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9일 목요일

"행복한 소망인으로 향하는 여정", 『아직, 소망이 있다』(IVP, 2024) 서평

행복한 소망인으로 향하는 여정
- 제임스 패커·캐롤린 나이스트롬, 『아직, 소망이 있다』(IVP, 2024) 서평

정대진

절망 중에 만난 책
소망이 없었다.
육군 일병 시절이다. 휴가 첫날 들른 서점에서 책 하나가 처진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제임스 패커’라는 저자 이름과 ‘소망’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바로 집어 들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만큼 소망에 굶주렸었다.

그전까지 내게 기독교 신앙은 평면이었다. 지극히 단순했다. 하나님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응답하는 분이었다. 그 매끈한 틀은 자대 배치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내면 이곳저곳에 유리 조각이 박혔다. 마음벽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으며 깨달았다. 지금껏 굳게 붙잡았던 신앙 체계는 허상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는 목사가 되기에 결함투성이였다. 깊은 절망이 밀려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절망 사이 갈라진 틈으로 조금씩 빛줄기가 들이쳤다. 소망이 무너져 내려 다시 소망이 솟아올랐다. 익숙했던 신념이 무너지는 고통을 통해 암흑 속 균열을 발견했다. 대학 입학 후 조금씩 익혀 갔던 신학이라는 은혜 덕분이다.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연습을 했다. 뒤돌아보며 깨닫는다. 모든 게 소망을 발견하는 훈련이었다.

그 훈련 가운데 만난 여러 스승 중 한 분이 제임스 패커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로 건너가 리젠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존 스토트와 함께 이른바 ‘20세기 복음주의’ 거장으로 불리고,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현대 고전으로 꼽힌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익숙함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렴풋하나마 알아 가기 시작했다. 내 신학 토대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며, 뭔지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그가 ‘소망’을 주제로 쓴 책을 주저 없이 붙잡은 이유다.

불완전한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소망
제임스 패커는 진정한 ‘소망’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 인물 8명을 주목한다. 삼손, 야곱, 마노아의 아내, 요나, 마르다, 도마, 시몬 베드로, 느헤미야다. 저자는 그들을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만지시고 사용하셨는지’를 주목한다. 이는 저자가 부제, ‘How God Touches and Uses Imperfect People’를 통해 밝힌 저술 의도다. 그는 서론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 모든 열등감을 치료하기 위한 최종적인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이 인생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거나, 당신도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부류의 사람들 못지않게, 부적응자와 외톨이와 낙오자를 사랑하시고, 구속하시며,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며,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모든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품은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책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한 소망인으로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34-35쪽)

저자가 다룬 여덟 인물 중, 두 사람을 절망에서 새롭게 일으킨 소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야곱이다. 그는 ‘재물욕’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혼합형 인간”이다. 또한 창세기 12~50장을 관통하는 ‘역기능 가족’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는 희생자이면서 가해자다. 어머니에게 편애를 받고 일그러진 성품으로 자라 편애하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형의 복을 훔쳤으나 외삼촌에게 착취당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과 함께하시고 마침내 나타나셨다. 얍복강 나루에서 홀로 남은 그와 밤새 씨름하셨다. 그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려 다리를 절게 하셨다. 패커는 이 장면을 해설하며 빛나는 통찰을 드러낸다. “그의 자아가 최후를 맞는 순간이라고 여겨졌던 상황이 실제로는 진정한 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79쪽). 나는 이 문장에서 정확히 나 자신을 발견하며 몰입했다. 성경이 알려 주는, ‘진정한 소망이 시작하는 이치’를 깨달았다.

다음으로 시몬 베드로의 소망이다. 저자는 그의 특성을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그는 탁월한 지도자다. 둘째, 영적 지도자 역할을 위해 과감히 희생한 사람이다. 셋째,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상당히 훌륭하고 영웅적이다. 실제로 그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직전에 베드로가 지닌 제자도의 처참한 실상이 드러났다. 그는 어리석었고 실패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였다. 베드로는 비탄에 빠져 상심한 채 울부짖었다. 이 장면을 두고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자기 확신을 꺼내 부수어 버리기 위해 실패를 허용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 즉 우리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을 때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251-252쪽)

요한복음 21장은 베드로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의 경이로운 자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님은 시몬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비참한 기억에 짓눌린 채 사랑을 고백한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세 번 이어졌다.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쓰라린 기억을 씻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연약한 충성’은 ‘정직한 충성’을 거쳐 ‘견고한 충성’이 되어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년에 쓴 두 편지,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성도를 생생하게 권면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건강한 충성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다. 약함 가운데, 반석 같은 베드로처럼 변화됨을 기대하는 소망을 품었다.

저마다의 결핍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소망의 길잡이
나머지 여섯 명의 성경 인물 역시 저자는 깊은 통찰로 들여다본다. 저마다 겪은 고통과 결핍, 그리고 그 모두를 덮는 소망을 감동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유지한다. 해당 본문의 표면에만 시선이 머물지 않는다. 깊이에 다다른다. 각 인물을 둘러싼 상황과 사건을 탄탄한 신학에 근거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내가 그랬듯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저마다의 다양한 약점을 마주할 것이다. 동시에 결핍을 딛고 일어설 나만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 지쳐 소망이 짓밟힌 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탁월한 주제를 전개하는 형식 또한 무척 훌륭하다. 자연스럽게 성경 곳곳을 넘나든다. 구약 인물의 경우 신약성경과 유기적인 관계를 풀어낸다. 가령 삼손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야곱에게서 예수님의 화해 사역을 발견한다. 예화도 인상적이다. 그는 존 던과 키플링과 엘리어트가 쓴 시, 존 버니언과 입센과 C. S. 루이스가 지은 소설을 적절히 인용하여 문학적 품격을 높인다. 여러 선교사를 언급하며 각 본문을 선교적 시각으로 이해한다. 북아일랜드 분쟁과 코소보 학살 등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운다. 게다가 곳곳에 유머도 녹아 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포근하면서도 기품 있는 설교를 완성했다.

설교자로서 나는 이 책에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신학과 문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내가 꿈꾸는 설교의 원형을 여기서 처음 발견했다. 그런 까닭에 주위 목회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사역에 지쳐 흔들리는 소명을 붙잡을 힘과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훌륭한 설교 교재로서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소그룹을 맡아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각 장마다 ‘기도문’과 ‘연구 질문’, ‘기도 제목’, ‘기록과 적용’을 제시한다.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캐롤린 나이스트롬의 공헌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은 한 사람의 독자를 넘어 공동체의 소망을 회복하는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여러 명이 함께 읽고 나누고 함께 기도할 때, 모임 가운데 참 소망이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소망이 사치인 시대에 더욱 절실한 소망
다시 군대 시절 이야기다. 휴가 복귀 후 선임들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이 책을 들춰 보다가 마침내 다 읽었던 날을 기억한다. 먹먹한 감동을 품고 경계근무 초소에 올라갔다. 유리 조각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밤하늘에 흩어졌다. 문득, 어두운 평면 너머 아득하게 펼쳐진 공간이 보였다. 거대한 다면체 별자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온 우주에 얽힌 따뜻한 소망 이야기를 내 귓가에 속삭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책 내용을 곱씹으며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절망에 균열을 내며 진정한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했다. 불완전한 나를 하나님께서 계속 만지시고 사용하시길 구했다. 물론 그 후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나는 ‘행복한 소망인’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임스 패커가 이 책을 통해 의도한 바가 내게 이루어졌다.

그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삶이 서툴던 신학생은 어느새 기성세대 문턱에 들어선 40대 목사가 되었다. 그 시절과 다른 이유로 절망하고 그때와 다른 이유로 소망을 꿈꾼다. 삶의 거친 매듭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소망이 큰 힘이 되었다. 목회자로서 소명과 인격과 설교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 적극 추천하고 선물했다. 그랬던 책이 ‘아직, 소망이 있다’라는, 더욱 적절한 제목과 보다 세련된 편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다시금 소망이 물결치길 기도한다.

소망이 사치인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재난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 갈등과 긴장이 격하게 치닫고 있다. 한국 교회의 쇠락은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처럼 보인다. 각 개인의 삶에도 여러 모양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망을 꿈꾸고 증언하는 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이다. 오랜만에 감격스레 이 책을 펼쳐 읽고 더욱 생생한 감동을 느끼며 깨닫는 결론이다. 책장을 덮으며 기도하듯 이렇게 읊조렸다. 
아직, 소망이 있다.


필자 소개: 정대진
시편 131편 찬송처럼,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젖 뗀 아이와 같은 고요와 평온을 지닌 목사가 되길 꿈꾼다. 자기를 돌아보는 정갈한 글쓰기로 빚어낸 설교를 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결실로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좋은씨앗, 2023)을 출간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석사(Th.M)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목회신학박사 과정(Th.D. in Min.)에서 ‘목회와성서’ 전공으로 균형 있는 성경 연구를 이어 가고 있다. 영남 지역 전통 교회들을 거쳐 현재 일산 승리교회 교구목사로 섬기며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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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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