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2일, 포항제일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단
기독교의 옛 역사를 살피다보면 당시 교인들이 겪었던 끔찍한 박해에 무척 놀라게 됩니다. 그 시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고 거슬리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사도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초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입니다. 그가 순교를 앞두고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 시절 핍박 가운데 있던 성도들의 비장한 마음가짐을 보여줍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IV, 1. 저는 모든 교회에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방해하지만 않으신다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저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저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놔두십시오. 저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밀알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출처: Lettera di Sant'Ignazio ai Romani Coreano(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IV, 1
이처럼 당시 교회에게 가해 졌던 폭력이 발전된 형태가 로마 콜로세움에서의 학살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에는 그 때, 세워진 원형 경기장의 웅장한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그곳에서 고대 로마제국 사람들은 검투 경기 관람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시합 전에 ‘특별 행사’로 사형수들에게 맹수를 풀어서 그들이 잡아먹히는 것을 구경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임 당한 죄인들 중에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 그들이 흘린 검붉은 피가 마를 겨를도 없이 경기장을 계속 축축히 적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힘겨운 상황 속에서 사도 베드로는 고난 받는 교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바로 본문이 포함된 “베드로 전후서”입니다. 물론 이 당시는 로마제국 전체에서 교회를 본격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야고보와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교회를 향한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가 그 시작부터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미처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한 역사의 공백 속에서 베드로와 그의 교회는 끔찍한 시련과 마주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렇게 힘겹게 신앙을 지켜가는 교회를 향해 과연 무엇이라고 권면했을까요? 9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교회를 향한 악의 위협에 대해 그것을 무시하거나 도망하거나 혹은 굴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분명히 “대적하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방법입니다. 바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을 이기는 올바른 방법은 그것과 직접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이미 가진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내용은 우리에게 그리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저마다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강제로 신앙을 뺏기거나 믿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자와도 같은 악한 권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교회를 삼키려 합니다. 이 시대의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낮아지고 섬기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욕망을 따르도록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사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가능하면 자녀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다니길 축복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지 보다 많이 움켜쥐고 좀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을 행복의 기준과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아야합니다. 세속적인 유치한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돈과 학벌과 명예라는 이 시대의 콜로세움으로 밀어 넣는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살아내신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고 낮아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탐욕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반대되는 어렵고 위험한 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앙생활 역시 비록 모양과 환경은 다르지만 그 옛날, 끔찍한 시련과 마주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모두가 한 쪽 눈만을 가진 나라에서는 두 눈 가진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나누고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거슬리고 거북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을 통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셨고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녀들이 겪는 온갖 시련 가운데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절망에 맞서 굳센 믿음으로 싸우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끝까지 지켜야할 두 가지 소중한 희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10, 1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는 먼저, 그들을 향해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위로합니다. 성도의 고난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잠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잔인한 의문을 떠오릅니다. 과연 그 “잠깐”이 언제까지일까요?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할 여러 아픔에 신음하며 저절로 이렇게 주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잠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건강이나 경제적 어려움 혹은 가정 문제 등의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온 내용들이 하나쯤은 있으실 겁니다. 더러 금세 응답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 2년은 물론이고 10년, 20년, 심지어 평생 동안 간절히 구해도 끝나지 않은 아픔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안에서 인간의 그 어떤 영원함도 결국 유한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제 아무리 영겁과도 같은 시간의 고통일지라도 주님의 위대한 다스림 가운데 반드시 힘을 잃고 참된 은혜으로 변화됨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하는 ‘잠깐’의 의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또 다른 편지인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다음으로 마음에 새겨야 할 소망은 고난당한 성도들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직접, 온전하고 굳건하게, 강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십니다.
앞서, 9절 말씀을 보며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를 이기는 길은 그것과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단단하게 하는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자녀들의 믿음을 몸소 굳세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힘과 능력이 주님께 영원히 있음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끔찍한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이유입니다. 만약 고난을 이겨내는 강한 믿음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면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분이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고 붙잡아 주시기에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의 거짓과 불의와 폭력에 기꺼이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내면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갈 때 분명 허무함과 좌절과 아픔을 겪게 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을 해쳐갈 믿음 역시 직접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 지치고 괴로울 때 그러한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본문 7절에 담긴 베드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지금 보시는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대표작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옛날 처음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잔인한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되어 끔찍하게 죽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라고 해서 순교를 앞두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사자들의 음산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신앙을 버릴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히 너무나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거대한 고난 가운데서도 권능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들과 항상 함께 계시고 돌보심을 믿고 그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어느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서커스단이 펼치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공중그네 묘기”를 텔레비전에서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어느 날 헨리 나우웬이 우연한 기회에 세계적인 공중그네단의 공연을 볼 뿐만 아니라 그 팀의 리더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로트라이히’ 라는 이름의 리더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공중비행을 할 때 저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위대한 스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 스타는 저를 잡아주는 죠입니다.
‘As a flyer, I must have complete trust in my catcher. The public might think that I am the great star of the trapeze, but the real star is Joe, my catcher.
그는 1초의 몇 분의 몇까지 맞출 만큼 정확하게 제가 갈 자리에 와 있어야 하고, 제가 그네에서 길게 점프할 때 공중에서 저를 잡아채야만 하니까요.”
He has to be there for me with split-second precision and grab me out of the air as I come to him in the long jump.’
그러자 헨리 나우웬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 물었습니다. 로트라이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합니다. 이것이 공중그네의 비밀입니다.
The secret, is that the flyer does nothing and the catcher does everything.
죠에게 날아갈 때 저는 그저 팔하고 손만 뻗으면 됩니다. 그 다음엔 그가 저를 잡아 무대 앞으로 안전하게 끌어가 주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When I fly to Joe, I have simply to stretch out my arms and hands and wait for him to catch me and pull me safely over the apron behind the catchbar.’
이 말을 들은 나우웬은 무척 놀라워하며 정말 그가 공중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되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은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죠를 잡으려 들면 안 됩니다. 저를 붙잡는 것은 죠의 임무입니다.
Nothing, The worst thing the flyer can do is to try to catch the catcher. I am not supposed to catch Joe. It’s Joe’s task to catch me.
만약 제가 죠의 손목을 잡는다면 그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제 손목이 부러지고 말겁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끝장입니다.
If I grabbed Joe’s wrists, I might break them, or he might break mine, and that would be the end for both of us.
공중비행을 하는 사람은 날기만 하고, 붙잡아 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해야 합니다. 공중비행을 하는 사람은 붙잡아줄 사람이 자기를 위해 제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자신의 팔을 뻗어야 합니다.”
A flyer must fly, and a catcher must catch, and the flyer must trust, with outstretched arms, that his catcher will be there for him.’
이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서커스 공연장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교회는 그 어떤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미련하게 공중 그네만을 고집하는 부활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비웃거나 심지어 미워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스스로조차 다른 이들의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때때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거나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여러분. 공중 그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은 열심히 연습한데로 최선을 다해 힘껏 하늘로 날아오른 사람이 자신을 붙잡는 이를 향해 그저 손과 팔을 뻗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무런 노력 없이 게으르게 지내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인생의 여정 가운데 나의 능력과 경험과 배경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잠잠히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억지로 움켜쥐려 드는 것은 최악의 실수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불안과 염려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붙잡아주시려 하나님께서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계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정없이 곤두박질하는 듯 한 아찔한 인생의 추락 속에서, 우리의 고난 가운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순간을 담대히 그분의 드넓은 팔에 내어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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