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장 1~8절 "해석은 하나님께"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삶은 난해합니다.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는 이집트의 두 관원장이 등장합니다. 각각 파라오의 술과 떡을 맡았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이 둘은 말단 실무자가 아닙니다. 핵심 관료입니다. 술과 떡이 상징하는 바를 총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파라오가 마실 술을 미리 맛보는 일을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술은 단순한 알콜음료가 아닙니다. 당시 국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두 행사는 제사와 연회입니다. 그 자리에서 술은 중심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술 맡은 관원은 왕의 측근으로서 국가제의를 주관한 사람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파라오가 먹을 음식을 미리 맛보는 일을 합니다. 해당 원문을 ‘어전 탁자에서 근무하는 서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흔히 오해하듯 평범한 요리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파라오는 단순한 황제가 아닙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숭배 대상으로 신격화 된 존재입니다. 그런 파라오의 식사를 관리한다는 것은 술 맡은 관원장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핵심 측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지금까지 거대한 제국의 풍요를 누려왔습니다. 황제의 후광을 등지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둘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입에 발린 말을 했습니다. 온 집안이 값비싼 선물로 가득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두 관원장은 금세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아찔하도록 가파른 추락을 경험합니다. 본문 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이들의 상황을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범죄’와 ‘분노’와 ‘투옥’입니다. 두 사람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범죄’하였습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그들에게 ‘분노’했습니다. 그 결과 ‘투옥’, 즉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왕에게 정확히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감옥에 갇힐 만한 흉악한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서고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절대군주의 사법 판단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이익과 감정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벌주고 잡아 가두는 경우를 수 없이 발견합니다.
어쩌면 두 관원장은 정적들에 의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지는 않더라도 과거에는 무사히 넘어갔던 일들이 갑자기 문제가 되어 벌을 받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엄연히 상상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인생은 난해하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임금과 내가 이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자랑하며 떵떵 거리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보냈던 찬란한 일상과 감옥에서 지내는 음습한 하루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이처럼 무거운 현실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수 없이 많은 물음표에 둘러싸였을 것입니다. 대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헤쳐나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소유했던 지식과 부귀영화가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깊은 어둠 속에서 짙은 한 숨만 내쉴 뿐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복잡다단함은 꿈에서도 이어집니다. 어느날 두 사람이 같은 날 꿈을 꾸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현대인들 보다 훨씬 더 꿈에 대해 막중하게 의미부여를 했습니다. 당연히 자고 일어나 서로 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의 꿈이 서로 정반대였습니다. 더욱더 혼란스럽습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길몽과 흉몽의 경계가 아리송합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에 들어서도 인생의 난해함을 절감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사기꾼의 궤변 속에서만 명쾌합니다. 누구나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과거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무나 막막한 앞날에 대한 염려로 근심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복잡한 실타래 같은 번민에 둘러싸여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인생의 암흑을 만난 두 관원장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당신의 종을 붙여주셨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마침 그들이 투옥된 곳은 친위대장, 즉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그곳에 요셉이 먼저 갇혀 있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옛 동료 두 사람을 수종들게 했습니다. 고위 관료출신 범죄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날 요셉은 자신이 모신 두 어른의 얼굴 색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당돌합니다. 예로부터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은 힘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비록 지금 함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과 요셉은 배경과 지위가 전혀 다릅니다. 그들 눈에 요셉은 엄연히 외국인 노예 출신의 어린 범죄자입니다. 호의라 할지라도 자기들 낯빛을 두고 질문하는게 불쑥 언짢을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인생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치 앞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요셉에게라도 뭔가 도움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움터 올랐습니다. 본문은 그들 사이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두 관원장이 눈물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대인들인 꿈에 대해 굉장한 의미 부여를 했습니다. 꿈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 도무지 알 수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단순히 간밤에 꾸었던 꿈의 해몽 문제가 아닙니다. 꿈이 상징하는, 삶의 처절한 난제를 부여잡고 내뱉는 호소입니다. 두 사람은 싸늘한 의문의 늪에서 평생 헤어나오기 힘든 모든 인류를 대표해 절규하며 묻고 있습니다.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그 두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반드시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가다오는 참혹한 삶의 모든 시련과 절망에 대한 해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인류의 가장 커다란 모순을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더없이 찬란한 해답을 온 우주에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납득하기 힘든 아픔에 허덕일 때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처절한 죽음을 통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 만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어둠을 물리치는 진정한 능력임을 믿습니다. 무덤을 비우시고 다시 사신 참 생명 만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번민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원한 소망임을 믿습니다.
삶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 주님께 오늘 하루도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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