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세 번째 주일, 2016년 12월 11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이사야 35장 1~10절 "길이 되는 사람들"
기원
우리의 도움이시며 소망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이미 오셔서 전하신 구원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이 시간 드리는 대림절 예배를 통해 그 기다림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고 가다듬게 하여 주시고 침묵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 이사야 35장 1-10절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약함, 떨림, 겁냄
지난 8월 1일에 특전사로 입대한 반석이가 넉 달 간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휴가를 나와서 수요일에 심방을 했습니다. 그 때 이야기로만 들어도 훈련이 무척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된 시간들을 잘 이겨낸 그의 체력과 정신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본인도 길거리에서 누굴 만나 어떤 봉변을 당해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저로서는 그런 반석이가 참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대화중에 금세 느낀 것은 그의 “약함과 떨림”이었습니다. 특전사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부사관으로 임관해서 자대 배치된 후에도 역시 힘든 훈련들이 계속 이어지고 그것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원치 않게 육군 부사관으로 옮겨진다고 하였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제 마음도 참 무거워짐을 느끼며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깨달은 것은 모든 사람들은 몸의 건강 혹은 많은 돈과 높은 지위와는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거친 세상의 현실 한 복판에서 연약함을 느끼며 불안에 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언자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3절에서 4절 앞부분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을 가진, “겁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1차적으로는 앞선 34장에 기록된 에돔이 겪은 심판으로 인해 덩달아 어려움을 겪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집트와 앗수르, 바벨론과 로마를 비롯한 여러 제국들의 폭력과 억압에 의해 고난당한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며 온갖 시련과 좌절을 겪는 우리 모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무릎과 마음은 어떠하십니다. 늘 강하고 튼튼하며 용기로 가득하십니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실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도 대부분 이러저러한 이유로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으로 겁을 내며 살아가실 줄 압니다. 우리가 살아가기에 이 세상의 무게는 너무나 육중하고 거칠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예언자의 위로에 귀 기울어야 합니다. 4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예언자는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향해 가장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4절은 하나님의 “오심”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모든 억울함을 갚아주시고 구하시기에 그 모든 연약함과 떨림과 겁냄 속에서 감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오시는 걸까요?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4절 속 “하나님” 앞의 수식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너희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의 하나님,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한 번 설명 드렸듯이 구약성경 전체에서 제일 핵심적인 책이 바로 레위기이고 그 중에서도 19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비롯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 전체에서 단 하나의 장章만을 남겨둔다면 단연 레위기 19장을 꼽아야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일컫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야훼는 너희들의 하나님이다.” 입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러한 주님의 명확한 자기 선언이 레위기 19장안에 무려 11번이나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진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어떠한 가르침과 명령 혹은 율법을 내리기 이전에, 그 무엇보다 당신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깨닫게 하길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너무나 답답하고 힘겨워서 도무지 기도의 문장들을 이어가기 어려울 순간마다 “나 야훼는 너희들의 하나님이다.”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들인 <아니 아도나이 엘로헤켐>(אֲנִ֖י יְהוָ֥ה אֱלֹהֵיכֶֽם)을 가만히 반복해서 읊조리곤 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더욱 마음 깊이 새길 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올바른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늘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거룩하고 위대한, 사랑의 소유격 안에 있음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단한 성경지식을 쌓고 거창한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소중히 깨닫고 그 깨달음의 의미를 날마다 곱씹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이 땅에 이미 오셨고 또 다시 오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더 정확히는, 온 세상을 당신 안으로 품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오지 않으실 수 없는 강렬한 사랑에 이끌리고 계심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 사랑 안에서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세상 속에 오셔서 정의를 바로 세우시며 사람들을 온갖 죄와 악에서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의 변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실 때 이루어질 일을 묘사한 예언자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함께 본문 5-7절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오시는 날에 일어날 놀라운 일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그것은 몸의 변화와 자연의 변화입니다. 먼저 5-6절 전반부까지는 시력과 청각 그리고 다리와 발음 기관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각각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구절들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가장 먼저 기독교신문 하단 광고가 떠오릅니다. 거기에 “기적의 신유집회”, “불의 종 능력의 사자 OOO 목사 치유집회”등의 모임 공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른바 “신유”神癒 라고 불리는 병 고침의 이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 안에서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의학의 도움 없이 불치병이 낫는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본래 뜻보다 그 일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이 더 주목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서 병 고침 받는 장면을 인용하며 마치 이러한 이적 자체가 복음의 핵심인양 떠들곤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손을 대면 으레 병 낫는 일이 일어나는 양 으스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질병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이용하고 조종하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그릇된 모습임을 깨닫고 반드시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안에 기록된 여러 질환과 장애로부터의 회복,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 땅 가운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신 이유와 목적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씀드리면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생명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에 병이 걸렸거나 장애가 있다는 것은 곧 거기에 작은 죽음을 경험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길에 의해 그 병이 떠났다는 것은 또한 작은 부활을 맞이했음을 뜻합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병 나음”은 단순히 의학적인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 몸에 구체적으로 임한 이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의학이 매우 부실했고 병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던 그 시대 병자들이 겪었던 온갖 억압과 굴레에 대한 해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6절 하반부와 7절에 기록된 자연의 변화 역시 눈 여겨봐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사막에 강이 흘러 온갖 생물들이 풍성하게 뒤덮는 땅이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본문 1,2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역시도 명백하게 죽음이 물러가고 생명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이사야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화면에 있는 마태복음 11장 2~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내적 갈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 불안과 초조에 빠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요한은 자신에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행적들에 차츰 실망감을 느끼며 심지어 그의 정체성을 두고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당신이 정말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지금 그들이 듣고 보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게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행하심의 근거가 바로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온갖 질병과 장애의 회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없는 “가난한 자”를 향한 복음 전파를 넣으면서 그러한 치유가 가진 몸만이 아닌 전체적인, 온전한 “생명으로의 회복”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거듭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무엇으로 증명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길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전도지를 나눠주거나 치밀한 논리로 교리를 설명하는 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앞서 예고했고 주님께서 몸소 이루었듯이 우리가 복음에 근거하여 개개인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사회와 생태계를 생명으로 변화시키고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는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해방시킬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참된 구원자이심이 드러남을 분명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걷는 이들을 위한 길
이어서 예언자는 이렇게 생명이 회복된 세상 한 복판에 펼쳐질 길과 그 길 위를 걸어갈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8~1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가로 지르는 커다란 길과 그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그 사람들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8절 말씀을 보면 그 길은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속함을 입은”이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에 작게 인쇄돼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참고로 아시길 바랍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 작은 글씨로 표기돼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그것은 해당 단어가 구약 원문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좀 더 매끄럽게 하기 위해 부득이 첨가한 문구들은 그렇게 작게 기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8절의 “구속함을 입은”이란 표현은 원문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대신 해당 내용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 즉 그 길은 걷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김근주 교수 번역)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9절과 10절 모두 그 길을 걷는 이들의 특징을 가리켜 “구속”과 “속량”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도 8절을 번역하며 임의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에 따르면 그들은 그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즉, 종교적으로 구별되었기에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펼치신 드넓은 여정에 발걸음을 내딛음을 통해 자신이 이미 얻은 구속과 속량을 확인하고 고백하며,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길 위를 걸으며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막연히 주어진 길을 폐쇄적으로 다니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이 땅 곳곳에 있는 단절과 소외의 담을 부수고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길이 되어주시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오실 그날, 생명으로 회복된 세상을 완성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부디 그 약속을 붙잡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마음 깊이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길을 열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오늘 함께 읽은 이사야의 외침처럼 가난한 이웃들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그들의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떨쳐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하나님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주변의 어둠과 죽음을 조금씩 더 몰아내고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르심을 따라 생명과 회복의 길을 열어가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약함과 떨림과 겁냄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며 다시 오실 우리의 하나님을 맞이하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이루실 생명과 해방을 소망합니다. 그 일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 나가며 구원의 길을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를 언제나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
절망과 고독의 순간마다 찾아오시어 열어주신 은혜의 길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가난한 이들의 회복과 해방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저마다 말 못할 이유로 인해 약해진 손과 떨리는 무릎과 겁내는 마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참 생명으로 인한 치유를 몸과 마음에 경험하게 하시고 고민하며 내딛는 걸음마다 함께 하셔서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른 길이 되어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길을 걸으며, 길을 만들며 살아가십시오. 다시 오실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며 강하게 하십니다.
예담: 아멘! 쉽게 주저하고 포기했던 연약함을 고백하며 모든 불안과 염려를 내려놓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께서 “우리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정의를 이루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어서 오셔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다시 오실 주님을 생명의 길 가운데 맞이하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참고문헌
김근주, <이사야가 본 환상>(서울: 비블리카아카데미아, 2010)
김근주, <이사야가 본 환상>(서울: 비블리카아카데미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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