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9일,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복음 7장 25~36절 "예수님 바로 알기"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님은 누구실까요? 우리의 신앙 여정은 어쩌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가운데, 그리고 성경 묵상과 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당시에 주위를 둘러싼 무리들이 그분을 어떻게 이해 했느냐 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을 둘러싼 숱한 오해들을 성경에서 쉽게 발견합니다.
특별히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경우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두 가지 중대한 잘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인성에 집착하여 일어난 왜곡입니다. 27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이 말씀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절대로 그리스도일리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근거는 다름 아닌 주님의 출신 지역, 즉 ‘갈릴리’ 때문입니다. 이미 잘 아시듯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역 바로 위쪽에는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여기는 과거 북이스라엘 왕국이 위치해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신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후 민족 혼합 정책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의 핏줄이 함께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유다 사람들 눈에는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신 고향인 갈릴리는 분명 유다 지역과 동일한 이스라엘이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유다 주류 사회에 의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바로 위편에 위치해 있었기에 문화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 탓에 갈릴리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천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의 생각에 갈릴리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출신지일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27절의 발언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들이 ‘예루살렘 사람’이라고 25절에 정확히 언급합니다. 그 의도는 분명합니다. 비천한 위치에서 온갖 설움을 겪던 갈릴리와 명백히 대조되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득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도시는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상류층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특권은 본능적으로 변방의 사람들을 더욱 멀리 밀어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참 사람으로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신 그 위대한 섬김과 희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마음에는 출신지를 기준으로 한 지극히 유치한 계급 구별과 치졸한 차별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바로알지 못하고 주님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신성에 집착하여 일어난 왜곡입니다. 3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예루살렘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상류층과는 대조되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 자체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야할 것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은 이유입니다. 바로 ‘많은 표적’입니다. 그들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이나 있던 사람을 비롯한 여러 병자들의 치유, 오병이어 사건 등을 직,간접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이렇게 수근거립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진짜 그리스도가 온다 할지라도 저 사람보다 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을거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절대 그리스도일 수 없는 확고한 부정적인 기준이 있었다면,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갖춰야할 분명하고 우선적인 긍정적인 기준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려하고 많은 기적입니다.
물론 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끝없는 수탈과 억압 속에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당시 백성들로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바라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깊은 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을 믿고 치유를 경험한 것을 계기로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간증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적에 담긴 예수님의 신적 권능만을 바라본다면 역사 속에 참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데 있습니다. 단지 기적만을 일으키려 했다면 구태여 주님께서 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열광만을 얻고자 했다면 힘겨운 고난을 겪으신 끝에 죽임 당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적에 열광했던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정작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은 우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소원을 채워주는 초월적인 영웅이기만을 바랄 뿐 주님이 참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본문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정반대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끔찍하게 오해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살았던 소수의 기득권층은 갈릴리라는 예수님의 출신 지역에 집중하며 주님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외면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반면 각양각지에서 몰려든 다수의 빈민들은 예수님의 이적만을 주목하고 그분을 믿는다며 환호 하였지만 참 사람으로 살아가시며 겪은 고난의 의미에는 무관심 합니다.
이처럼 두 무리의 사람들의 여러모로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일치합니다. 바로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멋대로 왜곡하고 재단한 것입니다. 다만 각자 서 있는 위치가 달랐을 따름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잃을 게 많았고, 많은 백성들은 잃을 게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스스로에게 엄중히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다를까요?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함부로 규정할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죄성과 어리석은 탐욕이 진리 앞에 무릎 꿇기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유혹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 참된 주님을 올바로 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 스스로 밝히는 당신의 정체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먼저 28~2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이어서 33~34절 함께 읽겠습니다.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 넉 절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 받으셨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신 분, 신성과 인성의 위대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참 사람으로 오시며 살아가셨으나 참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고 다시 그 분 곁으로 되돌아 가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 드리면 너무나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한 인격 안에 진정한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는 것은 도무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교리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인정받기까지 오랫동안 교회는 치열한 논쟁과 혼란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일단 제 능력 밖의 일이고 이 새벽에 적절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 나름대로 이렇게 풀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시며 멀어지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분입니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들릴 듯 들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참 사람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손길과 음성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과 위로를 안겨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와 소원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없는 듯이 계신 사랑으로 때때로 여백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십니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때론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과 분노를 안겨줍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드넓은 뜻을 연약한 우리는 도무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침내 바라보아야할 복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서 곳곳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 나라는 다름 아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 세상 가운데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만을 바라보아서도 안 되고 부활 가운데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주목해서도 안 됩니다. 둘 모두를 온전히 아울러야 합니다. 그 모두를 함께 품은 참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냄 받으셨고 그 진리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하나님 우편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 복음만이 혼란과 좌절의 시대 속에서 우리를 살리는 참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아 이 땅에 참 사람으로 오시고 다시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가 영광 가운데 계신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주님을 나의 탐욕으로 일그러뜨리려는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당장 경험하는 감정적인 신앙 경험과 극적인 체험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찾아오는 하나님의 잔인한 침묵 속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나아가 진정한 복음의 생명력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주님과 동행하며 진정한 은혜와 평안을 누리는 오늘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씀을 통해 바로 알기 보다는 어리석은 욕심과 결핍으로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려 했던 미련한 죄악을 회개합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신 주님을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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