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4일 목요일

신명기 27장 11~26절 “저주의 의미”

2020년 6월 2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27장 11~26절 “저주의 의미”

11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저주’라는 말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거부감을 일으키는 단어입니다. 과학과 이성이 발달된 사회에서 저주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특히나 사랑과 평화를 전해야하는 종교와는 모순돼 보입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 자주 잘못 사용되었던 까닭에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도 일단은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제대로 안 내 더 큰 손해를 보았다거나 주일성수 안하고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주의 종에게 함부로 대들다가 암에 걸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 식의 괴담 같은 저주가 어느 정도 교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일정한 기능을 해 왔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폐해를 공동체에 안겨주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함께 읽은 본문처럼 성경에서 ‘저주’가 핵심 주제가 되어 거의 매절마다 등장하는 경우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을 배척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나의 감정과 경험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는 그대로의 말씀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1~13절은 본문의 배경을 보여줍니다. 11절에 나오는 ‘그 날’은 어제 읽은 1~10절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명령합니다. 그들은 큰 비석들을 에발산 위에 세우고 하얗게 바탕색을 칠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거기에 율법을 모두 새겨 놓아 온 백성들이 항상 주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지파를 둘로 나누어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지파는 그리심 산에 서서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지파는 에발 산에 서서 백성들을 저주해야 합니다.

14절 이하는 그렇게 요단강을 건너 에발산에서 선포할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줍니다. 그 첫 시작인 1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첫 번째 저주받을 대상은 바로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우상은 분명 주님께서 역겨워하시는 물건입니다. 그러한 우상들을 몰래 세우는 자들에게 임할 저주에 온 백성은 아멘으로 대답합니다. 이러한 15절 말씀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 1,2계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엄중히 마음에 새겨야할 진리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직접 거론되는, 고대 서아시아에 존재했던 말 그대로의 우상을 만들고 섬길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우리 곁에 스멀스멀 다가오는 이 시대의 우상을 분명히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탐욕을 올려놓는 것 자체가 곧 저주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내 입맛에 맞게 여러 모양으로 우상화 하는 어리석은 죄악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어지는 16절은 부모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합니다. 이 역시 자연스럽게 십계명 중 다섯 번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후에 펼쳐지는 저주 목록이 모두 사회적인 맥락에 대한 경고라는 점입니다. 즉, 온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다짐하는 저주 목록 중 처음과 마지막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종교가 아닌, 현실의 삶과 맞닿은 내용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대해 저주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하루하루 부딪히는 실제적인 욕망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 더 범위를 좁혀서 구약 성경의 신앙은 거룩한 종교생활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일상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증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까닭에 십계명 역시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과 사람들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으로 구성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십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판례로서 모세오경의 중심 역할을 하는 레위기 19장에는 약자보호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규정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레위기 19장 18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구약 전체를 요약하시며 신명기 6장 5절의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복음과 맞닿아 있는 구약 성경 복음의 핵심에 대한 정확한 통찰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본문의 나머지 저주목록을 살펴보겠습니다. 17절은 이웃의 경계표, 즉 토지 영역을 무너뜨리는 죄에 대해 저주합니다. 18절은 시각장애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대해 저주합니다. 19절은 이방인,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당시 가장 힘없는 약자들에 대한 불공정한 사법 처리에 대해 저주합니다. 20~23절은 공동체의 근간을 파괴하는 성적 타락에 대해 길게 저주합니다. 끝으로 24~25절은 억울한 폭력과 살인에 대해 경고합니다.

다시 강조해 말씀드리자면,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첫 번째 항목은 분명 올바른 신앙에 대한 종교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대부분은 이웃과의 실제적인 삶의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비록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유효한 울림을 안겨줍니다. 그런 까닭에 설교를 준비하며 묵상할 때마다 본문말씀이 저에게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노인들의 존엄한 삶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연약한 생존 토대를 짓밟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
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
이 사회의 가장 힘없는 이들을 차별하고 억누르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
꽃다운 아이들의 성을 착취한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모독하고 진실을 감추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

본문의 마지막인 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모세는 에발산 위에서 외칠 저주 목록을 마무리 하며 그 모두를 ‘이 율법의 말씀’으로 정리합니다. 즉, 본문에 기록된 저주들은 사사로운 감정의 결과가 아닙니다. 종교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진리로 백성들을 돌이키려는 또 다른 은혜의 도구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저주는 현대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역시 일단 귀를 닫고 싶어 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저주의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신 까닭은 그 저주가 영원한 파멸로 이루어지길 바라서가 결코 아닙니다. 죄를 짓기 전에 미리 깨우치고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신앙을 그저 듣기 좋은 위안의 도구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은 불안과 공포 가운데 하나님을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 속에 주님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도록, 헛된 욕망과 거짓과 폭력을 물리칠 수 있도록, 죄악을 향한 단호한 저주를 마음에 품고 스스로를 올바르게 일깨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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