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일 월요일

마태복음 18장 21~35절 "불쌍히 여기며"

2019년 3월 21일, 목,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18장 21~35절 "불쌍히 여기며"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 못지않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다스림을 일상 가운데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비유로 곧바로 시작하지 않고 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21절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주님께 용서에 대해 물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갈등과 다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종종 심각한 상처를 받고 아파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용서’는 인간으로서 실존의 문제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태도와 연결돼 있습니다.

베드로는 누군가 자신에게 죄를 저질렀을 경우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지 물으며 일곱 번이면 충분한지 질문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누군가를 세 번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지난 경험을 떠올려 보면 한 번의 용서도 어려울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물며 세 번의 용서의 두 배에다 하나를 더 추가한 일곱 번의 용서는 보통사람의 아량으로는 쉽게 하기 힘든 굉장한 결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굳이 계산하면 490번이지만 사실 숫자는 그리 의미가 없습니다. 완전수인 7과 70의 곱셈은 결국 제한 없이 무조건 계속 용서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후 주님께서는 쉬운 이해를 위해 어느 임금의 종을 비유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23절에 “천국은 무엇 무엇과 같으니”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비유가 시작될 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식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야기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분명 ‘하나님 나라’임을 알려줍니다. 특히나 본문처럼 ‘임금’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시며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속 ‘임금’에 하나님을 대입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날 그 왕이 종들과 ‘결산’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종’은 문맥상 ‘노예’라기 보다는 신하를 가리키는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결산 과정에서 왕은 신하 하나가 자신에게 만 달란트 빚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 신하가 왕에게 돈을 꾸었다고 보기 보다는 비리를 저질러 몰래 착복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달란트’는 복음서에서 매우 친숙한 무게 단위이자 화폐단위입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전문기술자 30명의 연봉에 해당되는 상당한 거액입니다. 게다가 유대 지방을 통치했던 헤롯왕이 로마제국으로부터 받은 연봉이 8백 달란트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만 달란트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즉 490번의 용서가 가리키듯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무한대의 금액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따라서 임금은 빚진 그 사람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포함한 온 가족을 노예로 팔아 도로 갚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역시 당시 채무와 관련된 현실적인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람은 궁궐을 출입하는 신하로서 누렸던 상류층의 지위와 재산을 한 순간에 잃고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26절에 보면 종은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엎드려 애걸하였습니다. 여기서 ‘참으소서’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신약 원전에서 하나님의 인내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러한 어휘 사용을 통해 예수님은 이 비유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 간절히 구한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없던 걸로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불쌍히’에 해당되는 헬라어 역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졌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진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그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있거나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위대한 은혜로 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삶 속에서 반드시 명심해야할 구원의 감격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속의 종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거대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기쁨과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자 금세 화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런데 일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기 때문에 백 데나리온은 백 일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분명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갚기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은 아닙니다. 종이 임금에게 빚졌던 만 달란트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금액입니다. 게다가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남이 아니라 동료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동료가 한 말입니다. 29절 제가 읽겠습니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그 종이 앞서 임금에게 했던 행동과 요청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었을 때 정반대의 태도를 보입니다.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주저 없이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 원인은 분명합니다. 철저히 나중심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호의는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당연히 여기면서도 정작 다른 사람에게 조금의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할 뿐 공동체는 무시하고 주위 사람에게 전혀 공감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가 행한 악행을 곁에서 목격한 다른 동료들이 왕에게 찾아가 이 모든 일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왕은 분노하며 그 종을 원래대로 감옥에 집어넣고 빚을 갚게 했습니다. 이 때 왕이 꾸짖으며 한 말을 우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32~3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은 그 종이 보인 모순을 통렬하게 질책합니다. 자신은 무한한 빚이 면제되는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 정작 자신의 동료에게는 그 은혜의 일부도 베풀어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비유가 뜻하는 바를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 모두가 비유 속, 종처럼 한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받았기에 이것과 비교될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막상 이 비유의 교훈을 실천하기도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이 한두 명씩은 있으실 겁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본문에서 더욱 주목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불쌍히 여김’입니다.

용서가 힘들수록 가져야할 마음 태도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가 옳아서가 아닙니다. 충분히 반성했거나 용서받을 만한 자세가 돼 있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완고하고 오만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그가 불쌍한 존재여서 용서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용서의 시작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여전히 다른 약한 사람들의 목을 붙잡고 모욕을 주며 폭력을 휘두른다 할지라도 실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혼이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가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나에게 죄의 빚을 진 사람의 내면을 불쌍하게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와 정확히 마주하게 됩니다. 세상에 피해자이기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인을 향한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통로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조금씩 실천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용서로 말미암아 지금 이곳에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참여하며 그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진실로 불쌍히 여기시며 살 길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일상 가운데 풍성히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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