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0일 수요일

룻기 4장 13~22절 “일상을 살다”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2021년 2월 10일, 목사 정대진
룻기 4장 13~22절 “일상을 살다”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산은 어느 공동체에게나 감격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은 뭔가 의아합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 오벳을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단순히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일반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해당되는 원문은 이 아기에 대한 나오미의 상당한 권리와 책임을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절입니다. 이웃 여인들은 이 상황을 가리켜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굳이 따지자면, 오벳에게 나오미는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이웃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벳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룻기 이야기 전체를 다시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무척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기근이 몰아닥쳐 극심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고심 끝에 이방 땅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는 달리 그만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가슴 아픈 비극을 겪었습니다.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역경과 시련이 그녀를 덮쳤습니다.

이제 그녀 곁에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생존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무척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오미는 모압 출신의 두 며느리에게 고향에 남길 권했습니다. 젊은 그들에게 자신이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모압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룻은 나오미와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룻은 고향에 남아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안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에서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낯선 땅 베들레헴에서 룻은 끼니를 잇기 위해 추수하는 들녘에 남겨진 이삭을 줍는 일을 했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해 곡식을 모두 거두지 말고 반드시 일부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황량한 삶의 자리에서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보아스는 소문을 통해 익히 들었던 룻을 알아보았습니다. 시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겨 따뜻하고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룻은 그날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나오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을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년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자신의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그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이 되어 그의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기업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철저히 희생만 요구되지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룻기에서의 고엘 제도는 신명기 25장의 수혼법과 결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그 결과 도움이 필요한 친척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경우, 출산과 양육의 책임까지 떠맡게 됩니다. 본문 앞에 등장하는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주저 없이 포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놀랍게도 성문 앞에 마을 장로 열 명을 모셔 공식적인 절차를 번거롭게 밟으면서까지 그 의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기 오벳은 그녀에게 있어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이와 같은 룻기 전체 이야기를 들여다보았을 때, 오벳의 출생은 단순히 그의 부모인 룻과 보아스가 빚어낸 평범한 사랑의 결과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위한 룻의 헌신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본 보아스의 섬김이 만나 이루어진 참으로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은 마치 자신들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본문 14, 15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는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는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알려주고 매듭짓는 다는 점입니다. 본문 17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이것이 바로 룻기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룻기는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간난 아기는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이자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보아스와 오벳을 거쳐 다윗에게 이르는 베레스의 족보를 굳이 18절 이하에 다시 한 번 더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 합니다. 18~2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따라서 본문 18절에 등장하는 ‘계보’는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관련해서 준비한 화면 보시겠습니다. 


구약성경, 특별히 창세기에서 흔히 ‘족보’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톨르도트’입니다. 본문 18절의 ‘계보’는 이 톨르도트와 같은 발음일 뿐 아니라 철자도 거의 일치합니다. 대신 알파벳 <봐브>가 추가되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독특한 모습의 <톨르도트>가 룻기 외에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해당 본문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창세기 2장 4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תּוֹלְדוֹת)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세기에는 두 가지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1장 2절에서 2장 3절까지, 칠곱 째 날에 걸친 창조입니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변형해서 반복하는 히브리 특유의 강조법을 따라 2장 4절부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흐름 가운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묘사됩니다. 

이 중요한 내용을 시작하며 창세기는 그 ‘내력’을 뜻하는 ‘톨르도트’를 같은 창세기 속 다른 톨르토트와 다르게 표기하여 구별하였습니다. 따라서 룻기 저자가 책을 의미심장하게 결론짓는 4장 18절 이하의 계보를 시작하며 굳이 창세기 2장 4절의 톨르토트를 가져온 어휘사용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바로 창조신앙과의 연결입니다.

이것에 대해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의 교수이자 랍비인 “즈비 론” 박사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해당 유대문헌을 비교 검토하며 아담의 죄를 해결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룻기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랍비들은 룻기의 족보가 메시아의 오심을 정점으로 하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쓰였다고 이해했다.” - Zvi Ron

출처: Zvi Ron, “The Genealogical list in the book of Ruth: a symbolic approach” Jewish Bible Quarterly, Vol. 38 Issue 2(April 2010), 86-87.

이를 통해 룻기가 가진 막중한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그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소박한 동화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과 구원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복음의 주인공으로 룻과 보아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그 가냘픈 어깨에 봇짐을 짊어졌을 때,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뽀얀 모래 먼지 사이를 헤치고 마침내 낯선 땅 베들레헴에 겨우 도착했을 때, 거친 농사꾼들 사이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나 떨리는 손으로 이삭을 주었을 때,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 위대한 희생이 기록되어 수 천 년 동안이나 전해져 내려올 것을 과연 알고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자신의 보리밭 한 쪽에서 야윈 몸을 추스르며 애처롭게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며 따로 먹을 것을 챙겨 주었을 때, 성문 앞에서 의아해하는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조상으로 성경에 족보가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리리라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묵묵히 섬기고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영광은 두 사람이 원대한 야망을 가슴에 품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애써 노력해 얻어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룻과 보아스는 험난한 위기의 시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상을 믿음으로 담담하게 이어갔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더없이 눈부시게 찬란한 구원의 여정이 온 우주 가운데 드넓게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순종은 굉장히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에 가까운 금욕과 가학적인 자기 절제를 바라시지도, 결벽적인 도덕성을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 아기의 탄생처럼 날마다 눈앞에 펼쳐진 일상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십니다.


몇 년 전, 진료 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그만 목숨을 거둔 임세원 교수님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뉴스를 듣고 마음이 아파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과거에 우울증에 걸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정신건강전문의, 이 끔찍한 삶의 모순이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의 아픔을 애써 감추지 않고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진솔한 고백이 담긴 책을 출간 했습니다. 바로 이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입니다. 이 중에서 오랫동안 저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출구가 없는 답답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바꿔 말해 희망을 상실하고 우울해진 사람들은 일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중단한다. 일상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이런 절박한 상황에 내가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취미생활을 끊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 즉 삶 그 자체마저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상황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드는 요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비관적으로 느끼고 자신의 일상 여러 부분을 하나씩 그만두는 과정 자체가 우울감을 더 악화시킨다. 

우리 삶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천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단언컨대, 현실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는 지독하게 운 나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보통 사람의 정신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적당한 수준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긍정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중략) 일상에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활동들, 이를테면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떨기 
동료들과 점심으로 특별한 음식 먹어보기
애완견과 공원 산책하기 
좋아하는 스포츠 팀 경기를 보며 응원하기 
밤 9시, 치킨을 배달시켜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며 먹기   

좋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곧 행복이라는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모여 행복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中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일구고 가꾸고 지켜내시길 바랍니다. 때때로 초라하고 비참하고 눈물겨운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복음을 깨달아 누리고 실천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더 없이 드높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을수록 우리의 발은 더욱더 굳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비장하게 움켜쥔 주먹을 내려놓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의 조각들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그림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룻의 평범한 아들로 그치지 않고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거듭 강조하며 분명히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생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기를 둘러싼 상황은 뭔가 기이합니다. 탁월한 학식과 지혜를 가진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대받던 목자들 역시 그 아기에게 찾아와 찬송하였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들이 온 우주를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드렸습니다. 또한 왕궁을 공포로 몰아넣고 마침내 끔찍한 폭력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삶의 시작부터, 인생의 모든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부활 하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룻기를 거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심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나의 일상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행하시고 룻기가 알려주듯이 날마다 일상을 일구어 가며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전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마음에 품고 삶의 위기를 이겨내며 일상 가운데 견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위기로 가득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룻과 보아스가 그러했듯이 진리를 따라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길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을 넘어 일상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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