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8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고된 인생 여정을 이어갑니다. 나그네의 숙명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여기서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창조’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특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화가 중에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예전에 기념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새삼 제 눈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두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그림 PPT>
이중섭 화백은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담배갑 속에 있는 얇은 은박지에 이 그림을 그려졌습니다.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난한 미술가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은박지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조금 거창하게 “은지화”(銀紙畵)라고 부릅니다. 미술평론가인 김주삼씨에 따르면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독특한 표현기법입니다. 그래서 뉴욕현대미술관은 지난 1955년, 한국인 화가 그림으로는 최초로 그의 은지화 세 점을 구입했습니다. 은지화는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이중섭”만이 주어가 되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 은박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기꺼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우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구절은 본문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광야 길에서 “물과 불”로부터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둘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재해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섬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무속 신앙이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공포입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에 큰 물을 건넌다는 것은 훨씬 더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리 배경인 광야는 밤이 되면 추위가 몰려와서 불을 지피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서 다른 곳에 옮겨 붙으면 무척 끄기 어렵습니다. 메마른 땅에 삽시간에 불이 번지고 맙니다. 따라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생생한 공포의 실체를 명확하게 언급하십니다. 과거 출애굽 여정에서도 그러하셨듯이 두려움을 이겨 낼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며 겪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하게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힘겨운 건강 문제로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 속에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며 삶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 피조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는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결단입니다.
부모에게 이웃집 예쁜 아이와 우리 집 못난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냐 아니냐입니다. 아무리 귀여워도 옆집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말 안 듣고 속상하게 해도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에서 연주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4성 장군이신 저희 부대 사령관님이 참석하는 행사 전날에는 무척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합주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군악대장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외동딸을 데리고 합주실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겨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편의상 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영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장님은 딸을 한쪽 구석에 앉히고서는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들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점점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마침내 언성을 높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앳된 음성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의 어린 딸, 영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였습니다. 의외로 “딸 바보”셨던 대장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군악대원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덕분에 나머지 연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군악대장의 말과 행동이 “너무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영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 도중에 부대원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등병이 ‘대장님!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칩니다.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깊고 깊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 겁니다.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등병에게 군악대장이란, 두려움으로 맺어진 철저한 계급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영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본문 속 이스라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 뜻을 업신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사랑 받을 만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여정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 깊이 품고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걸음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작품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끌어 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힘차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으로 자녀들을 지으시고 날마다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고된 나그네 길을 지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수없이 지치고 낙심합니다. 그런 저희를 주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 어떤 광야 길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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