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8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4장 1~12절 "이름이 남겨질 때와 지워질 때"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예배로 나아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삶의 여러 고난과 염려 가운데 하나님의 따스한 은혜가 가득 하시길 소망합니다.
방금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을 돕기 위해, 어느 친척과 율법 절차를 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신 분들에게는 무척 익숙한 장면일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내용이 정확히 이해되십니까? 저는 예전에 어떤 계기가 있어 이 본문을 오랜 시간 붙잡고 씨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대충 쉽게 넘어가서 그렇지, 여기에는 너무나 많은 난제와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먹을 게 없어 부득이 며느리를 시켜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팔려고 내 놓았다는 그 땅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율법에 따라 친척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요? 그리고 대체 그 의무가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룻기가 다루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척 난감합니다.
이처럼 문제가 복잡할수록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룻기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룻기가 ‘이름’이라는 주제를 매우 특별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룻기는 그 어떤 성경보다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 이름에 대한 언급을 거듭 반복합니다.
먼저 본문 5절을 보면, 보아스는 친척에게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 11절에 의하면, 보아스는 성문 앞에서 다른 친척과 모든 공적 절차를 마치고 결과를 선포하면서 ‘이름’을 두 번이나 연거푸 언급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보아스를 향해, 그 자리에 증인으로 모인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명예롭게 알려지길 축복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4장 14절에 보면, 룻이 낳은 아기에게 마을 여인들이 복을 빌어줍니다. 앞서 보아스가 성문에서 받은 축복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 또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길 기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이름 ‘오벳’을 누가 지어주었는지 아십니까? 누굴까요? 아버지 보아스? 어머니 룻? 할머니 나오미? 모두 아닙니다. 17절에 의하면, 아기의 이름을 동네 여인들이 지어주었습니다. 룻기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성경 속 유일한 장면입니다. 이 맥락 속에서 ‘다윗’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약 원문에서 룻기의 가장 마지막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다비드>, 즉 다윗입니다. 룻기는 다윗의 이름으로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렇듯 룻기는 성경 속 그 어느 책보다 ‘이름’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옛 사람들에게 이름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해 부르는 호칭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하고 본질적인 존재 자체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흔들 수 없는, 진정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름은 반드시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전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저 없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룻기가 알려주는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를 유념하며 오늘 본문이 두 사람의 이름을 매우 대조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어느 친척 그리고 보아스 입니다. 먼저, 보아스와 성문에서 마주했던 그 친척의 이름을 끝내 알 수 없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별거 아닌 걸로 쉽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정작 그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익명의 친척을 바라보는 성경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매우 싸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친척은 가족으로서 책임은 쉽게 저버리고 오로지 자기 재산을 지키는 데만 열중 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보다는 돈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보아스의 주도면밀한 대화법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친척에게 건넨 제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 이야기만 했습니다. 사사시대 베들레헴 마을에서 희년법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책임을 맡은 친척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길게 보았을 때는 그 친척에게도 어느 정도 이익이 돌아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기 어려웠기에, 설령 밑지는 계약이라 할지라도 그가 감수할 만한 수준은 되었을 겁니다.
그런 까닭에 그 친척은 긴장을 풀고 선뜻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에게 나오미와 관련한 모든 진실을 공개합니다. 바로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의 존재입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막대한 양육비용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그 아이의 호적은 자기가 아닌 죽은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철저히 희생만 요구당할 뿐입니다.
그러자 그 친척은 지금껏 그나마 지켜왔던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끈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확고히 거부합니다. 본문 8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그 친척은 성문 앞에서 모든 절차를 마치며 보아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얼핏 듣기에 상당히 점잖은 표현입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에서 이 문장의 맥락과 분위기는 너무나 싸늘합니다. 그런 까닭에 “너나 사라!”라고 의역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상당히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그만큼 그의 태도가 매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 보아스가 그 행동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충분히 반응을 예상했습니다. 좁은 마을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며, 그의 성품과 가치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친척은 재산 축적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여겼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돈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재물에 대한 그 친척의 어리석은 집착입니다. 그 결과 물질을 손에 들려주신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았습니다. 힘겨운 가난으로 고통 받는 가족의 아픔에 눈을 감았습니다. 희년법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부린 욕심의 파장은 단지 한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가정을 넘어, 공동체를 향해 심각한 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핵가족을 넘어 1인 가정이 보편화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배경을 이루는 고대의 대가족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개념이 친족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가집니다. 지파를 넘어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한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말 성경에서 편의상 ‘친척’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대부분은 직역하면 ‘형제’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형제와 친척을 크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 모를 친척은 형제로서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가족을 넘어서는, 진정한 가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치고 상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했습니다.
가난하고 젊은 여자 룻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남정네들 사이를 오가며, 이삭을 줍는 고단한 현실에 함께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돌아와, 그 이름을 이어줄 자손이 없는 눈물겨운 절망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로지 돈 밖에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성문에서 집으로 돌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 바보처럼 후덕한 보아스 덕분에 심각한 위기를 넘겼다고 여겼을 겁니다. 재산을 무사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큰 창피도 겪지 않았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9절에 기록된 율법에 따르면, 형제의 이름을 이어가는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 치욕적인 형벌이 공개적으로 시행됩니다. 피해를 겪은 과부가 마을 장로들 앞에서 그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를 가리켜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라고 동네 사람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룻기의 그 친척 역시 이러한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문 앞에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순탄하게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장 치명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엇일까요? 그의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분명 그 친척에게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끝내 그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룻기는 단지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정도로 머물지 않습니다. 철저히 은폐합니다. 마치 그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름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관련해서 룻기 4장 1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히, 플로니 알모니>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는 지난 밤 타작마당에서 룻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 문제의 그 친척을 발견했습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룻기 기록 방식을 유심히 봐야합니다. 이때, “보아스가 그 사람을 불렀다.”라고, 보아스의 동작과 행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치 따옴표를 넣듯이 일부러 명칭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문장 안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 대신 뭐가 적혀 있죠? “아무개여!”라는 이상한 호칭입니다.
이 ‘아무개’에 해당하는 독특한 히브리어는 <플로니 알모니>입니다. 굳이 직역하자면 ‘어떤 무엇’(such a one)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본문을 포함해 단 3번만 나오는 매우 희귀한 표현입니다. 그것도 하나는 사물(삼상 21:3), 다른 하나는 장소(왕하 6:8)를 가리킵니다. 해당 구절에서 각각 ‘아무거나’, ‘아무데나’라는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는 본문이 유일합니다. 이렇게 난해한 까닭에 개역개정 성경은 ‘아무개’라고 번역 했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보아스가 많은 사람이 오가는 성문 앞에서 그 친척을 향해 실제로 <플로니 알모니>라고, “어떤 무엇아!” 혹은 “아무개야!”라고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룻기는 그의 이름을 무가치한 대상으로 여깁니다. 마치 공중파 TV에서 비속어가 나올 때 “삐~”소리로 음소거 처리 하듯이, 그의 이름을 지워버립니다. 이와 같은 세밀한 어휘사용에 룻기 저자의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에서, 본래 불려야 할 이름이 사라지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묵상하며 문득 떠오른, 옛 현인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도덕경 73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넓어 성글어 보여도 아무도 놓치지 않는다.”라는 뜻 입니다. 그 친척은 당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을지 모릅니다. 약삭빠르게 처신해 위기를 넘겨 여유를 누린 사람으로 인정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 그는 가장 치명적인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보아스의 이름은 그 친척과 명백히 대조적으로 기록됩니다. 앞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그 날 성문에서 맺은 거래는 누가 봐도 그에게 상당히 손해입니다. 사실 철저한 약자인 이방 여인 룻의 형편 따위는 그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전날 밤, 아무도 안 보는 들판에서 맺은 약속쯤이야 얼마든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을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보아스에게 누구도 감히 항의하거나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보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결코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내려 놓았습니다. 굳이 번거롭게 다른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면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간혹 룻기를 삼류 로맨스 소설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유한 중년 남성인 보아스가 젊고 예쁜 룻을 보고 반해서 손해를 무릅쓰고 사랑을 이루어 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명백한 오해입니다. 룻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잡다단하고 치열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보아스가 감수한 막대한 희생을 보여줍니다. 재정적인 이익과 손해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 친척이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정세가 불안했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과 모압은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압 여인과 혼인하여 아기를 낳는 건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아스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희년 법에 따라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사명 앞에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성경이 기록한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아스는 그 이름 모를 친척과는 정반대로 메시아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룻기의 마지막 두 구절인 4장 21~22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보아스는 룻기에서 단지 등장인물로만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인 다윗의 이름으로 끝맺는 족보에 두 번이나 거듭 이름이 나옵니다. 즉, 보아스는 베들레헴 마을의 유능하고 인자한 아저씨로 동네 사람들의 기억에만 머물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나란히 이름이 언급되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벳은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이긴 하지만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엘리멜렉의 대를 잇는 인물입니다. 엄밀하게 율법 기준으로 따지면, 오벳은 족보상으로는 보아스의 아들이 아닙니다. 원칙대로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아들이자, 룻의 첫 남편인 말론의 아들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 이름 모를 친척이 책임을 거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룻기는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성문 앞에서의 치열한 논의와 정반대로 결론지었을까요?
이것은 룻기를 둘러싼 가장 치열한 논쟁 거리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이를 두고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 여러 연구를 참고하여 마침내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보아스가 살던 사사시대에는 분명 오벳이 말론의 아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족보에는 율법에 따라 기록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룻과 보아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율법의 문자를 뛰어 넘어 오랜 세월을 지나 살아남았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 전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에 이르러 이름과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다른 구약 성경의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 속 족보는 엄밀하게 정확한 가계 정보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맥락과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됩니다.
그런 까닭에 룻기를 최종 완성한 편집자들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이 아니라 보아스를 오벳의 진정한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를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로 인정하였습니다. 그의 감격적인 헌신을 새로운 족보에 새겨 넣었습니다. 마침내 따뜻한 사랑이 싸늘한 문자를 이겼습니다. 치열한 희생이 완고한 규칙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마태 공동체가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복음서로 정리하였습니다. 그 첫 장을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거기에 룻기의 족보를 인용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과 6절 상반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보아스는 룻과 함께, 다윗의 할아버지인 이새를 낳은 오벳의 아버지로, 성경에 다시 한 번, 주님의 거룩한 족보에 등장합니다.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모범적으로 앞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놀라운 헌신과 희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보아스에게 책임을 떠넘긴 그 친척처럼, 이름에 담긴 누군가의 인격과 존엄을 가볍게 여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반면에 보아스처럼 다른 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어떤 어려움에도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가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단지 나오미와 룻, 가련한 두 과부의 인생만 구하지 않았습니다. 고된 삶의 현실 속에 아파하며 회복을 갈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눈물겨운 희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기업 무를 친척으로, 참된 보아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름이 사라지고 뺏긴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저마다의 들판에 외롭게 던져진 모든 이들을 당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보아스와 같은 신앙의 향기를 지니길 축복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름이 세상 속에 파묻힌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내 존재가 현실이 짓밟히고 짓이겨 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품고 묵묵히 섬김과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의 이름을 당신 마음에 소중히 새기실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을 굳게 다짐하며 참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선을 행하고 나누길 좋아했던 보아스의 위대한 신앙을 마음에 새깁니다. 동시에 그와 정반대로 재물에 소망을 두었던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의 어리석은 탐욕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이름은 성경 안에 찬란하게 새기시고 그 친척의 이름은 지우신 뜻 앞에 겸손히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께서 원하고 바라시는 나눔과 섬김을 신실하게 이루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첨언.
이 설교는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내 석사 논문을 기반으로 원고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내게 구약학 석사 과정은 다른 무엇보다 설교자로서 말씀의 본질을 붙잡는 태도를 훈련하는 기간이었다.
특히나 지도 교수이신 김진명 선생님께서 손수 본을 보이신 모습을 통해 더욱 그러했다.
그 덕분에 룻기를 깊이 묵상하고 연결하며 깊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훗날 제안 받은 집필 주제인 "하나님의 이름"과도 연결된다.
코스웍과 논문 작성, 모두가 벅차고 힘겨웠지만 그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성장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 훈련 시키시고, 당신의 선한 뜻에 맞게 사용하실 줄 믿는다.
내 석사 논문을 기반으로 원고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내게 구약학 석사 과정은 다른 무엇보다 설교자로서 말씀의 본질을 붙잡는 태도를 훈련하는 기간이었다.
특히나 지도 교수이신 김진명 선생님께서 손수 본을 보이신 모습을 통해 더욱 그러했다.
그 덕분에 룻기를 깊이 묵상하고 연결하며 깊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훗날 제안 받은 집필 주제인 "하나님의 이름"과도 연결된다.
코스웍과 논문 작성, 모두가 벅차고 힘겨웠지만 그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성장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 훈련 시키시고, 당신의 선한 뜻에 맞게 사용하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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