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2일 일요일

요한복음 12장 20~26절 “죽지 않는 죽음”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2018년 7월 20일, 목사 정대진
요한복음 12장 20~26절 “죽지 않는 죽음”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
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몹시도 무더웠던 지난 한 주간도 고단한 세상살이에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사랑을 잊지 않고 찬양과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바야흐로 가장 대구다운 계절이자 대구의 자존심인 “여름”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무더위에 지쳐 잠시 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겨울과 봄이 있었습니다. 그 사계절의 흐름 속에 여름이 찾아왔고, 머지않아 떠나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정리한 시 한편을 소개 하고 싶습니다.

봄날 입하

- 이문재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여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초록이 초록에게 져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실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네 번째 연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에게 여름이 찾아온 것은 봄의 죽음 덕분입니다. 죽은 척하지 않고, 죽은 흉내를 내지 않고, 실랄하고 적나라하게 죽어서 죽었습니다. 그 결과 여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한 여름의 작열하는 햇살은 비록 잠시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과실을 영글게 하여 가을 수확을 이루는 생명의 기적을 낳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참된 죽음과 생명이 가지는 역설적인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분 주위를 둘러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히 서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과 부패한 제사장 권력에 의해 끔찍한 수탈과 억압을 당하며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열심히 살아남으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라는 조금은 차갑고 냉정한 말씀을 하시며 제자도의 필수 덕목으로서 “자기 죽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구마저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현실을 도피하는 자폐적인 경건 훈련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죽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첫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덜 사랑하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자기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밀알 비유’의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명백히 대조되는 두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개역개정 성경에 각각 “생명”과 “영생”으로 주로 번역되는 <프쉬케>(ψυχη)와 <조에>(ζωη)입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가 가지는 보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작년 부임 설교 때도 나누었던 내용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부득이 중복되는 점을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먼저 헬라어 <프쉬케>는 이 땅에서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명을 뜻합니다. 반면에 <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곳에서 영원히 소유하는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프쉬케>와는 대조되는 하나님만의, 하나님 고유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를 토대로 25절 후반부를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한한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부활의 참 생명’<조에>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미워하는’으로 번역된 원문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덜 사랑한다.’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과 일상을 가볍게 여기거나 멸시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의 유한한 생명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덜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 대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호흡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학생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자녀가 보다 더 공부에 매진하도록 여러모로 관심을 쏟는 것은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입시와 학벌이 결국 덜 사랑해야할 대상임을 깨닫지 못한 채 정작 참으로 중요하게 여겨야할 신앙교육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일부 교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무척 안타깝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불편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돈을 벌어 재산을 모아두는 것 역시 분명 유의미한 일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는 대신 돈의 정신에 지배당한 채 황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헛된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지금껏 쌓아온 삶의 모든 성취를 결국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야 마는 TV 속 몇몇 어른들의 모습들은 우리의 가슴을 쓰라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마땅히 덜 사랑해야할 “이 땅위의 생명”을 진정 사랑해야할 “부활 생명”보다 더욱 사랑한 끝에 얻은 안타까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의 여러 욕망들 자체는 충분히 긍정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자녀들이 억지로 표백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더욱더 당신만의 진정한 생명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가득한 욕망의 호흡을 덜어내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공에 흐트러지는 허무한 한숨이 아닌 만유를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옮기는 참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굳건히 다짐해야 합니다.


둘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는 자신들의 다신교와는 전혀 반대되는 구약의 유일신 사상에 매료되어 개종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역시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몇 몇 제자들을 통해 노력하였습니다. 주님 곁에는 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 분을 가까이 뵙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직접 찾아뵈려 하지 않고 제자들의 도움을 빌리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당시 매우 적었던,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으로서 온갖 손해와 어려움을 감수 하였음에도 유대인들로부터 지금껏 철저히 배척당하며 뼈아픈 모욕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멀리서 힘들게 찾아온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흔히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는 바깥마당에서 매번 출입금지 명령을 받을 때마다 그 수치와 굴욕은 더욱 날카롭게 그들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역시도 유대인이시기에 혹시나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한 굵은 경계선을 가지고 계실 거라 지레 짐작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주님의 제자들 중 그리스 문화와 언어에 가장 친숙한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뵙고자 하는 그들의 부탁을 접하며 뜻 밖에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 이야기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수차례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씀은 본문 바로 앞의 19절에 기록된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라는 바리새인들의 외침과 연결되어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 주님의 영광은 결코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거나 혹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드넓은 영광에 대적하며 여러 기괴한 모양의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주변의 수많은 장벽들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미생”이란 제목의 만화와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많은 화제와 인기를 불러 모았습니다.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때부터 프로바둑기사가 되려고 준비하며 남들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꿈을 포기했을 때 결과적으로 그는 고졸검정고시 출신에 아무런 경력도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여곡절 끝에 어느 대기업 무역회사의 계약직 신입사원이 되었습니다. 드라마 곳곳에는 그가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고졸출신이라는 이유로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 동료사원들에게 온갖 무시와 천대를 당하는 가슴 아픈 내용들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까닭은 우리 사회 안에 이런 ‘미생’들을 향한 차별이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학벌 외에도, 외모와 집안 배경, 출신 지역과 주거환경 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편을 가르고 무시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배제와 혐오의 문화를 헤치고 나아가 전혀 다른 따뜻한 시선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건네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유치한 조건과 얄팍한 모양새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담긴,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우리 곁에 두신 소중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철저히 거짓이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심각하게 갈라놓았던 그 모든 담과 벽을 무너뜨린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임음을 믿는다면, 또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포용하고 품는 것임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인 공교회임을 사도신경을 통해 가슴 깊이 고백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의 온갖 폭력과 억압의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임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큰 울림을 안겨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설교를 매듭지으려 합니다. 그는 1856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네 살 때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 했습니다. 그리고 12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 무려 열 명이나 되는 많은 동생들을 돌보며 일찍부터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한 끝에 멜버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코필드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후 7년 만에 명문사립학교로 발전시키며 큰 명성을 얻었고 경제적 안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인도로 가려 하였지만, 어느 날 조선선교의 필요성과 급박성을 호소하는 글을 읽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89년 10월 2일 이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금세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지고 선교사공의회의 서기로 임명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훗날 언더우드는 그를 가리켜 “열정적이고 아주 탁월하고 경건한 사람,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가장 소중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저라면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아직 여러모로 미흡하지만 조금씩 근대화 되며 외국 문물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고 말 통하는 동료들도 제법 있는 서울에 계속 남아 선교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택이고 그 누구도 감히 비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굉장한 희생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과감히 더욱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선교사들이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선교지를 찾기 위해 기나긴 도보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3주간의 무리한 여정 때문에 그만 폐렴과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부산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날인 1890년 4월 15일, 불과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바로, 얼마 전 국내성지순례로 방문했던 부산진교회 앞마당에 자리한 기념비의 주인공, 죠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입니다.

그의 죽음은 촉망받는 유능한 젊은 교육가로서 고향에서의 안락함 삶을 포기하고 선교지에서의 불편한 삶을 선택한 개인적이자 내면적인 희생의 결과였습니다. 또한 당시 서양인들의 눈에는 지극히 미개하고 무지몽매 했던 조선인들을 차별 없이 품고 섬기며 하나님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자 외적인 섬김의 마무리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너무나 이른 나이에 허무하고 초라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땅에 떨어져 묻힌 하나의 밀알과도 같았던 그의 삶은 절대로 먼지처럼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데이비스의 예상치 못한 사망 소식은 그를 파송한 고국에 큰 충격을 안겨주며 조선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90년 5월 7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우리가 한국에 보낸 첫 번째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을 원한다. 그의 열성적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신앙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 등은 새로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스데반이 일찍 부름을 받고 안식과 보상을 받았던 것처럼 데이비스를 분명하게 축복하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그의 정신을 알리고 그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의 옛 형제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광의 왕관을 받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결심 그대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부인 연합회를 주축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조선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분명 죽었으나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 삼덕교회가 바로 그 생생한 결실 중 하나 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데이비스라는 위대한 하나의 밀알을 가슴 깊이 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더욱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밀알 비유”는 단지 그들을 향한 하나의 명령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이후 골고다 언덕위에서 당신께서 몸소 행하실 희생에 대한 엄중한 예언이자 사명의 확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허락하시려 기꺼이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을 치열하게 끌어안으시고 철저히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 죽지만,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어서 죽는 기적, 그리하여 그토록 실랄하고 적나라하게 죽어서 눈부시게 다시 사는 생명의 복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따라 참으로 살기 위해 죽는, 더 나아가 살리기 위해 죽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참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삶을 한 알의 썩어져 가는 밀알로 드리기 원합니다. 저열한 욕망보다 부활 생명을 더욱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차별 없이 품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결실을 풍성히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내적이고 개인적 죽음과 외적이고 사회적 죽음이 교차하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참으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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