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덕교회 주일예배, 2019년 12월 22일, 목사 정대진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20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영성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내면의 성숙을 위한 고독의 길을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이 문장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네 개의 영어단어, doing nothing, being useless를 말하곤 합니다. 해당되는 단락을 자세히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긴급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 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들에 도움이 되기보다 종종 방해가 되곤 합니다.
We always seem to have something more urgent to do and ‘just sitting there’ and ‘doing nothing’ often disturbs us more than it helps.
하지만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쓸모없이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은 모든 기도의 핵심에 속합니다.
But there is no way around this. Being useless and silent in the presence of God belongs to the core of all prayer.
처음부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무질서한 소음을 더 크게 듣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In the beginning we often hear our own unruly noises more loudly than God’s voice. This is at times very hard to tolerate.
(중략)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But slowly, very slowly, we discover that the silent time makes us quiet and deepens our awareness of God.
그러고 나서 곧 우리는 분주함으로 빼앗긴 순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Then, very soon, we start missing these moments when we are deprived of them,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점점 더 많은 침묵 속에 이끌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곳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내면의 추진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and before we are fully aware of it an inner momentum has developed that draws us more and more into silence and closer to that still point where God speaks to us.
저는 오랫동안 신앙의 성장을 위해, “doing many-thing, being use-full”,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오해 했습니다. 기도는 무조건 크고 오래 해야 되는 줄 알고 고3 때부터 대학 2학년 때까지 매일 한 시간 이상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제 목소리가 이렇게 느끼하게 된 이유입니다.
게다가 또래 그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는 물론이고 저녁예배와 수요, 금요 기도회를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성령체험과 극적인 간증에 심취하며 각종 부흥회와 찬양 집회를 열심히 쫓아 다녔습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흔히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신앙 경험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지냈습니다.
제가 이런 과거를 이야기 하면 어릴 때부터 참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해 기특하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겨운 아픔을 느낍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지난날의 그 종교행위들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끔찍한 강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사랑의 참된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를 다그치는 분이라고 오해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연약하고 부족한 저의 자아가 존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보다는, 나의 열심과 헌신과 업적이 신앙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통해 해방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더욱더 스스로를 옭아매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기대했던 화려한 성공과 승리보다는 내면에 심각한 아픔과 절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일찌감치 신학의 길로 인도하셔서 진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라는 이 따스한 문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무언가를 많이 해내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게 좋은 신앙이라는 거짓과 단호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함에 짓눌리기 보다는 그분의 위대함에 기꺼이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눈부신 이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폭군 아합 왕에게 온 이스라엘에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 거라고 예고하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사르밧 마을에 사는 과부가 한줌의 보릿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그를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힘 있고 화려한 사역들은 갈멜 산에서 거둔 승리에서 찬란한 절정에 이릅니다. 이 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하루 종일 자신들의 신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엘리야가 제단을 회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불이 그곳에 내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그 사건의 주체는 엘리야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황홀한 승리의 한 복판에 있던 엘리야는 몹시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했던 삶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아합과 이세벨이 이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권력은 결코 탐욕을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하였습니다. 갈멜 산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기가 꺾이기는커녕 더욱 냉혹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엘리야는 조금 전까지의 호기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만 로뎀 나무 아래에서 쓰러져 죽음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며 위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운을 차린 그를 호렙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로 그곳에서 나눈 주님과 엘리야의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9절과 1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바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입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은 원문과 좀 더 가깝게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같은 질문에 역시 동일한 답을 10절과 14절에서 계속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간단명료한 물음과는 달리 엘리야의 대답은 무척 장황합니다. 이를 통해 내면에 응어리진 그의 본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문장의 주어입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내가” 열정을 불태웠고, “나만” 남았고, “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 시대, 엘리야만큼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졌고 심지어 주님의 뜻을 전하는 참된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엘리야 혼자만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이세벨이 보낸 군사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와 말발굽 소리 앞에 너무나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닌 까닭이 무엇일까요? 어느 샌가 그 안에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뭐래도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그가 보인 위대한 희생과 눈부신 업적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 앞에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막중한 사명감에 짓눌린 나머지 그만 그 진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만이 기울어져가는 민족을 살릴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했습니다. 눈앞에 살아있는 권력자 이세벨과 그가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에 비해 하나님은 무력하게만 보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엘리야는 ‘나’라는, ‘자아’라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은 사라진 채 오로지 나로만 가득한 ‘과잉 신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극심한 탈진과 끝없는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산 앞에 세우시며 당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방금 말씀 드린 대로 본문에서 주님과 엘리야 사이의 같은 질문과 동일한 답변이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과 14절에서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11~12절에서 핵심 주제를 드러내는 문학 구조를 가집니다. 11~1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고 그 앞을 주님이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불”이 타올랐습니다. 하나같이 커다랗고 강력한 자연현상입니다. 이 모두는 지난날 그가 보여준 눈부신 이적들과 흡사합니다. 그동안 그가 행했던 화려한 사역들을 상징적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셨을까요? 12절에 보면 불 다음으로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마치 속삭이듯 작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이 음성은 앞서 나타난 웅장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는 명백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미미하고 고요한 목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크고 화려한 모습에 눈길을 뺐길 때는 결코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안의 탐욕의 소음에 귀를 가릴 때는 절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속삭이듯 작고 고요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오직! 침묵할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한 성공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며 어느 샌가 하나님을 오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많은 일을 쓸모 있게 하는 것에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돌보지 못했고 그 결과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를 향해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듯 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여백의 신앙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크고 강력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이 침묵기도보다 저급하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참 생명과 진리를 구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설령 입을 닫고 조용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내면 깊숙이 거세게 출렁이는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반대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무장해제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훌륭한 침묵입니다.
다만 신앙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믿음의 본질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주님의 무한한 은혜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진정한 의미의 침묵을 실천해 나가며 우리 각자와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이스라엘을 향해 세미하게 말씀하신 주님의 뜻은 15~18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선 주목해야할 말씀은 “너는 네 길을 돌이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방향의 전환을 뜻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의 변화를 촉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은 세 명에게 기름 붓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바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입니다. 하사엘은 당시 이스라엘과 가장 극심한 대립을 했던 강적 아람의 왕으로, 예후는 폭군 아합을 끌어내리고 뒤를 이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할 예언자로 하나님에 의해 각각 세워지게 됩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의 외교와 전쟁을, 예후 왕은 이스라엘의 정치를, 예언자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각각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사엘을 사용하시고 그 후에는 예후를 그 다음에는 엘리사를 통해 끝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삶과 생명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진리를 엘리야가 자신의 발걸음과 손끝을 통해 몸소 깨달아 알고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나 혼자 남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내가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습니다. 내가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지면 이제 이스라엘이 당장 몰락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도 위태롭다는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조금의 여유조차 사치로 여기며 좀 더 멀리 좀 더 빠르게 내달려야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엘리야를 향해 바알을 섬기지 않는 칠천 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엘리야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만든 틀에 갇히지 말고, 내 경험과 생각에 얽매이지 말고 보다 멀리 넓게 바라보라고 주님께서 일러주셨습니다. 그가 앞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경험하였듯이, 가끔씩은 잠시 멈추어 쉬어가도 된다고 다독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분명히 살아있는 당신의 통치를 믿고 의지하라고 당부 하십니다.
정리하자면,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꺼이 내려놓고 비워내는 여백 신앙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진정 노력해야 할 것을 무언가를 채우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비워내고 지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감히 덧칠할 수 없는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지금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성탄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여백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철저히 무지하고 무능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생존과 생활을 사람들의 손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스스로를 온전히 비우시고 낮추신 결과 입니다. 그 연속선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여백 위에 솟아올랐음을 반드시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날마다 분명히 돌이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추악한 야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심지어 그럴듯한 신앙 논리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기에 경건 훈련의 초점이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탐욕을 숭배한다면, 열정을 다해 달려가면 갈수록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과 상처를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히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 저에게 이왕 목사가 되었으니 크고 성공한 목회를 해야 한다며 이러저러한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때마다 조심스럽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위대하고 능력 있고 탁월한 목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참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과장하고 억지로 힘을 주다가 도리어 엇나가는 목사님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저는 고마운 걸 고마운 줄 알고, 미안한 걸 미안한 줄 알고, 무엇보다 부끄러운 걸 부끄러운 줄 아는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과 염치를 지키는, 그저 목사다운 평범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저에게 과분한 사랑을 주신 삼덕교회 성도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마음의 빚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려운 교회 상황을 뒤로하고 떠나게 되어 무척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제 살길만 찾은 것 같아 몹시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참 연약하고 서툰 저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하며 비우고 내려놓을 줄 아는, 여백을 가진 목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중보 부탁드립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헨리 나우웬의 글을 마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귀 기울여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독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What do we do in our solitude? the first answer is nothing. Just be present to he One who wants your attention and listen!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쓸모없는” 존재감 속에서 명확하게, 우리는 힘과 통제에 대한 망상을 점점 죽이며 우리 존재의 중심에 숨겨진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It is precisely in this "useless" presence to God that we can gradually die to our illusions of power and control and give ear to the voice of love hidden in the center of our being.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노력과 커다란 세심함을 필요로 합니다.
But "doing nothing, being uesless" in not as passive as it sounds. In fact it requires effort and great attentiveness.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현존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청을 요구합니다.
It calls us to an active listening in which we make ourselves available to God's healing presence can be made new.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삼덕교회와 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입니다. 아쉬운 이별 속에 지금껏 저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안겨 준 문장, 지난 날 호렙 산에서의 엘리야는 물론이고 어쩌면 지금 우리 공동체에 가장 필요할지 모르는 소중한 성찰을 다시 말씀 드리고 마지막 설교를 끝맺겠습니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기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리야처럼 너무나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이루어 내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몹시 지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신앙조차 그 어리석은 기준으로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시나브로 나지막이 다가오심을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7천명의 의인을 통해 이루실 주님의 크고 위대한 계획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진리를 따라 나 자신을 우상화 하는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욕망과 자아를 비워내는 여백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탄절,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여백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죄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신 참 사랑의 하나님
한없는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삼덕교회가 더욱 더 교회다워 지는 일에, 특별히 겨울 한파 속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작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님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 무엇보다 평안과 화평을 구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가운데 날마다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 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 되길 원합니다.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시련과 좌절을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슴에 품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성탄의 생명과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여백의 신앙을 지니며 살아가길 다짐하는 삼덕교회 온 성도들 가운데 영원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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