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30일 목요일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삼덕교회 수요기도회, 2018년 8월 29일,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말씀을 사모하며 모이신 성도님들께 우리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의미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 기록들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린 다윗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나이’입니다.

사무엘상 17장 12~14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14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다윗은 형제 중 막내로서 일곱 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 중 장성한 세 명만이 지금 전쟁터에 불려갔다는 사실을 알 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에 근거해 이때 다윗의 나이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전쟁무기와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고대 서아시아에서 어느 한 국가의 군사력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군사의 수數’입니다. 즉, 보다 더 많은 숫자의 군사를 가진 나라가 적은 수의 군사를 가진 나라 보다 전쟁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 왕들은 조금이라도 손에 창과 칼을 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백성들 중에 가능한 많이 전쟁터로 끌고 갔기 때문에 이때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나라 보다 의무 입영 나이가 훨씬 어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군대 가지 않은 다윗의 넷 째 형의 나이를 높게 잡아서 17살로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럴 경우 막내 다윗은 형들과 연령생이라 해도 13살에 불과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나이는 많아 봤자 10대 초반이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성장 배경’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쉽게 공감하시듯이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바로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정성스럽게 면회를 계획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이새는 거기에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사무엘상 17장 17~18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7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여기에 보면 이새가 마련한 면회 음식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는 먼저 아들들에게 줄 볶은 곡식 한 에바를 준비 합니다. 이 때 ‘에바’는 오늘날로 따지면 약 22리터에 해당하는 꽤 무거운 무게 단위입니다. 또한 떡 열 덩이도 따로 마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전쟁에서는 군사 대열 중 어느 곳에 서는 지가 생존에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들이 전투에서 무사하도록, 그들 지휘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즈 열 덩이도 추가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음식들은 한 사람이 들고 움직이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굉장한 양입니다.

게다가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엘라 골짜기는 이새가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서쪽 방향으로 약 23km 정도에 위치 해 있습니다. 우리교회를 기준으로 하면 칠곡군청까지 해당되는, 제법 먼 거리입니다. 또한 그 사이에는 한적한 평야가 아닌, 메마르고 험한 산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라 골짜기로 향하는 길은 걷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 뿐만 아니라 강도를 비롯한 여러 위험들이 적지 않게 도사리는 곳입니다.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새가 아들들을 만나러 가려면 그 어마어마 양의 먹을거리를 챙겨서 무척 고된 길을 지나야 합니다. 겨우 도착하더라도 그곳은 언제 적군이 급습해 올지 모르는 매우 위험하고 살벌한 전쟁터입니다. 따라서 나이 들어 기력을 소진한 그로서는 도무지 직접 면회 갈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이새는 누구를 자기 대신 보내야 할까요? 아직 군대 가지 않은 아들 중 가장 큰 넷째와 다섯째에게 부탁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장 어리고 힘없는 막내 다윗의 여린 어깨에 그 육중한 짐을 들려서 전쟁터로 향하는 힘겹고도 고된 길에 혼자 내 보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형들을 만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전쟁터에서 매우 비참한 관경을 목격합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감히 하나님의 군대를 날마다 모독하지만 이스라엘 군대에서 어느 누구하나 당당히 맞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에 거룩한 분노를 느낀 다윗이 분연히 일어나 골리앗과의 대결을 자원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잔악무도한 사울 왕이더라도 꼬마 아이가 저 괴물 같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것을 차마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 다윗이 그러한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 고백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린 다윗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는 목동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양 떼를 이끌고 다녔던 유다 광야는 우리나라의 대관령처럼 푸른 풀이 아름답게 우거진 한가로운 전원 목장이 아닙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 곳은 험악한 사자나 곰이 빈번하게 출몰하여 양 뿐만 아니라 다윗의 목숨까지도 해치러 달려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사막입니다.

이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최소한 군복무가 가능한 성인이라면 괜찮을지 모르지만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이 때 다윗은 아직 군대에 가지 못하는 형을 넷이나 둔 막내입니다. 즉, 칼과 창은 물론이고 작은 몽둥이 하나 들고 싸울 능력조차 없는 어린 아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득이 선택한 무기가 바로 물맷돌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아무리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렵다 한들, 그런 막둥이더러 돈 벌어오라며 음산한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내보내실 수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년 다윗은 그런 부모 밑에서 온갖 상처와 시련을 겪으며 자랐습니다. 때문에 그는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다윗은 어린 시절, 막내로서 부모로부터의 마땅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유다 사막에 홀로 버려져서 매우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본문 바로 뒤에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서 이로 말미암아 깊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왕이시여! 수금을 잘 연주하는 사람 한 명을 곁에 두셔서, 그의 음악 소리를 통해 고통을 이겨내시옵소서!” 

그 건의를 받아들인 사울의 허락 하에 찾은 적임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수금 연주자로 인정받았음을 뜻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그의 음악 실력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전제할까요? 그것은 당연히 그 악기를 매일같이 부단히 연습했음을 의미합니다.  

몇 년 전 제가 아는 피아니스트 한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 그분 남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미국 유학 중에 힘들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산부인과 병원 이동침대에 누워 남편이 기다리는 병실로 향하며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환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당연히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메이저리그 TV 중계에 정신 팔려서 정작 자기와 아기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십 수 년이 지난 그때도 이를 빠득빠득 갈며 들려주셨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 교수님과 함께 서울 잠실야구장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지난 번 들은 그 이야기가 떠올라서 가족과 함께 종종 야구 보러 가시는 지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사님, 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자주 가요. 저도 가끔씩 같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요. 야구장에 가면 매일 정한 연습량을 채우기 힘들거든요.”

저는 그 순간 그분의 프로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 안 하면 스승이 알고, 삼일 연습 안 하면 관객이 안다.’ 그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을 유지하려면 매일 꾸준한 연습이 필수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왕 앞에 수금을 들고 설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그 악기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의 신하들이 단순히 탁월한 연주자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악령이 떠나갈 정도로 성령 충만한 영의 찬양을 들려줄 사람을 구했습니다. 즉, 소년 다윗은 항상 손에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참된 예배자 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다윗을 가리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무엘상 16장의 기록과 시편에 담긴 다윗의 수많은 찬양을 통하여 그가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예배자의 삶을 살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본래 순박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권력을 손에 쥔 후 차츰 하나님과 멀어지고 심지어는 대적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대신에 다른 왕을 이어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선택한 누군가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이것은 주로 과거시제 혹은 현재 완료를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구절 속의 ‘왕’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즉위할 사람이기 때문에 미래 시제에 해당되는 드문 경우입니다. 이렇게 구약 원문에서 미래 사건을 완료형으로 표현한 특이한 경우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반드시 성취될 사건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확고한 결심을 드러내는 문법형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신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분명히 다윗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는 왕이 되기는커녕 사무엘상에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그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그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할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유다 사막에 홀로 버려 졌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떼를 외롭게 지켜야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상처와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쥐며 잠잠히 하나님을 찬양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황무한 사막 한 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이 선언은 하나님의 위대한 감탄이자 의지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다윗은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초라한 아이였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들려드리고 싶은 시 한 편이 있습니다.



- 임보

어둠을 탓하지 말라
모든 빛나는 것들은
어둠의 어깨를 짚고
비로소 일어선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들이 더 반짝이듯
그렇게
한 시대의 별들도
어둠의 수렁에서 솟아오른다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어둠은 과연 무엇입니까? 지난 날, 마치 어린 다윗과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진 않으셨습니까? 그 시절, 힘겹게 거닐었던 여러분의 유다광야는 어디입니까? 그 때, 여러분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그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혹시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내면 깊숙한 어두운 곳을 찌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건 간에,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멸시를 당하던 간에 상관없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며 날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일구어 나갈 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 한없이 위대한 뜻과 계획을 선언하십니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마침내 어둠의 어깨를 짚고 일어나, 어둠의 수렁에서 솟아오른, 이 시대의 빛나는 별들로 세워 주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항상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묵상의 걸음을 더욱 멀리 내딛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진리입니다. 다윗을 향한 찬란한 계획이 주님의 종 사무엘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 뜻은 금세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순탄하게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왕위로부터 철저히 먼 길을 돌아 무려 약 10년간 힘겨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를 실현하며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사건과 군 사령관 요압을 시켜서 온 이스라엘 가운데 군대로 모을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숫자를 헤아린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것은 그 시대 임금으로서 지극히 당연하게 휘둘렀던 권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왕이 눈에 띄는 여인을 마음대로 곁에 두는 사례는 역사책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또한 자신의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군통수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명기 율법에 기록된 주님의 명령과 정면으로 어긋난 행동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 잘못들에 대해 분노하신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다윗이 도망자시절은 물론이고 왕관을 머리 위에 얹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왕으로서의 ‘과정’에 있음을 잊어버리고 어느덧 스스로를 왕으로 ‘완성’ 되었다고 여긴 증거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극명하게 나눠집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끝까지 거부한 채 스스로를 이미 왕으로 여긴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자기가 아직 왕이 아님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그러한 다윗의 말년을 기록합니다. 그는 몹시 늙어서 이불을 덮어도 냉기를 느낄 정도로 기력이 많이 쇠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가장 예쁜 처녀, 아비삭을 구해다가 다윗이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도록 했습니다. 이 역시 한 국가의 왕으로서 당시 결코 문제될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비삭은 밧세바와 달리 유부녀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아비삭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노년의 다윗이 그가 점차 죽음에 가까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여전히 왕이 아니라 평생 주님 앞에서 왕이 되어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바로 그것이 지난 날 사무엘을 통하여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참된 뜻임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너그럽게 양해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초안은 제가 군대에서 제대했던 24살 때 적은 묵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때 저는 목회자가 되길 꿈꾸며 신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지만 몹시도 많은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며 무척 괴로움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한 동안은 저를 향해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몹시 어색했습니다. 제가 그 호칭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츰 목사로 불리는 게 익숙해 졌습니다. 간혹 누군가 실수로 저를 ‘전도사님’이라고 부르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삼덕교회에 부임한 후 너무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감도 많이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과 지금까지 저를 신실하게 이끄신 주님의 손길을 통해 절절히 고백 합니다. 저는 일평생 그저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이지 결코 그 어떤 순간도 ‘목사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샌가 ‘이제 목사가 다 되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어지며 교회 공동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변질된다는 진실 또한 엄중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 일평생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3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 너무 교만하거나 안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또한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중심을 보시는 신실하신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모든 여정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눈길을 신뢰하며 주어진 일상을 다윗처럼, 날마다 희망차게 일구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단호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대한민국 대구에서, 삼덕교회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기도
자녀들의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 옛날, 거친 광야에서 외로이 눈물을 삼키는 어린 다윗을 향해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가지는 힘겨움과 아픔 또한 누구보다 잘 아시고 위로하시며 새로운 삶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이르는 과정임을 고백합니다. 그 은총의 긴장과 균형을 지켜가며 좌절과 교만을 넘어 참된 구원의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위에 어린 다윗과 같이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욱더 섬김과 나눔을 이어가게 하옵소서.
참된 생명의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어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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