단의 위대한 희생은 곧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죽음은 결코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고 높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이어갈 때 부활의 하나님께서 진정한 생명과 희망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나단의 삶을 통해 늘 명심해야 할 부활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귀감이 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소설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일본 동경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라셨습니다. 광복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여전히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온갖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결핵을 크게 앓으며 건강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거주하며 종지기로 살았습니다. 선생님은 거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시선으로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를 비롯한 여러 소설을 지었습니다. 그 책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며 서서히 이름이 널리 알리셨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때,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이제 적당히 누리고 살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생만 하며 살아오다 마침내 아름다운 문학을 꽃피워냈습니다. 그런 그가 조금 여유 있게 산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익과 명예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해맑은 성품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5년, 아동문학의 대부인 윤석중 선생님께서 미리 알리지 않고 갑자기 서울에서 안동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권위 있는 “새싹문학상”을 직접 수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수상을 마치 형벌처럼 느꼈습니다. 결국 5일 뒤에 상패와 상금을 우편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선생님은 수필에서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성취한 노력의 대가로 만족해야지 다른 누구한테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중략) 상을 주고받는 일이니 신문에 내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열흘 전에 우리 이웃에선 잇따라 초상이 났다. (중략) 온통 이웃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우리 집에 경사 났다고 축하 손님이 찾아왔으니 어찌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우리들의 하느님』 148쪽)

여러분은 이러한 선생님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는 솔직히 답답합니다. 만약 제 친한 친구가 이렇게 처신한다면 버럭 소리 지를지 모릅니다.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너무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 필요 없다고 다그칠 것 같습니다. 힘들게 살아오며 정당하게 노력해 얻은 결실이니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 오히려 그게 더 맞는 거라고 한참 설득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세상은 그런 순진무구한 바보들 덕분에 조금씩 아름답게 변화되어 왔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당연히 움켜쥘 수 있는 화려한 성공과 출세를 조금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청명한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렇기에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공감을 평생 잃지 않으셨습니다. 재산 전부를 기증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검소하게 지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 사는 날 동안에 이 땅에 남긴 발자취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따르는 이의 삶이 얼마나 향기로울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혼탁해진 영혼을 맑게 하는 시간의 영롱한 퇴적층을 보여줍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처럼 똑같이 고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당장 저부터 전혀 자신 없습니다. 다만, 삶의 지향점을 정직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며 세월을 쌓아 올렸는지를 가만히 살펴야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혹시 남들보다 좀 더 높이 올라, 더욱 많은 돈을 움켜쥐는 것이 아닙니까? 그 대신 좀 더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이 놓여 있음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은 그저 흘러가지 않습니다. 켜켜이 쌓여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세월만큼, 저마다의 색깔과 촉감을 지닌 삶의 퇴적층이 있습니다. 그 예리한 단면이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납니다. 마치 극도로 대조적인 사울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이 땅에 참 사람으로 살아가시며 쌓아 올린 위대한 퇴적층입니다. 그 눈부신 단면에 담긴 찬란한 은혜와 섬김을 영혼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온 생애를 다해 이루고 전해야 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날마다 곱씹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사울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나의 모습이 때때로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며 세월을 쌓아 올리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왕이신 하나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저희조차 욕망에 눈이 어두워 진리를 거부하고 성공의 달콤한 결실에만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승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사울의 어리석음을 물리치길 소망합니다. 사울처럼, 사는 날 동안에 탐욕이 이끄는 대로 내달리지 않게 하옵소서. 
그 대신 요나단처럼 일평생 잠잠히 진리를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꺼이 낮아지고 내려놓으며 섬길 때 주어지는, 부활 생명을 풍성히 누리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선물로 주어진 인생의 퇴적층을 믿음으로 쌓아올리게 하옵소서.
확연히 패배자로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참 승리를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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