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31일, 포항제일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아멘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시골 마을에서는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과 여건이 몹시 미비했습니다. 그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지적장애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지극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가정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의 멸시와 천대 속에 온갖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상황에 부닥친 한 여인의 모습을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내용 중에 있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 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 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여러분이 만약 이런 사람과 마주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은 마땅히 그를 도와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타인의 불행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이익과 감정을 우선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악귀 들린 미친 여자로 대하며 싸늘한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할 가족이 누구보다 흉포한 손길을 휘둘렀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온갖 종류의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냈음을 행간 속에서 충분히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아무도 헤아려주지 못할 설움을 묵묵히 삭이며 살아갈 뿐입니다.
단지 문학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당연히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많은 성도님 역시도 지난날, 어쩌면 지금 그런 가혹한 시련 가운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을 기도와 찬양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찾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셨을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도 끔찍한 외면과 소외를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해 본문 11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는 중증 장애를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나 가련하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신앙 공동체의 세심한 돌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도움을 주저하게 하는, 더 정확히는 혐오하고 꺼리게 되는,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귀신 들림’입니다.
이 때, 그녀를 사로잡은 ‘귀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이단이 그러하듯이 성경의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귀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대로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영적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그릇된 태도입니다. 대신 ‘귀신’이라는 언급을 통해 말씀이 드러내려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경우 귀신은 한 여인에게 신체적인 질병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는 실체입니다. 귀신들림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치유가 필요한 병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더러운 존재로 낙인 찍혔습니다. 비록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그녀를 덮친 가혹한 폭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억누른 절망역시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더 끔찍한 점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 그 여인이 속한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회당입니다. 회당은 유대인 마을의 중심에서 신앙을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그녀가 사람들의 모멸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에 있었던 까닭은 분명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회당장은 그러한 회당을 관리하는 행정가이자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귀신들려 장애로 신음하는 여인의 아픔을 헤아려 줘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따뜻한 섬김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당장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회당장은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놀라운 치유의 순간에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척 황당합니다. 1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왜 다른 날이 아닌,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쳤는지 거칠게 따져 물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한 여인이 귀신들려 질병으로 신음하는 것보다 종교 질서가 더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의 정신 대신 안식일 관련 율법들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말씀의 핵심보다 문자를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회당으로 눈물지으며 찾아온 그녀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평소 회당에서 그 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의 경건한 분위기를 망치는 사탄의 딸이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습니다. 하루속히 치우고 싶은 짐 더미에 불과했습니다.
물리쳐야 할 대상은 분명 귀신입니다. 장애 여성인 그녀는 피해자이자 약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가해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마치 그녀 자체가 귀신인 양 멸시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그녀에게 내미셨습니다. 12~13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눈길을 보내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단지 사탄이 물러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따뜻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그녀를 휘감은 귀신이 아니라 병으로 고통당하는, 그녀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추한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본질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행동이 아니라 그녀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결핍과 아픔을 눈에 담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뒤틀린 몸에 직접 손을 얹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손길을 일부러 건네셨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친근한 온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마땅히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할, 뜨거운 피와 살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16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그녀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호칭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로 당시 유대교의 일그러진 신앙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혈통인 자신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특히나 민족의 위기를 겪으면서 아브라함의 자녀다운 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율법이 악용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 귀신들린 여인은 결코 구원받는 아브라함의 딸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오만을 비틀며 오히려 그녀야말로 진정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호칭이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 바로 19장 9절에서 세리장 삭개오를 대상으로 합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제국에 아부하는 삭개오 역시 그 시절 유대인들의 눈에는 절대로 구원받을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그들에게만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외면되고 소외당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안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본문에 기록된 한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편견을 넘어서는 무한한 은혜와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완성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감히 여러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참 많이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살아오고 살아가느라 무척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좌절 가운데 차가운 멸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 모양의 폭력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기도 합니다. 그 결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말씀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위중한 질병을 고치는 주님의 신기하고 강력한 이적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깊은 고통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담긴,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참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본색은 그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려면 내 안의 어리석은 편견과 오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혐오스러운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교회다움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낡은 전통과 협소한 편견 가운데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밀어낸다면 본문 속 회당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더욱더 넓은 품을 가져야 합니다.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보다 따스한 눈길과 손길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섬김과 나눔의 샬롬 공동체를 우리 교회 안에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소중한 부르심인줄 믿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시의 전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가계(家系)
- 조수순
연분홍 화장지로 우스꽝스럽게 접어 만든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소곳이 예배당 앞자리에 나와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절히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자의 말 끝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녀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인적 드문 산모롱이를 돌아 예배당으로 오곤 하는데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오늘 따라 홍조 띤 얼굴에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른 하나님의 아들 딸들과 똑같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는 그녀는
(출처: <새가정>, 1988.03.29.)
삶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하염없이 헤쳐 가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때로는 아무에게도 위로와 공감과 도움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오히려 더 잔인한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미시는 눈길과 손길로 말미암아 참된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는 모두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주신 말씀을 통해, 귀신들려 오랜 시간 중증 장애로 신음하던 여인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억압을 당했던 그녀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 눈길을 건네신 주님의 모습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로 부르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시는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복음의 능력을 통해 회복시키고 일으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세상의 참된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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