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3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28장 1~6절 "참된 복의 길"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어제 함께 읽은 신명기 27장 11~26절은 에발산에서 선포할 저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8장은 반대로 그리심 산에서 외칠 축복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열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일방적인 복이나 저주만을 선포하지 않으십니다. 둘 모두가 공존하는 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관련해서 구약성경에서 ‘복’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바라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어근의 단어를 동사형으로 바꾸면 ‘무릎 꿇다’라는 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창세기 24장 11절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에 무릎을 꿇게 했을 때 같은 뿌리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살아가며 때때로 무릎 꿇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힘세고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의 부당한 요구와 권위에 눌려 먹고 살기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만든 온갖 가난과 결핍들이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무릎 꿇어야하는 비참한 순간이야말로 주님께 진정으로 경배의 무릎을 꿇게 되는 기회입니다. 그 순간 저주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복과 저주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분명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찬란한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준과 방법으로 복을 찾고 저주를 물리치기 보다는 참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구체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며 복 주시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복이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높임 받는 것입니다. 마침 우리는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주제 안에서 구약성경을 7개의 문장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주일예배와 사랑방 모임을 통해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새삼 분명히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만의 주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그 다스림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뭔가 더 나아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도덕성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복’이라는 말은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복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여기에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오길 바라는 그 복은 엄밀히 말해 나의 소원이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저는 제 아들이 시간이 흘러 흔히 말하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든든한 직장에 취직해서 여유롭게 살길 원합니다. 또한 제 부모님이 노년에도 건강하고 평안히 사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럴 경우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복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녀의 성공, 부모님의 무병장수는 굳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어도 얼마든지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있고 가정환경이 뒷받침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좋은 학벌과 스펙을 쌓은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타고난 체질이 튼튼하고 자기관리를 잘하면 신앙이 없이도 노년을 건강히 지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물론 그런 세속적인 성공과 평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일부이긴 합니다. 굳이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복의 본질에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삶 속에 찾아오는 그 어떠한 실패와 좌절과 굴욕 역시도 놀라운 축복이라는 진리를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무시하고 주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오로지 나의 손에 주어질, 눈에 보이는 복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왜곡된 기복신앙은 하나님께 무릎 꿇으려 하기 보다는 나의 탐욕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려는 무모한 죄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 가운데 구체적인 복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절 말씀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현대인들의 눈에 이 구절은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성읍, 즉 도시나 그 외의 지역 어디를 가든 복을 받는 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대 서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히브리어로 <이르>라고 기록된 고대의 도시는 문명의 절정입니다.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권이 집중된 공간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지배계급만 살 수 있었고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반면 이러한 성읍들과 대비되는 들판은 그러한 도시에 살 수 없는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공간입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도시민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3절을 이렇게 해석 가능합니다. 화려한 도시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초라한 빈 들판에서도 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며 그분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4절은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농사지을 땅과 키우는 가축들의 풍성한 결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에 자녀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 상황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출산은 축복의 대상이며 난임으로 많은 가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훨씬 더 큰 무게감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대를 이을 자녀가 끊긴 것은 그 개인과 가정이 이 땅에서 지속될 의미가 없다고 신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고뇌와 갈등이 바로 이것과 연결됩니다.
그런 까닭에 ‘네 몸의 자녀가 복을 받는다.’는 다산의 축복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감격을 이스라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러한 풍성한 생명의 결실이 땅과 동물들에게도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선 복의 특성이 ‘흘러넘침’이라는 점을 새삼 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대표적인 양대 노동이었던 농업과 축산업 모두를 원활하게 하여 지속가능한 삶과 생태계를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4절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용을 5절이 담고 있습니다. 바로 광주리와 반죽 그릇에 대한 축복입니다. 즉, 그 안에 각종 먹을거리가 가득할 것이라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의 축복을 정리한 구절이 바로 6절입니다. 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축복은 지금까지의 출애굽 여정을 돌이켜 볼 때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비참한 노예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광야 여정은 분명 축복이었지만 고된 사막길 속에서 스스로를 저주하며 오히려 이집트에서의 삶을 복되게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말씀에 대한 신뢰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가나안에서 보낼 새로운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마음 편히 한 곳에서 정착해서 계속 지낼 수도 있고 적의 침략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닐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라를 빼앗기고 멀리 다른 나라의 포로로 잡혀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모두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말씀을 마음 깊이 품을 때, 이스라엘은 어떤 곳을 들어가든 나가든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복된 손길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그렇기에 간곡히 당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아 가시길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주님의 말씀을 참되게 헤아리고 실천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서 드높이 올리시어 오늘 하루도 복된 인생의 여정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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