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4일 화요일

역대상 9장 1절, 10장 13, 14절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사순절 두 번째 주일, 2017년 3월 12일, 부산진교회 청년설교
역대상 9장 1절, 10장 13, 14절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1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13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성경의 각 본문을 잘 이해하는 첫 번째 길은 그 말씀이 놓인 “삶의 자리”를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각 성경에 대한 적절한 연구서를 참고하는 게 무척 중요한데 그렇지 못할 경우 해당되는 성경 안에서 거기에 해당되는 구절을 찾는 것입니다. 역대기 역사서의 경우 오늘 함께 읽은 9장 1절 말씀이 그러합니다.

예전에도 설명 드렸다시피 고대 중동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은 단순히 한 나라와 다른 한 나라 사이에 군사적 대결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의 신과 저 나라의 신이 벌이는 신과 신의 싸움, 즉 종교전쟁의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고대신화에서 왕이 전쟁에 나서기 전 반드시 신전에서 제사장을 통해 신탁(神託)을 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쟁 이해 아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겪은 가장 근본적인 구원 경험이자 민족적 정체성을 세운 사건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거대한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살이 하던 비천한 이들이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 아래 파라오로부터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얼른 데리고 나오시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 땅에 열 개의 재앙을 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의 죽음”입니다. 이들 재앙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각각 해당되는 대상들이 당시 이집트에서 섬기던 우상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때 이집트를 덮친 이들 재앙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만이 그 모든 신들의 헛됨을 폭로하는 참 신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는 그 노예들의 후손들로서는 커다란 자긍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각각 나뉘어졌습니다. 그리고 먼저 북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을 뿐만 아니라 민족혼합정책으로 민족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남왕국 마저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불에 타오른 예루살렘 성전을 뒤로 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러한 비극을 겪으며 민족적으로 공유한 감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패배와 부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로 유다사람들이 고향 땅에 다시금 자유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분명 그들 가슴 속에는 거대한 희망과 거대한 불안이 공존했을 것입니다. 대략 70년 만에 돌아온 예루살렘은 더 이상 예전에 알던 그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수 백 년 간 쌓아올린 신앙 유산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이고 어느새 자리 잡은 또 다른 원주민들이 날선 눈빛으로 그들을 경계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눈앞에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혼란하고 분주한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도 한 가지 중요한 과제를 수행하였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 손에까지 전해진 성경이 바로 역대기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앞부분에 계속 이어지는 족보에 있습니다. 무려 아담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족보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족보를 8장 까지 열거한 후 9장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현재 사람들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이름을 밝히기 전에 먼저 그들이 겪은 삶의 현실을 1절에서 명확히 선언합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역대기가 기록된 삶의 자리이자 이 책의 중심 주제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역대기 편집자는 유다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유를 “범죄함으로 말미암아”라고 명확하게 정리 하였습니다. 그는 그 험난한 민족의 비극을 회상하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헛된 원망과 불평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조상들과 자신들을 범죄를 겸허히 인정하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이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해줬습니다. 이것은 그가 민족의 지나온 역사를 차분히 돌아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며 그로 인해 생각의 틀을 넓혀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결코 건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보이고 펼치셨으며, 역대기를 비롯한 수많은 성경들은 바로 그 역사의 결과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 각자의 개인사를 가만히 되돌아 보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추억들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기억도 잠잠히 떠올려 보며 여러분의 한계와 실수들을 정직히 토로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의 순간들을 신실하게 하나로 이어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시야를 넓혀 여러분 가정의 역사를, 우리 부산진교회의 역사를 그리고 한국 교회의 역사와 이 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사와 세계 교회의 역사를 기회가 닿는 대로 공부하며 그 안에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며 오늘 우리의 발걸음을 의미 있게 내딛으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촛불 혁명이 마침내 지난 금요일에 결실을 맺어 헌법재판소 전원일치로 박근혜씨의 탄핵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훗날 역사는 분명 찬란하게 기록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의 감격이 크면 클수록 제 가슴 한 쪽이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이미 언론을 통해 들으셨다시피 탄핵 반대집회에 몇 몇 대형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역사적 시대인식은 이미 만연한 한국사회 안에 교회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가중시키며 몰락을 가속시킬 것이 분명 합니다. 

더욱 마음 아픔 사실은 이렇게 교회가 권력에 부합해 시대에 역행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부지기수 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4월 19일이 찾아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날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기념일입니다. 

그런데 이날 무너진 이승만 정권은 철저히 친기독교정권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정부는 아직 소수였던 한국 기독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많은 혜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에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독재를 옹호하며 불의에 침묵하고 기득권에 안주 하였습니다. 그 결과 4.19 혁명 당시 교회는 시위대의 격렬한 비난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부터 진보교계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의 주축을 이룬 것 역시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이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판단과 행동을 계속 이어갈 때 이 땅의 교회는 더욱 끝도 없는 몰락의 길을 걸을 것임을 냉철하게 명심하며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청년의 중요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역대기를 쓰는 그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9장을 마무리하고 저자는 10장에서 본격적으로 지난 역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사울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여러 훌륭한 자질을 보여줬고 처음에는 겸손함 까지 갖췄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점점 취하며 결국 추악한 폭군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역대기 역사서는 그런 그의 지난 과거를 과감히 삭제하며 곧바로 비참한 최후를 묘사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주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1~6절은 사울이 숨을 거둘 때의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오랜 원수인 블레셋과 길보아 산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전세는 완전히 블레셋에게 기울여서 전쟁을 지휘하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시야에 확보한 블레셋 군대는 맹렬하게 화살을 쏘아댔고 이제 그가 포로로 잡혀 수모를 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사울은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는 것보다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자기의 무기를 가진 자.” 즉, 최측근 부하에게 자기를 찔러 죽게 해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가까이 모셨던 주군에게 칼을 겨누고 숨을 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당연히 심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칼을 세우고 그 위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에 따르면 사울의 세 아들들은 물론이고 온 집안이 함께 죽임 당하며 사울왕가는 완전한 몰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또한 7~12절 말씀은 사울이 죽음 이후에도 그가 계속 겪은 모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갈보아 산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확인한 블레셋 군대는 먼저 사울의 옷을 벗겨 수모를 안겨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갑옷과 머리를 그들의 신전에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전쟁을 두 나라 사이의 단순한 군사 대결이 아니라 각 나라의 신과 신이 맞서 싸우는 종교전쟁으로 이해했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생각이 옳고 그른지 여부를 떠나 이 자체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매우 커다란 수모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역사가는 이 사건의 핵심을 13, 14절에 요약,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3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사울이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까닭은 그가 주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는 명확히 서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범죄”와 앞서 읽은 역대상 9장 1절에서 유다를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한 그들의 “범죄”가 모두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로 표기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 히브리어 원문에서 “죄”를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 개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 사용된 <마알>은 구약에서 상대적으로 적게 겨우 28번 밖에 쓰이지 않은 조금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낱말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주로 “불충실한 관계”를 지적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수기 5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탈선하여<우마아라> 남편에게 신의를 저버렸고<마알>

민수기 5장 12절 이하의 말씀은 남편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다른 마음을 품고 실행에 옮긴 아내에 대한 징벌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개역개정 성경은 “탈선” 그리고 “신의를 저버리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가 방금 말씀드린 <마알> 혹은 그것의 변형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이 낱말의 특징적인 의미가 바로 “관계의 배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역대기 저자가 본문 10장에서 사울의 비참한 최후를 자세히 묘사하며 그 원인이 바로 “범죄”라고 기록한 것은 그의 명확한 의도를 담은 표현입니다. 즉 이를 통해 단순히 사울이라는 한 개인의 죽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사람들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죄임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소중한 관계를 무시하고 배신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며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합니다. 물론 어떤 힘겨운 일을 겪었을 때, 그것이 전부 우리의 죄에 대한 주님의 심판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그렇게 늘 인과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도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겨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삶 속의 여러 시련이 혹시 범죄 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등이 아닌지 살펴보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큰 흠결을 가졌는지, 예배와 봉사 등의 종교적 의무를 게을리 했는지를 따지는 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입니다.


이해를 돕도록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선배가 저에게 갑자기 부탁하기를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마침 그 때 제가 섬겼던 교회 청년이라며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문제는 그 선배는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는 당연히 그 선배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고 그 이후로 그의 인격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그 선배의 여자 친구는 전혀 모릅니다. 일단 제가 그 분을 직접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또 굳이 직접 이야기하기도 곤란했으며 얼마 지나지않아 그 둘은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얼핏 듣기로 그 선배는 자기 여자친구에게 상당히 잘해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매너 있게 대한 것은 물론이고 기념일도 잘 챙겨 줬고 선물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그 여자친구에게 그는 좋은 남자친구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 기준에서 그는 최악의 남자친구였습니다. 겉으로 대하는 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다른 여자에게 더 마음을 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몰래 실천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유치한 비유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창한 열정과 대단한 헌신을 바라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길 원하십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더 이상 권력에 눈길을 뺏기지 않는 것입니다. 과도한 부에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 이 사회의 약자들을 겸손히 섬기고 사랑하여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 그대로 정의와 공평이 가득 흘러넘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어내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는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거룩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더욱더 온전한 회개의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의 지나온 삶과 우리나라와 세계 그리고 교회의 역사들을 차근히 되짚어 보며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전하고 이루어 나가기 위해 우리가 내딛어야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재점검하시길 소망합니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범죄로 말미암아 한 없이 멀어진 하나님과의 거리를 몸소 메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 달리시며 두 팔을 벌리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만이 우리를 더 이상 지난날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펼치신 미래를 향해 달려가게 하는 온전한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안에 안겨 오는 한 주도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참 생명과 회복의 하나님. 우리의 지나온 죄악의 역사를 되짚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에도 한결 같은 은혜로 함께 하신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바라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온전히 하며 믿음의 역사를 바로 세워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를 절대 버려두지 않으시고 항상 넓은 품에 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주님께서 계획하신 새로운 은혜의 길로 이끄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여러 모양의 억압아래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소중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봄이 왔지만, 아직 봄을 맞아드리지 못하는 이들을 휘감는 내면의 한기를 물리쳐 주시고 참 생명으로 일으켜 세우시어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높은 일교차 가운데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항상 지켜주시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공부와 일들 가운데 주님의 돌보심이 언제나 흘러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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