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요일

마가복음 5장 36~43절 “느리지만 늦지 않는”

2024년 5월 17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가복음 5장 36~43절 “느리지만 늦지 않는”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우리는 모두 동일한 인생의 시간 위를 지나갑니다. 하지만 저마다 거머쥐는 그 시간의 무게와 속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가령 똑같은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옆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시간의 질량은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은 무척 빠르고 가볍게 지나간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아픔과 절망의 시간은 매우 무겁고 느리게 흘러간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누구나 고통스럽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대신 손쉽게 지나가는 시간의 물결에 자신을 담그기 원합니다. 

하지만 느리고 무거운 시간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닥쳐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순간, 그 고통스런 순간의 무게를 더욱 늘리고 지체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렇게 만드는 사람을 눈앞에 둔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는 그 어떤 누구보다 ‘느리고 무거운 시간’ 위를 지났던 한 남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바로 ‘야이로’입니다. 본문 앞에 펼쳐진 장면은 지금 그가 처한 매우 참담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가 갈릴리 청년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간청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5장 전체 줄거리에서 보면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귀신 들린 거라사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오신다는 소식이 야이로에게 들었습니다. 서둘러 부둣가로 달려가 마음 졸이며 애타게 기다린 끝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회당장은 상당한 지성인이자 유능한 행정가로서 유대인 마을 공동체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습니다. 그런 그가 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 앞에, 그것도 많은 사람의 시선과 체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을까요? 

바로 어린 딸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사랑하는 딸의 끔찍한 고통 앞에서 자신이 그간 힘겹게 쌓아올린 많은 지식과 재산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잔인한 현실을 깨달은 아버지가 최후 선택은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저 엎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야이로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사망의 문턱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의 딸을 향해 함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안도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향하던 야이로에게 엄청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이 하염없이 몰려들어 딸에게로 향하는 걸음이 더욱 늦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초조하게 예수님을 기다렸던 때는 물론이고, 커다란 군중 사이를 어렵게 헤쳐 가며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들이 그에게는 과연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그가 지금껏 살아온 그 어느 시간 못지않게 느리고 무겁게 그의 목을 조여 왔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죽어가는 자기 딸을 살려달라는 야이로의 간곡한 부탁은, 이 고통스런 시간의 속도와 무게를 제발 좀 빠르고 가볍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향한 그의 가장 우선적인 기대는 분명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딸이 누워있는 집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의 소망을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매우 뜻 밖에, 무척 불쾌한 행동을 하십니다. 가던 걸음을 갑자기 멈추신 주님은 뒤돌아보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러자 잠시 후 땀과 피로 얼룩진 웬 초라한 몰골의 여인 하나가 온 몸을 바들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몸 밖으로 피를 계속 쏟아내는 병을 무려 열두 해 동안이나 앓았습니다. 그 병은 율법적으로 ‘더러운 병’이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소중한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몸은 물론이고 마음에도 큰 고통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녀는 여러 의사를 만나며 갖은 애를 썼지만 재산만 낭비할 뿐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우리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그 분 옷 끝만 건드려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 같은 왠지 모를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침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레 파고들어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놀랍게도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한없는 절망에 빠뜨렸던 병으로부터 치유와 해방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며 평화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곁에서 말못할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굴까요?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한시 바삐 집으로 가기 원했던 야이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바라던 데로 조금이라도 서둘러 딸을 고쳐 주시기는커녕 웬 남루한 여자와 길가에 서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야이로 마음이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까요? 가뜩이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인생 무게가 얼마나 더 무겁게 느껴졌을까요? 그런데 그런 그의 실낱 갔던 희망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는 결정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야이로 집에서 심부름 보낸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회당장님, 따님이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을 헛걸음 시키지 마시고 그만 돌려보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때 야이로와 같은 상황이라면 마음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우리를 한 없이 괴롭게 만드는 느린 시간의 육중한 무게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 앞에 어렵게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절망을 해결하시는 주님의 걸음이 너무나 더디시다면, 아니 멈추어 계시다면 그런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시겠습니까? 그 때, 주님을 향해 쉼 없이 솟아오르는 분노와 원망은 차마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는 야이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렇게 무심한 말씀을 던지신 후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제자 세명만 데리고 태연하게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숨을 거둔 채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어 마침내 그녀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를 힘겹게 하며 절망 끝으로 몰아넣었던 무겁고 느린 시간에서 해방시킨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몹시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간 ‘지금’, 그 아이는 분명 ‘죽어’ 있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소녀가 죽은 게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고, 즉 살아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조문객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소녀가 살아나는 것은 분명 ‘나중’ 일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 사건을 마치 ‘지금’ 일처럼 말씀하신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은 사람들의 시간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딸에게 얼른 오셔야 지금껏 자신을 억누르던 느린 시간의 무게에서 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걸음은 그의 바람과 달리 너무나 느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느끼기에 몹시 더디어 보이는 주님의 발걸음은 절대로 늦지 않고 가장 정확한 때에 그의 딸에게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드넓은 시간 안에서,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의 걸음 속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죽음에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초조함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절망에 허덕인 한 가련한 여인이 들려주는 가슴 아픈 이야기에 여유롭게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여 가장 은혜롭고 정의로운 시간의 매듭을 이어가십니다. 그 시간의 매듭을 통해 고통 받고 상처받은 이들을 돌보시고 구하신다는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무겁고 느린 시간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가볍고 빠르게 지나가기 만을 바랍니다. 물론 이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소원입니다. 

그리고 야이로가 예수님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 엎드렸듯이 꼭 필요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속도를 내야합니다. 어리석은 무책임과 태만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바라는 시간의 속도와 무게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현실은 때때로 우리에게 힘겨운 고통을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해 섭섭함을 넘어 참을 수 없는 원망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이 새벽, 기도의 자리로 모이신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음 깊은 곳을 한 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느린 시간의 정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가장 괴롭힌 고통의 실체은 무엇이고, 제일 바랐던 소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직장과 사업의 문제를 비롯해 자녀의 취업과 결혼 등 여러 현실의 문제와 수없이 많은 갈등과 아픔 속에서 마치 본문 속 야이로처럼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시간표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까닭은 자녀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내버려두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속도를 무시해서도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저마다에게 허락하신 삶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게 매듭지으실 것을 약속하시고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시간의 무게와 속도를 가장 적절하게 날마다 이끌어 가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이 세상에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야이로와 어느 이름모를 여인에게 그러하셨듯이, 각기 다른 빛깔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 촘촘하고 위대한 시간의 모자이크를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함께 이루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제 아무리 버겁고 더딘 나날의 무게를 온 몸으로 지탱한다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 안에서, 시간을 넘어 살림의 손을 내미시며 비록 느리지만 결코 늦지 않게, 못 자국 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시간의 길 위를 걸어갑니다. 하지만 저마다 짊어지는 시간의 무게와 속도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세월의 높낮이를 어우르시며 믿음의 자녀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손과 발을 항상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삶과 가정과 공동체를 덮쳐오는 모든 두려움을 믿음으로 맞서 용기 있게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 소망합니다. 


기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때때로 주님의 느린 발걸음에 너무나 마음 졸입니다. 심지어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 안에서 시간을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 느리지만, 결코 늦지 않고 때마다 돌보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상을 주님의 시선으로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4년 5월 8일 수요일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2024년 5월 8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헨리 나우웬은 내면 성숙을 위해 가야 할 고독한 길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누구나 때때로 인생을 뒤흔드는 문구를 만나곤 합니다. 저에게는 이 영어 단어 네 개가 그러했습니다. 20대 중반 이 문장을 읽고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해당 단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긴급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라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들에 도움이 되기보다 종종 방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쓸모없이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은 모든 기도의 핵심에 속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무질서한 소음을 더 크게 듣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중략)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고 나서 곧 우리는 분주함으로 빼앗긴 순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점점 더 많은 침묵 속에 이끌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곳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내면의 추진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기도는 무조건 크고 오래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3부터 입대 전까지 매일 한 시간 이상 우렁차게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장신대가 있는 광장동 소음 민원의 주범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곳 주민들에게 죄송합니다.

게다가 청소년때부터 또래 그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는 물론이고 저녁예배와 수요, 금요 기도회를 적어도 제 의지로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뜨거운 성령 체험과 극적인 간증에 심취하며 각종 부흥회와 찬양 집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 흔히 “은혜 받았다”라고 말하는 감정적인 신앙 경험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과거를 이야기하면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겨운 아픔을 느낍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지난날 그 종교 행위들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끔찍한 강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사랑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를 다그치는 분이라고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저의 연약한 자아가 존재했습니다. 주님의 무한한 은혜보다는, 나의 열정과 헌신이 신앙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통해 해방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기대했던 화려한 성공과 성취보다는 심각한 고통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저를 신학교로 이끄시어 진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라”는 이 따스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무언가를 많이 해내고 쓸모 있게 존재하라는 거짓 신앙과 단호히 결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함에 짓눌리지 않고 그분의 위대함에 기꺼이 안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눈부신 이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폭군 아합 왕을 향해 온 이스라엘에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 거라고 예고하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한 줌의 보릿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사르밧 마을에 사는 과부를 배불리 먹였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힘 있고 화려한 사역들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에서 찬란한 절정에 이룹니다. 이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종일토록 자신들의 신을 향해 자해 하면서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자기 확신과 열정으로 가득한 종교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엘리야가 제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그곳에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진리가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그 주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사실 또한 공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이 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엘리야 역시 감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홀한 승리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엘리야는 몹시 의기양양했습니다. 그야말로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했던 삶입니다. 어쩌면 이제 아합과 이세벨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를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권력은 결코 탐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 당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기가 꺾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냉혹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엘리야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보였던 호기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죽음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하셨습니다. 기운을 차린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로 그곳에서 주님과 엘리야가 나눈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9절과 13절에 하나님은 그에게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구절을 원문과 좀 더 가깝게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반복하시는 질문에 역시 동일한 답을 10절과 14절에서 계속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간단명료한 물음과는 달리 엘리야의 대답은 무척 장황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본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면 보시면서 1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 함께 읽겠습니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우리는 여기서 문장의 주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내가” 열정을 불태웠고, “나만” 남았고, “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 시대, 엘리야만큼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온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졌고 심지어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엘리야 혼자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이세벨이 보낸 군사들이 일으키는 자욱한 흙먼지와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 앞에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그가 힘겹게 토로하는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닌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느 샌가 그의 내면에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뭐래도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입니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그가 보인 찬란한 희생과 눈부신 업적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사람의 능력도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총명도 하나님의 지혜 앞에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막중한 사명감에 짓눌린 나머지 그만 그 진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기 삶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만이 기울어져 가는 민족을 되살릴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겼습니다. 

허나 현실은 잔인하고 가혹합니다. 눈앞에 살아있는 권력자 이세벨과 그가 섬기는 우상 바알과 아세라에 비해 하나님은 너무나 무력하고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대체 내가 지금까지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는 허무함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자책하였습니다. 그런 자신을 가여워하며 억울함 속에 하염없이 몸부림 쳤습니다.

정리하자면 엘리야는 ‘나’라는, ‘자아’라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은 사라진 채 오로지 나로만 가득한 ‘과잉 신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 극심한 탈진과 끝없는 절망 가운데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호렙산에 세우시며 당신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본문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과 14절에서 주님과 엘리야 사이에 같은 질문과 동일한 답변이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위치하는 11~12절을 통해 핵심 주제를 드러내는 문학 구조를 이룹니다. 이 두 구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고 그 앞을 주님이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불”이 타올랐습니다. 하나같이 크고 강력한 자연현상입니다. 이 모두는 지난날 그가 보여준 눈부신 이적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동안 그가 행했던 화려한 사역들을 상징적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곳에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을까요? 12절에 보면 불 다음으로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마치 속삭이듯 작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이 음성은 앞서 나타난 웅장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는 명백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미미하고 고요한 목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겉모습에 눈길을 뺏길 때는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안의 억척스러운 소음에 귀를 가릴 때는 절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속삭이듯 작고 고요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오직 침묵할 때만 들을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크고 강력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이 침묵 기도보다 저급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면서도 얼마든지 내면을 비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입을 다물고 잠잠히 기도하더라도 교만으로 가득할 위험이 있습니다. 목소리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핵심은 여백입니다. 세미하게 들려오는 음성을 경청하는 영혼의 공간입니다. 

엘리야는 눈부신 성공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며 어느샌가 하나님을 왜곡하였습니다. 열심히 많은 일을 쓸모 있게 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느라 어느새 내면을 차분히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듯 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여백 신앙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신앙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신 주님의 신실한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참된 침묵을 실천해 나가며 우리 각자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담대하게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이스라엘을 향해 세미하게 말씀하신 주님의 뜻은 15~18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는 네 길을 돌이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방향 전환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속에 감추어진 탐욕과 교만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종으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사명은 세 사람에게 기름 붓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바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입니다. 하사엘은 가장 극심하게 대립 했던 강적, 아람의 새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외교와 전쟁’을 상징합니다. 예후는 폭군 아합을 끌어내리고 뒤를 이을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를 대표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할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사엘을 사용하시고, 그 후에는 예후를, 그 다음에는 엘리사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야는 어느샌가 잊어버린 소중한 진리를 온 몸과 마음으로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모든 삶과 생명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진리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나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 홀로 전부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습니다. 나마저 사라지면 당장 이스라엘이 몰락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조금의 여유조차 사치로 여겼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내달려야 한다고 자기를 몰아 붙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엘리야를 향해 바알을 섬기지 않는 칠천 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엘리야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스스로 만든 틀에 갇히지 말고, 좁은 생각과 경험에 얽매이지 말고 천천히 넓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가 앞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경험하였듯이, 가끔은 잠시 멈추어 쉬어가도 된다고 다독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분명히 살아계신 당신의 다스림을 믿고 의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꺼이 내려놓고 비워내는 여백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진정 노력해야 할 목표는 거창한 무언가를 채우고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기꺼이 비우고 지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감히 덧칠할 수 없는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논어(論語) 구절이 있었습니다. 제 목회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자한(子罕)편 제4장입니다.

“子絶四(자절사)러시니 毋意(무의), 毋必(무필), 毋固(무고), 毋我(무아)러시다” 

성균관대학교 이기동 교수님께서 이렇게 번역하셨습니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단절하셨다.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

비록 유학의 가르침이지만 우리 역시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교훈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면 이기적인 욕심과 아집과 오만을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만이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과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여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 아름다운 찬양을 남겼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철저히 무력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사람이 되시어 당신을 온전히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온 세상 가장 위대한 여백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 여백을 뚫고 솟아오른 찬란한 생명과 희망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날마다 분명히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추악한 야망을 붙잡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탐욕을 그럴듯한 신앙 논리로 포장하며 자기를 속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교묘한 죄악을 단호히 분별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욕망을 숭배한다면, 열정을 다해 달려가면 갈수록 허무한 좌절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저마다의 호렙 산 위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오늘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에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헨리 나우웬의 글을 마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귀 기울여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독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쓸모없는” 존재감 속에서 명확하게, 우리는 힘과 통제에 대한 망상을 점점 죽이며 우리 존재의 중심에 숨겨진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노력과 커다란 세심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현존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청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 말씀 드립니다. 화려한 무언가를 당장 이루어 내려는 조바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릇된 탐욕을 끊어내야 합니다. 뿌리 깊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대신, 혼란스러운 우리 내면과 세상의 소음 사이를 헤치며 다기오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온 몸과 마음을 여시길 바랍니다. 이와같은 진리를 가장 명료하게 정리한 한 문장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부디 저에게 그러했듯 이 안에 담긴 복음이 성도님들 삶에 맑은 울림을 안겨주길 축원합니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기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리야처럼 너무나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이루어 내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몹시 지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신앙조차 그 어리석은 기준으로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시나브로 나지막이 다가오심을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주님의 크고 위대한 계획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진리를 따라 나 자신을 우상화하는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욕망과 자아를 비워내는 여백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여백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 여백을 살아내고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명기 3장 23~29절 "사랑이라는 해답"

2024년 5월 7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3장 23~29절 "사랑이라는 해답"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성경은 난제로 가득합니다. 물론 성경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명확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들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많은 의문과 혼란을 안겨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도 그중 하나입니다. 모세에게 내려진 가나안 진입 금지명령입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성경 속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수백 년 동안 이집트 제국의 압제에 시달렸던 하나님 백성을 구출해 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담은 율법을 선포했습니다. 이렇듯 모세는 고난을 겪은 이스라엘 가운데 주님의 뜻과 말씀을 생생히 전해준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러한 모세가 정작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이유입니다. 바로 민수기 20장 2~13절에 기록된 ‘므리바 사건’ 입니다. 힘겹게 사막을 지나던 어느 날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들어 물이 부족하다며 거칠게 따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지도자를 향해 왜 자신들을 여기로 데려와서 고생 끝에 결국 죽게하느냐며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을 불러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터져 나오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잠시 이성을 잃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거기서 물이 쏟아져 나와 온 백성들이 목마름을 해결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모세가 보인 행동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대상이 되었습니다. 관련하여 민수기 20장 12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이 날 모세가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지도자로서 지극히 미숙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 소원인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에 모세는 한 참 시간이 흘러 가나안 입성을 앞둔 백성을 향해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억울함과 원망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본문 25~26절 다함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우리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쉽게 공감합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온갖 좌절을 경험하며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실수 탓에 그동안의 헌신과 노력이 모두 무시당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드넓은 사랑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주님을 앞으로도 더욱 신뢰해야 하는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회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므리바 사건은 성경의 대표적인 난제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아마도 이 논쟁의 정확한 답을 앞으로도 계속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매우 인상적인 일을 몇 년 전에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섬긴 교회에서 열 분 정도 되는 성도님과 함께 모세오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오늘 본문에 나온 므리바 사건 난제에 대해 설명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모세가 왜 가나안에 못 들어갔는지, 그 이유에 대해 각자 의견을 여쭈어봤습니다. 다양한 생각이 오갔습니다. 잠시 후 평소 조용히 계시던 은퇴 권사님 한 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참 사랑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만약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출애굽을 완성한 공로로 사람들의 지나친 열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상이 되면 그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 비극을 막으시려고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신 게 아닐까요?”

어떻게 들리십니까? 그 때 저는 여느 딱딱한 신학책이 담아 낼 수 없는, 깊은 연륜이 묻어나는 향기로운 묵상과 깨달음을 만났습니다. 사실, 모세의 가나안 입성 금지가 개인숭배를 막기 위함이라는 해석은 이미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성찰에는 미처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사랑에 비추어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볼수록 너무나 정확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는 너무나 훌륭한 일들을 하여 많은 존경을 받다가 안타깝게도 노년에 추하게 변질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한때는 청년의 롤모델로 추앙을 받다가 어느 순간 씁쓸한 조소의 대상 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군중의 열광과 환호 소리에 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합니다. 대중이 그려낸 허상에 자기를 동일시합니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이고, 공동체를 어려움으로 몰아넣는 것을 역사와 오늘의 현실 가운데 쉽게 발견합니다. 어쩌면 화려한 성공과 거대한 성취를 이루지 않는 게 어쩌면 그에게는 더 좋은 일 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오래고 간절한 소원과 달리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신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한결 같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우상이 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반드시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의 가나안 입성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요단 저쪽, 아름다운 땅과 산과 레바논입니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당연히 들어주셔야 한다고 바라는 소원입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 했는데, 내가 이토록 열심히 충성하고 희생했는데, 주님께서 적어도 이 기도만큼은 응답해 주시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소망이 누구에게나 알게 모르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대가 크면 클수록 좌절도 깊고 쓰라리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관련하여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갈등과 아픔,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노력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던 진학과 취업, 인생을 다 바쳐 일군 사업체에 찾아온 크나큰 위기, 이 모두 앞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절망에 사무쳐 몸부림칠수록,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위대한 진리에 온 몸과 마음으로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법이 연약한 죄인인 우리의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더 이상 걸음을 내디딜 수 없을 때, 그 허무함과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리석은 소원을 넘어서는 진정한 은혜의 길로 신실하게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언덕에서 당신의 뜻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이 세상 가장 거대한 난제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피하고 싶었던 그 잔을 마침내 마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짊어지신 고뇌와 혼란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였습니다. 

인생은 난제로 가득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지치고 낙담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내신,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나 자신과 고난을 비추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연약한 인간이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놀랍고 눈부신 은혜를 발견할 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인생의 광야 여정을 담대히 이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 사랑의 주 하나님
인생이라는 광야 길을 지나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흐릿하게 보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향해 원망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통해 나 자신과 가정과 삶을 돌아보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난제를 넘어서는 사랑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4년 5월 7일 화요일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 후기



그런 영화가 있다.
당연히 봐야할 것 같지만 어쩌다 보니 볼 타이밍을 놓치고 왠지 모르게 손이 안가는 영화가 있다.
특히나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은 대작이면 더욱 그렇다.
내게 "쉰들러 리스트"가 그랬다.
TV에서 일부 장면을 보긴 했지만 전체 감상은 아직 못했다.
영화팬으로서 거대한 숙제 같은 작품이다.
휴일을 맞아 모처럼 개인 시간이 생기자 주저없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다.
그 숙제를 마치고 깊은 여운에 휩싸였다.

이 영화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거장으로서 자기 증명이다.
그는 처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화면에 펼쳐보인다.
그러면서도 절제하는 묘사를 유지하는 관록을 드러낸다.
과감하게 흑백 촬영을 시도한 용기를 비롯해, 촬영과 음악 등 여러모로 감탄이 나왔다.
간혹 이름값에 비해 실망스러운 영화가 있다.
"쉰들러 리스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역사적 '명작' 그 자체다.

이 영화는 내가 초등학교 때 개봉했다.
그 때 커다란 화제를 모으며 실존 인물 '오스카 쉰들러'에 대한 기사들이 나온 기억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실상 그는 이기적인 사업가에 불과했고, 영화가 그를 미화했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그런줄만 알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의아했고, 그 의아함은 사실이었다.
검색해보니 '영화가 왜곡했다.'는 그 기사들이 쉰들러의 참 모습을 왜곡했다.
그는 진정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수많은 유대인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그 이후 군수공장을 7개월간 멈추고 비용만 소진한 부분이 그러했다.

여러모로 많은 걸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문득 마음을 두드린 사실이 있다.
히틀러와 나치는 멀리 있지 않다.
자기 탐욕을 위해 군중을 선동하는 지도자.
그에게 압박을 받고, 아부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부역자.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주변에서 종종 목격한 장면이다.
병든 조직, 공동체의 특징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해야 할 이유다.

이 영화의 재개봉을 기다린다.
커다란 화면에서 천천히 장면을 음미하며 감독의 고민을 따라가고 싶다.
여전히 학살과 전쟁에 휩싸여 고통받는 이들을 축복하고 추모하며 글을 마친다.

2024년 4월 5일 금요일

예레미야 33장 1~9, 14~16절, “주님은 우리의 의”

2024년 4월 5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 33장 1~9, 14~16절, “주님은 우리의 의”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성경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의 내용과 정서와 감정을 인간 형태로 빚는 다면 어떤 모양일까요? 하얗고 고운 살결을 지닌 귀부인은 아닙니다. 자신만만하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근육질 용사도 아닙니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으신 분들은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성경이 만약 사람이라면 그는 온 몸 구석구석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을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걸을 겁니다.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랗고 끔찍한 상처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붕대를 칭칭 감아도 여전히 고름 섞인 피가 묻어 있습니다. 살짝만 건드려도 신음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그 어떤 약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서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처참한 아픔이 가득 스민 책입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지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예레미야가 처한 극단적인 위기 상황을 보여줍니다. 1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정보를 확인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앞장인 32장의 전반부 상황을 전제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애워쌌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성읍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성과 함께 유다 왕국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드높은 자존심도 완전히 부서져 내릴 심각한 위기입니다.

사람들은 시련을 겪을수록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진리로 포장한 달콤한 거짓을 원합니다. 특히나 막중한 종교 권위를 지닌 예언자에게 그러한 욕망을 들이밉니다. 예레미야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심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명료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말씀만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듣기 원하는 거짓이 아닌 들어야 할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바로 유다의 멸망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를 향해 거침없이 선언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 왕은 포로로 끌려갈거라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궁을 지키는 정예부대가 있는 마당에 갇혔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임금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엄중한 특별 조치입니다. 

게다가 “시위대 뜰”은 느헤미야에서 한 번 언급하는 것 외에 구약 전체에서 예레미야서 후반부에만 등장합니다. 예례미야가 처한 어둡고 어두운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그는 33장 1절에서 ‘아직’ 그 곳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 성경에 나오는 가장 슬픈 두 글자입니다. 예레미야 32장 2절과 33장 1절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그 시간의 무게는 매우 무거웠고, 질감은 무척 거칠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의 온 몸과 마음이 다치고 찢기고 상처 입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 그 깊고 깊은 좌절과 절망의 한 복판에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 본문 2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향해 지금 자기가 전할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여호와입니다. 이것은 지난날 출애굽 사건을 암시합니다. 여호와, 즉 ‘야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시며,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거듭 분명히 알리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담긴 인격대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창조과 구원을 행하시고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입니다. 예레미야는 과연 어떤 이유로 유다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힘주어 소개했을까요? 바로 그들이 되새겨야 할, ‘잊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건져주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야 하나님답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들 기대와 정반대되는 패배와 실패를 예고하는 예레미야를 증오하고 위협했습니다. 그 결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수없이 거론하며 거창한 종교 행위는 집중했지만 정작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표대로 주님이 움직이지 않을 때, 저마다의 시위대 뜰에 갇혀 서늘한 냉기와 어둠 속에서 신음할 때, 누구나 진리를 왜곡하고 복음을 멀리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잠잠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주님께서 고난받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3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부르짖는 백성에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은 마치 히브리 노예들이 경험한 출애굽처럼, 도무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6~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6~9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6 그러나 보아라,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이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옛날과 같이 다시 회복시켜 놓겠다. 8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저지른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9 그러면 세상 만민이 내가 예루살렘에서 베푼 모든 복된 일들을 듣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나에게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도성에 베풀어 준 모든 복된 일과 평화를 듣고, 온 세계가 놀라며 떨 것이다.

이 단락의 주제는 6절 전반부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을 이렇게 곧바로 옮길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그것에게 새살과 고침이 돋아나게 하리라. 그리고 내가 그들을 고치리라”(박동현)


하나님께서는 훗날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놀라운 계획을 예레미야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살이 돋아나는 치유’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평화와 안전”을 누립니다. 회복되고 죄사함을 얻습니다. 온 세상 가운데 기쁨과 찬양과 영광의 대상 됩니다. 너무나 가슴 설레는 눈부시고 찬란한 미래입니다. 마음 깊이 사모하고 꿈꾸게 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앞날을 예언자가 선언하지만 당장 현실은 어둡고 처참합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 주위를 바벨론 군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유다 지도자들은 공포와 광기에 휩싸여 백성을 위기로 몰아놓고 있습니다. 이 거센 혼란 속에 예레미야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언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 전에 가혹한 폭력과 모욕을 견뎌내야 합니다.

이렇듯 현재 유다가 처한 어두운 상황과 미래에 주님께서 이루실 영광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살은 깊은 상처가 아문 뒤에 새롭게 돋아납니다. 주님의 평화와 안전은 공포와 위기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파괴를 전제합니다. 기쁨과 찬양과 영광은 슬픔과 저주와 암흑을 지나 다가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진실입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불편한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쁜 선물을 손쉽게 안겨주지 않으십니다. 눈물 맺힌 삶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탈출시키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질퍽이는 땅 위에 굳게 발을 딛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의 터전에서 진정한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선뜻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뼈와 살을 지니고, 심장 박동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힘겨워하는 백성을 향해 당신 성품을 오롯이 담은 이름을 들려주십니다.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그날, 예루살렘이 패배와 정복을 거쳐 포로기를 지나 다시 놀랍게 회복되고 구원 받을 그날, 비로소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날 그날, 예루살렘을 향해 사람들은 한 가지 이름을 부릅니다. 그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바로 <야훼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핍박한 유다의 마지막 왕 이름은 ‘시드기야’입니다. 히브리어 발음은 <치드키야>입니다. 풀이하자면 “여호와는 ‘나의 의’”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예루살렘을 향해 불릴 <야훼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절묘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주님은 세상 권세자가 그럴듯하게 선전 선동하는 권력을 뛰어넘는 진정한 통치자입니다. 우리 주님의 다스림은 이 땅의 헛된 이념에 메이지 않는 참된 정의와 공평입니다. 우리 주님의 통치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진정한 생명과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그 뜻을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계획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피맺힌 현실을 향해 사람들만 억지로 내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참 사람이 되시어, 예루살렘을 거닐며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한의 고통과 좌절 속에 파묻히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렇지만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주님은 사람들이 도무지 알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시어 기어이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믿고 고백합니다. 살아가며 경험하는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 어느 시위대 뜰도 시드기야도 바벨론 군대도 절대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죽지만 결코 죽지 않고 주님과 함께 회복되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꺼낸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성경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온 몸에는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을 것입니다. 눈물과 피로 흥건히 적셔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막연하게 추측하지 않으십니다. 흉터투성이인 당신의 온 몸으로 끌어안으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새 살이 돋아나게 하시어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 주님과 동행하여 회복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된 회복과 구원의 하나님
살아가며 때로는 시위대 뜰에 갇힌 것 같은 암흑을 경험합니다. 바벨론 군대에 둘러싸인 절망 가운데 휩싸이곤 합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자녀들을 마침내 치유하시고 구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의지합니다. 새살을 돋게 하시어 완성하실 하나님의 의를 바라봅니다. 성도의 간구에 응답하시어 끝내 이루실 크고 놀라운 일을 소망합니다.
저희의 연약한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붙잡게 하옵소서. 어떤 시련에도 낙심하지 말고, 지금 이곳에서 이루시는 주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