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일 화요일

신명기 10장 12~22절 "사랑으로의 초대"

2020년 4월 27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10장 12~22절 "사랑으로의 초대"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해당 구절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또한 공동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풀었습니다. “이제, 너 이스라엘아!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과연 주님께서 이스라엘, 더 나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설레면서도 부담스러운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을 안겨줍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아간다는 것은 분명 반갑지만 그러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바람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1절 후반부와 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은 신명기는 물론이고 구약성경 전체의 핵심 구절인 6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반복하며 확대하여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구약성경의 뚜렷한 특징인 ‘병행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이 ‘낭독’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나 가나안 입성을 앞둔 모세의 설교를 담은 신명기는 더욱 직접적으로 그러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이 쉽게 집중하며 알아듣도록 여러 방법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동일한 개념을 비슷한 단어들로 바꿔서 열거하는 것입니다. 즉,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을 목적어로 한 여러 동사들, 즉 경외, 따름, 사랑, 섬김, 지킴은 각각 다른 뜻을 가지지 않고 중심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흔히 오해하듯이 막연한 감정에 빠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총동원하는 행위입니다. 때문에 항상 기쁘고 즐겁기 보다는 때때로 무겁게 느껴지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사랑의 본질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쪽만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보이신 위대한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이 본문 17절 이하에 자세히 열거되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22절만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며 출애굽 사건을 다시 언급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놀라운 구원 사건 가운데 주님의 찬란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의 인구, 즉 사람 수로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집트의 총독이 된 요셉의 초대로 그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이 이주했을 때 그들 가족의 숫자는 칠십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백년이 흘러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을 때 이스라엘은 민수기에 따르면 성인 남성만 약 62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언급이 조금 의아할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 분명 긍정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증거라는 사실 앞에 조금 갸우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출애굽기 이야기를 비춰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은 울림을 안겨줍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을 때, 겨우 아들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오늘날에도 난임은 상당히 가슴 아픈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심각한 불행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임신을 피하는 부부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복의 증거로 믿었고 반대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저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오랜, 간절한 기다림 끝에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한 사건은 창세기의 핵심 주제를 보여줍니다. 비록 당장은 고통과 상실을 경험하지만 주님께서 마침내 위대한 생명과 희망을 안겨준다는 위대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출애굽기 초반부에 반복됩니다. 바로 이집트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이 죽임 당하는 사건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의해 힘없는 노예의 아들들이 억울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참혹한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자라서 출애굽을 이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집트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 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대로 생육하고 번성한 이스라엘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큰 아들은 한 집안의 대를 잇는, 미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파라오를 비롯한 온 이집트의 장자들이 예외 없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집트가 더 이상 이 땅위에 지속될 수 없다는 우주적인 패배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분명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2절에 기록된 70명과 하늘의 수많은 별 사이의 대조는 단순한 숫자 계산 혹은 비유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눈부신 사랑의 확고한 결과이자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12, 13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요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마지못해 억지로 당신을 따르고 섬기며 사랑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노예들이 주인에게 하는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주님은 당신께서 몸소, 먼저 베푸신 그 사랑에 반응하길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출애굽을 직접 경험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눈부신 사랑의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주님의 그 처절한 희생과 희망 속에서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죄인인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찬란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나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날마다 진리 가운데 나아가야할 이유입니다. 구원받은 자녀로서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히 깨달을 때, 주님을 향한 사랑 명령은 더 이상 무거운 속박이나 억압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은 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저마다를 깊고 깊은 어둠과 죽음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며 그 주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사랑과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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