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0일 토요일

마가복음 5장 21~24, 36~42절 “느리지만 늦지 않는”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2019년 11월 29일, 목사 정대진
마가복음 5장 21~24, 36~42절 “느리지만 늦지 않는”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우리는 모두 동일한 인생의 시간 위를 지나갑니다. 하지만 저마다 거머쥐는 시간의 무게와 속도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가령 똑같은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옆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시간의 질량은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의 시간은 무척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아픔과 절망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고 생각 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이왕이면 손쉽게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에 자신을 담그기 원합니다. 반면 고통을 남기고 천천히 지나가는 시간으로부터는 가급적이면 빨리 벗어나길 바랍니다. 

하지만 무겁고 느린 시간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닥쳐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순간, 그 고통스런 순간의 무게를 더욱 늘리고 지체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렇게 만드는 사람을 눈앞에 둔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는 그 어떤 누구보다 ‘느리고 무거운 시간’ 위를 지나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바로 ‘야이로’ 입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지금 그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가 갈릴리 청년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간청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 전체의 줄거리에서 보면, 주님께서 귀신들린 거라사 지방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가 부둣가에서 마음 졸이며 애타게 기다린 결과 일어난 일입니다. 회당장은 상당한 지성인이자 행정가로서 유대인 마을 공동체의 중심을 차지하며 동네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 앞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체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맞닿아있는 사랑하는 딸의 끔찍한 고통 앞에서 자신이 그간 힘겹게 쌓아올린 많은 지식과 재산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잔인한 현실을 처참하게 깨달은 아버지가 선택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저 엎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야이로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의 딸을 향해 함께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안도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향하던 야이로 앞에 엄청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하염없이 몰려들어 딸에게로 향하는 걸음이 더욱 늦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초조하게 예수님을 기다렸던 때는 물론이고, 커다란 군중 사이를 어렵게 헤쳐 가며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들이 그에게는 과연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그가 지금껏 살아온 그 어느 시간 못지않게 느리고 무겁게 그의 목을 조여 왔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야이로의 간곡한 부탁은 지금 자신을 휘감는 이 고통스런 시간의 속도를 제발 좀 빠르고 가볍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그의 가장 우선적인 기대는 사랑하는 딸이 더 이상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집에 도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의 소망을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매우 뜻 밖에, 그리고 무척 불쾌한 행동을 하십니다. 가던 걸음을 갑자기 멈추신 주님은 뒤 돌아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얘길 곁에서 들은 제자들은 그저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줄곧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야이로가 한 말과 행동들을 지켜 본 그들 역시도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힘겨운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들로서는 부유한 야이로의 딸을 예수님께서 얼른 고치셔서 그 집에 머물며 모처럼 편히 쉬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기대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적을 사용하셔서 야이로의 집까지 순식간에 이동 하지는 못할망정 너무나 느긋해 보입니다. 그 와중에 지금 뻔히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상황에 누가 자기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되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퉁명스런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걸음을 멈추신 채 계속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와 땀으로 얼룩진 웬 초라한 몰골의 여인 하나가 온 몸을 바들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피를 몸 밖으로 계속 쏟아내는 병을 무려 열두 해 동안이나 앓았습니다. 그 병은 율법적으로 ‘더러운 병’으로 판명된 것이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한 소중한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몸은 물론이고 마음에도 큰 고통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의사들을 만나며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재산만 다 낭비할 뿐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그 분의 옷 끝만 건드려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 같은 왠지 모를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레 파고들어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놀랍게도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한없는 고통에 빠뜨렸던 병으로부터 치유와 해방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얘기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며 평화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여인이 자신을 오랫동안 옥죈, 느리고 무거운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없는 평화를 만끽한 바로 그 순간, 곁에서 끝없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굴까요?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한시 바삐 집으로 가기 원했던 야이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바라던 데로 조금이라도 서둘러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시기는커녕 웬 꾀죄죄한 여자와 길가에 서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 갔을까요? 가뜩이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시간의 무게가 얼마나 더 무겁게 느껴졌을까요? 그런데 그런 그의 실낱 갔던 희망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는 결정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3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의 집에서 심부름 보낸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회당장님, 따님이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을 헛걸음 시키지 마시고 그만 돌려보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금 야이로와 같은 상황이라면 마음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우리를 한 없이 괴롭게 만드는 느린 시간의 육중한 무게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그 앞에 어렵게 엎드렸는데 그러한 절망을 해결하시는 주님의 걸음이 너무나 더디시다면, 아니 멈추어 계시다면 그런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시겠습니까? 그 때, 주님을 향해 쉼 없이 솟아오르는 분노와 원망은 차마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있는 야이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렇게 무심한 말씀을 던지신 후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세 명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태연하게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숨을 거둔 채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어 마침내 그녀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를 힘겹게 하며 절망 끝으로 몰아넣었던 무겁고 느린 시간에서 마침내 벗어난 은혜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몹시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간 ‘지금’, 그 아이는 분명 ‘죽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소녀가 죽은 게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고, 즉 살아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조문객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대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소녀가 살아나는 것은 분명 그 때 이후에 펼쳐질 ‘나중’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 사건을 마치 ‘지금’의 현실처럼 말씀하신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은 사람들의 시간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딸에게 얼른 오셔야 지금껏 자신을 억누르던 느린 시간의 무게에서 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걸음은 그의 바람과 달리 너무나 느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느끼기에 몹시 더디어 보이는 주님의 발걸음은 절대로 늦지 않고 가장 정확한 때에 그의 딸에게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의 걸음 속도와는 상관없이 이미 죽음에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초조함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절망에 허덕인 한 가련한 여인이 들려주는 가슴 아픔 이야기에 여유롭게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가장 은혜롭고 정의로운 시간의 매듭을 이어가심으로, 고통 받고 상처받은 이들을 돌보시고 구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무겁고 느린 시간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가볍고 빠르게 지나가기 만을 바랍니다. 물론 이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소원입니다. 그리고 야이로가 예수님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 엎드렸듯이 꼭 필요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속도를 내야합니다. 어리석은 무책임과 태만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라는 시간의 속도와 무게에 그리 연연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또한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때때로 우리에게 힘겨운 고통을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해 섭섭함을 넘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한 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느린 시간의 정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 개인의 삶속에서 어떤 희망을 기다리십니까? 또한 가정에서 속히 벗어나길 원하는 고통의 순간은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 여러분의 공동체를 눈물 겨운 아픔으로 가득채운 절망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입시, 취업, 결혼, 출산 등 여러 현실의 문제와 수없이 많은 갈등과 다툼 속에서 마치 본문 속 야이로처럼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시간표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까닭은 자녀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내버리셨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속도를 무시해서도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저마다에게 허락하신 삶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게 매듭지으실 것을 약속하시고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시간의 무게와 속도를 가장 적절하게 날마다 이끌어 가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이 세상에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각기 다른 빛깔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 촘촘하고 위대한 시간의 모자이크를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함께 이루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제 아무리 버겁고 더딘 나날의 무게를 온 몸으로 지탱한다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 안에서, 시간을 넘어 살림의 손을 내미시며 비록 느리지만 절대로 늦지 않게, 못 자국 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시간의 길 위를 걸어가지만 저마다 짊어지는 시간의 무게와 속도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세월의 높낮이를 어우르시며 믿음의 자녀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손과 발을 항상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삶과 가정과 공동체를 덮쳐오는 모든 두려움을 믿음으로 맞서 용기 있게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온 마음 다해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때때로 주님의 느린 발걸음에 너무나 마음 졸이고 심지어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분명 느리지만, 결코 늦지 않고 우리를 때마다 돌보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나날들을 주님의 시선으로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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