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정대진
여는 글(1) - 배경과 목적
저는 구약학 석사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졸업논문 작성’이라는 고단한 작업을 거쳤습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유익했습니다. 특별히 ‘설교’에 대해, 목사로서 나름의 이해를 갖추고 방법론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첫 번째 저서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서울: 좋은씨앗, 2023)의 저술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책을 탈고하며 성서학을 통해 익힌 설교법을 좀 더 다듬고 숙달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러한 저 나름의 설교이해와 방법론을 정리하고 공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물론 저는 지역교회를 섬기는 평범한 부목사에 불과합니다. 특출난 명설교가가 아니며 그럴듯한 화려한 이력이나 학력을 갖추지도 못합니다. 다만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이라고 이름붙인 제 설교 준비과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눌변입니다. 저는 설교가로서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극심한 무대 공포를 겪었습니다. 준비한 원고를 차분하게 전달하는데 몹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설교 개요만 들고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매 주일마다 좌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전임전도사 사역을 하며 ‘원고를 최대한 정갈하게 작성하고 잘 낭독’하는 이른바 ‘원고 설교’가 저에게 가장 맞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탕에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독서와 글쓰기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제 오랜 치유와 수행의 도구였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몇 줄 문장을 남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꾸준한 글쓰기는 곧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고심하며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배열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설교자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원고에 집중하여 낭독을 전제하는 특정 방법론에 대한 제 경험과 방법을 나누는 것과 동시에, 각자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설교론의 기본기를 탐구하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설교자로서 저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이 글의 우선 목표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어눌한 언변으로 갈등하고 좌절하며 설교단을 내려왔던 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희망을 품는데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길 원합니다.
여는 글(2) - ‘설교’ 개념 정의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설교’란 무엇인지, 기본적인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 관한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정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수직적인 측면’에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묵상과 연구입니다. 다음으로 ‘수평적인 측면’에서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하기 위한 소통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요소가 동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에 좀 더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달’은 말씀에 집중한 다음에 주력해야 할 이차적인 대상입니다. ‘전달력’이 없다면 ‘결함 있는 설교’가 되지만 ‘말씀’이 없다면 아예 설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피하고자 거듭 말씀드립니다. 저는 설교에 있어 ‘전달’에 해당하는 요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른바 ‘들리는 설교’를 주장하는 ‘신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 movement)의 문제 제기와 방법론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들리는 설교’는 자칫 군중의 환호를 끌어내려는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자극할 위험이 큽니다. 게다가 묵묵히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지루한 작업에서 도피하는 변명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설교학’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대 설교학 이론 그 자체에는 죄가 없습니다. 다만 극단적인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참석한 설교 세미나에서 타교단 목사님께서 강사로 오셨습니다. 자신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해외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성공 신화를 강의 주제와 무관하게 극적으로 간증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뜬금없이 유명 자기계발 강사를 롤모델로 언급하셨습니다. 유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따라 하라고 적극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 TV에서 그분의 설교 영상을 보았습니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애처로웠습니다. 조심스러운 짐작이지만 ‘열등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쓴듯한 억지 미소를 짓고 체화되지 않은 농담을 남발했습니다. 많은 인기를 누리고 억대 연봉을 받는 유명 강사처럼 되고 싶은 욕망과 그 안에 담긴 뒤틀린 자존감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예배당 이곳저곳을 과장된 몸짓으로 오가는 모습이 충격을 넘어 슬픔으로 지금도 제 마음에 다가옵니다.
다른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 청년 연합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청년사역으로 유명한 강사 목사님이 1시간가량 열정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화려한 입담으로 회중을 휘어잡으며 울고 웃기셨습니다. 분위기는 뜨겁고 무르익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동경의 눈길을 보내고 감탄하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를 돌이켜보면 씁쓸해집니다. 그 목사님은 설교 내내 성경을 단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때 청년들이 받았다고 말하는 ‘은혜’의 실체를 과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사례는 극단적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의 실존과 욕망을 보여줍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설교단에 서지만 우리 앞에는 사람이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해야 할 말’보다는 ‘하고 싶은 말’ 혹은 ‘듣고 싶은 말’을 설교로 포장하려는 게 연약한 죄인으로서 목회자가 겪는 유혹입니다. 그 결과 ‘말씀보다 전달’에 집중하는 설교를 넘어 ‘전달만 남은’, 설교 아닌 설교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는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 설교가 됩니다. 말씀에 갈급한 성도의 귀를 닫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에 있어 ‘전달’에 담긴 위험 요소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전달’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한 ‘전달’의 의미를 고민해야 합니다. 군중을 열광시켜 환호에 도취 되는 설교, 강단을 무대로 변질시키는 설교, 복음을 듣기 좋은 수다로 뒤바뀌는 설교를 지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에 집중하는 태도와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저는 21살부터 교육전도사 사역을 했습니다. 설교자로서 오랫동안 많은 좌절을 했습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지난번 글에 쓴 바와 같이 구약학 석사과정과 책 저술 과정을 통해 저 나름의 설교 방법론을 정립했습니다. 말씀 자체가 지닌 전달력을 신뢰하는 설교, 군중 커뮤니케이션 보다 성경에 더 집중하는 설교, 신학적 깊이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춘, 본문에 철저히 근거한 원고를 차분히 낭독하는 방식의 설교입니다. 각각 아래와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묵상 – 연구 – 작성 - 연습 - 설교 – 정리
다음 글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여기에 해당하는 모든 단계를 다 지키지 못합니다. 시간이 부족할 때 많은 부분을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틀을 꾸준히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방법론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제겐 큰 부담입니다. 스스로 많은 한계를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되길 바랍니다. 다음 글로 찾아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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