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6일 금요일

사도행전 10장 1~16절 “낯선 하나님의 부르심”

2025년 5월 1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0장 1~16절 “낯선 하나님의 부르심”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하루의 시작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각 책을 대표하는 구절을 파악하는게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의 경우 어떤 말씀이 이 책 전체의 핵심을 보여줄까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단연코 1장 8절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이 가진 무한한 확장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구약 성경의 핵심 사상과 전통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원의 대상을 파격적으로 넓히셨습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본래 뜻하신 구원의 광활한 속성을 몸소 확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만 구원하신다고 오랫동안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은 더 이상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힘차게 뻗어나갑니다.


사도행전은 이와 같은 광활한 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앞에 있는, 지난 월요일에 함께 읽은 9장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극적인 회심과 복음 전도를 소개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아직 비주류 외부인입니다.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바나바의 보증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인들의 마음에는 상당한 경계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는 아직 기존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불분명하던 시대입니다. 사도행전은 물론이고 신약의 여러 서신서들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구약 성경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의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까지 뻗어간다는 진리를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과 같은 외부인이 아니라 모든 교인이 권위를 인정하는 핵심 리더의 전적인 인정이 필요 했습니다. 그 적임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회심에 이어, 베드로의 획기적인 인식 변화를 의도적으로 연달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도를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입니다. 본문 1절 다시 한 번 더 다같이 읽겠습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본문 1절은 고넬료의 사회적 지위를 알려줍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 중인 로마군 장교입니다. 로마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제국을 확장시켜 왔습니다. 그런 로마에서 해외 분쟁지역에 파병한 장교는 당대 최고 엘리트로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몇 년 안에 고국으로 돌아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가 복음 전파에 매우 유용한 영향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본문 1절은 바로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기록합니다.

놀라운 점은 그러한 로마 장교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 가운데에는 로마의 다신교 문화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다신교와 정반대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회당 예배에 참였습니다. 고넬료가 바로 그런 경우 였습니다.


본문 2절은 그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말 번역으로는 “하나님 경외”와 “백성 구제”와 “항상 기도하는 것”이 같은 무게를 가지고 나란히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외”가 상위 개념이고 “백성 구제”와 “기도”는 하위 개념입니다. 즉,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약자들을 돕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천사 역시도 4절에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은 수직적인 기도와 종교 생활만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수평적인 나눔과 섬김의 균형을 갖춰야 합니다. 고넬료는 비록 로마인이었지만 회당 예배에 낭독된 율법을 통해 이와 같은 구약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것을 실천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무한한 지평을 넓히는 역사적인 인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온전히 경외하시길 축복합니다. 율법적인 종교 생활에만 치우치거나, 혹은 지나치게 사회 봉사에만 열을 올리는 양극단의 오류를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온전히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를 이루길 소망합니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균형으로 진정 건강하고 폭넓은 신앙을 지켜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넬료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아직 유대교인입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 채 진리의 절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일방적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5~6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베드로가 살고 있는 도시와 머무르고 있는 집 주인의 이름을 정확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 곳으로 부하들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넬료로 하여금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직 유대교 신앙에 갇혀 있던 그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낯선 진리와의 만남입니다.


이는 또한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더욱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무척 생소한 진리를 알려주셨습니다. 조금 길지만 9~1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어느 날 베드로는 제 육시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율법 전통에 따른 기도 시간입니다. 게다가 이 때 “제 육시”는 오늘날로 따지면 12시, 즉 정오입니다. 태양이 작렬 하는 서아시아에서 한낮에 지붕에 올라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그가 여전히 유대교 경건 전통에 익숙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율법이 금지한 음식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음식들은 먹지 않는 것이 그동안 그에게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매우 생경하고 불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 부정한 음식들을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두고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무려 세 번이나 거부하였고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친 ‘반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굳건한 의지 표현입니다. 익숙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님의 확고한 뜻입니다.

분량상 읽진 않았지만, 이러한 환상의 의미를 사도행전 10장 17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듯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낯선 진리의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복음은 더욱 본격적으로 혈통과 지역과 계급의 경계를 넘어 역동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 속 장면은 안일하고 관성적인 신앙을 뒤흔듭니다. 신앙인으로서 분명히 지녀야할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낯선 하나님을 맞아들일 용기입니다.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좁은 경험과 지식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그 어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십니다. 때때로 그 얼굴에는 결코 예상치 못했던 고난의 상처가 남아있기도 합니다. 소름끼치게 여윈 뺨을 타고 시련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그 얼굴로 너무나 당황스런 요구를 하십니다. 그런 주님을 향해 우리는 베드로처럼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외치곤 합니다.

그렇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낯선 하나님을 몸소 만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셨습니다. 극도의 공포와 고독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추하고 끔찍한 복음 한 복판에 몸소 서 계셨기에 우리는 부활의 찬란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뜻밖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시길 바랍니다. 살아가며 도무지 예상 못했던 고난이 툭툭 다가오곤 합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시련이 덮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생의 시리도록 낯선 장면들이 너무나 아프고 허탈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그 모든 순간이 알알이 이어져 끝내 우리를 진정한 복음의 증인으로 바로 세울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이며 이 시대의 고넬료이자 베드로로 참된 경건을 지켜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축복합니다.


기도
만유의 주 하나님
주님을 참으로 경외하기에 구제와 기도를 실천한 고넬료의 신앙을 본받기 원합니다. 기꺼이 낯선 하나님의 모습을 받아들여 열방을 향한 복음 전파에 걸음을 내디딘 베드로의 결단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편협하고 익숙한 고집으로 주님의 뜻을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날마다 새롭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신뢰하며, 오늘의 아픔을 이겨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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