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8일,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열왕기하 6장 1~14절 "진리와 섬김의 공동체"
1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3 그 하나가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가리라 하고 4 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6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7 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 8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어제까지 함께 읽은 열왕기하 5장은 악성 피부병이 걸린 아람의 군사령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중요한 지리적 배경은 나아만이 몸을 일곱 번 담가 회복을 경험한 “요단강”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인 6장은 동일한 장소인 요단강에서 일어난 또 다른 신비로운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곳이 비좁다며 요단강에 가서 나무를 베고 새로 거처를 만들자고 건의 하였습니다. 본문 1, 2절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1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이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사가 이끌고 있는 예언자 학교는 단지 지식만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동고동락하는 신앙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절에서 제자들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의 구약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거기서 당신을 만난 곳”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교육 현장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곳”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때때로 성막이나 성전의 “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어 사용을 통해 엘리사와 제자들은 함께 어울려 살며 배움과 예배의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예언자 학교가 비좁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시대는 예언자들로서는 비극의 시기라는 점입니다. 기근은 계속 되었고,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우상 숭배가 횡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와 중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분의 뜻을 삶으로 옮기는 예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힘든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언자로 자신의 삶을 드리며 훈련받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이 시대 이스라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말씀을 1차적으로 적용한다면 교회 위기 시대에 헌신된 신학생의 늘어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로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청년들이 늘어나길 기대하고 격려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본문을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예언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깊이 묵상하고 그 뜻을 저마다 삶의 현장에서 전하는 것은 결코 목회자들만의 역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고백하는 모두가 명심해야할 거룩한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삼덕교회가 보다 더 진리의 공동체로서 새롭게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길은 분명합니다. 바로 엘리사와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신앙 교육과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분주한 삶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교회의 여러 성경공부와 각종 기도회 그리고 주일예배에 더욱 마음을 쏟아 참석하시길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보다 유심히 살펴보며 애정을 쏟아야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학교입니다. 우리 삼덕교회,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앞날이 바로 교회학교에 있다는 사실을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교회 교회부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 학교처럼 신앙교육과 예배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섬기시는 목회자들과 선생님들에게 더욱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언자 학교 확장 공사를 위해 요단강에 간 제자들은 거기서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5절 제가 읽겠습니다.
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한 제자가 강가에서 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질을 하다가 그만 도끼를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쇠.도.끼”라고 의역하였지만 원문에는 그냥 “쇠”라고 적혀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 도끼 전체가 아니라 도끼머리만 물에 빠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매우 값비싼 금속인 “쇠”를 잃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잘 안 와 닿을 수 있지만, 엘리사가 활동했던 주전 9세기 철을 만들기 위한 광물을 구하고 그것을 제련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철은 아무나 쉽게 가지기 힘든 굉장히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오늘날 반도체와 비슷합니다.
그런 희귀한 쇠도끼를 어느 제자가 용케 빌렸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 지을 예언자 학교 건물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 도끼를 잃어버림으로써 그의 꿈은 금세 비탄과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주인이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해당되는 제자는 물론이고 예언자 공동체 전체에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눈여겨 봐야하는 장면은 엘리사가 지도자로서 보인 성숙한 태도입니다. 제자의 실수로 말미암아 지금 엘리사에게도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이 일이 있기까지 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요구해서 시작한 공사입니다. 게다가 도끼역시 제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엘리사는 그 제자를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꾸짖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도끼를 빠뜨린 위치를 물어보고 거기에 나뭇가지를 던졌을 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이 임하여 도끼가 다시 떠올라 무사히 건져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를 묘사한 6절은 엘리사의 이름보다 먼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릅니다. 공동체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묵묵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성숙한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 공동체는 날마다 생기 있게 살아 숨 쉬며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위기와 갈등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실수를 함부로 지적하기 전에 함께 책임을 짊어지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공의대로 날카롭게 세워야 합니다. 이를 결코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화평과 선을 이루는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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