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일 월요일

마태복음 18장 1~10절 "어린 아이처럼"

2019년 3월 19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18장 1~10절 "어린 아이처럼"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오늘 본문은 일 년 중 특정한 주일에 주로 자주 읽는 말씀입니다. 바로 ‘어린이 주일’입니다. 성경 안에서 어린이의 특징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 여기 보다 더 직접적으로 분명히 언급한 구절은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본문을 읽을 때 단지 어린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여기에 담긴 더 크고 넓은 진리를 놓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 어린이를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시게 만든 제자들의 질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절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지를 물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질문을 함축적으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만 보았을 때는 정확한 의도를 깨닫기 힘듭니다. 하지만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궁금증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다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마가복음 9장 33~34절 읽어드리겠습니다.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지내는 집에 도착해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닙니다. 제자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누가 큰지를 두고 거칠게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지 물었을 때, 그 대상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두고 제자들이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천국’에 대해 철저히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줄거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18장 이전에 이미 두 차례나 당신이 겪으실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귀에는 그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또 다른 다윗의 모습으로 자신들에게 나타나길 기대했습니다. 그 분이 용맹하게 군대를 이끌어 로마 제국을 물리쳐서 강력한 왕국을 세우길 몹시 고대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라는 이름의 남자가 온갖 화려한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분이 자신들을 제자로 불렀습니다. 심지어 본문 바로 앞 장인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찬란한 광채에 둘러싸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까지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현장에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물론이고 그 얘기를 전해 들었던 다른 제자들의 마음까지 무척이나 고동쳤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젠가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를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곁에서 누가 권력을 더 많이 차지 할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대표해서 내가 가장 많이 대답한 거 알지? 내가 당연히 국무총리를 맡을거야’, ‘내가 그동안 누구보다 먼저 온갖 궂은일을 다했으니까 최소한 장관 자리쯤은 주지 않겠어?’, ‘내가 주님을 따르느라 얼마나 많은 기회와 재산을 포기한 거 알지? 적어도 거기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았으면 좋겠어.’ 이런 식의 대화를 하며 서로 옥신각신 했을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 한 복판에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그 시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천국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이 세우고자 했던 천국은 힘으로 다스리는 곳이지만 예수님께서 외치신 하나님 나라는 겸손과 온유로 섬기는 다스림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천국은 보다 강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였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힘을 내려놓고 더욱 낮아지는 헌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으로 ‘어린아이와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순진무구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휘감은 탐욕과 정반대 의미의 무력함과 결핍을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 연구에 따르면 어린 아이를 사회의 양육과 보호가 특별히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보통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물론 자신의 자녀에 대한 부성애나 모성애는 성경에도 기록될 정도로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이를 대하는 사회적 태도는 고대와 현대가 완전히 다릅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혁명 혁명 당시 불과 6~7세의 어린 아이들도 공장에서 휴일도 없이 하루에 무려 12시간 이상씩 일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60~70년대 산업화의 열기 속에 가난한 시골 출신의 어린 소녀들이 공장에 취직해 밤새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동생들을 공부시키며 집안 살림에 보탰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경제 발전은 바로 그러한 어머님들의 눈물겨운 희생 덕분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아동 노동이 심각한 국제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루에 한 끼도 겨우 먹기 힘든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고대 서아시아 사회에서 어린이들을 마냥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것은 사치스러운 감정이었습니다. 그 시대 어른들 눈에 비친 아이들은 밥은 축내면서 일은 제대로 못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제자들이 꿈꾸었던 왕실의 권력자들, 사회의 기득권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라’는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가벼운 조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신앙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탐욕을 예리하게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서 동고동락한 제자들조차 쉽게 포기하지 못했던 욕망을 내려놓고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따르라는 촉구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분명히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5절과 10절 제가 읽겠습니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길은 분명합니다. 바로 어린 아이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주위의 작은 자들을 영접하고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함부로 무시당하고 오해와 편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알량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며 누군가를 멸시한다면 설령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린 아이와 같은 작은 자를 영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행동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부디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강점과 세속적 성취만이 아니라 내 안의 어린 나, 지난날의 결핍, 너무나 미숙하고 실망스러웠던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따뜻하게 끌어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 모두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 모든 한계와 무능과 좌절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에 의지할 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여 자신을 끝없이 확장하려는 어리석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와 온전히 마주해야만 소중한 이웃을 경쟁자로 여기며 짓밟고 오르려는 탐욕을 물리치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부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참으로 낮아져야 진실로 높아지는 천국의 신비를 삶으로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