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로마서 2장 12~16절 "말씀을 행하는 자"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진리이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전혀 주저함 없이 드러내는 신앙 고백입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씀의 주인이신 주님의 사랑과 구원은 한 없이 넓고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교회가 막 움트기 시작 했을 때, 바울이 선교의 걸음을 내딛었을 때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자신들을 위해서만 독점적으로 주어졌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로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자기들에게만 주어진 배타적인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할례 받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말씀이 들려져서 그들이 주님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습니다.
마침 우리가 지난 칠 주간, “너는 복이 될지라” 주일 설교시리즈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공부하는 구약 성경의 신앙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드넓은 구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약의 핵심과는 별개로 적어도 그 시절 유대인이 가진 신앙관은 전혀 달랐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택함 받은 신앙의 특권층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명백한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오해한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1세기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것은 단순한 종교관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에 의해 가파르게 쇠락해 가는 약소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살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구약성경을 완고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진 신념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믿었지만 정작 진정한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배격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유대인들이 구원의 말씀을 독점한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도 여전히 만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민족적인 정체성을 한 순간에 버리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를 차츰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전까지 교회는 오랫동안 거센 혼란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와 구원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벌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편지들과 사도행전에 담긴 당시 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치열하게 부딪혀야 했던 현장의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문제의식이 오롯이 담긴 글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바울의 거침없는 논박의 일부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먼저 12~13절 제가 읽겠습니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은 구원의 보증이었습니다. 심판으로부터 보호받는 방패였습니다. 멸망에 빠질 이방인들과의 경계를 가르는 담벼락 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 생각에 율법과 심판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서로 무관한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치밀한 논리 전개로 그 모순을 뒤엎습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가 죄인지도 모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고 마침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율법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범죄하고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맹목적으로 움켜쥐긴 했지만 정작 그 말씀 따라 살아가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그늘 아래 안도하며 심판에서 벗어날거라 착각하지만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매서운 진노가 임할거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그러한 바울의 주장이 무척 황당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본문 속 바울의 경고 역시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기며 흘려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율법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씀을 어떻게 행하느냐 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말씀의 본질을 올바로 깨달아 실천의 방향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그 길은 분명합니다. 바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핵심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 문자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비본질적인 관습들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거침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그 대신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다스림을 거침없이 선언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룩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본문 14~15절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바울은 이미 율법을 가진 이들에게도 심판이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율법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율법의 존재를 가르쳐 줍니다. 바로 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주신 진리의 음성입니다.
간혹 이런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가 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갔을까요? 전 세계 오지에 있는 미전도 종족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제외될까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린 아기들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너무 어렵고 난감한 질문들입니다. 섣불리 정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들입니다. 다만 방금 읽은 말씀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드넓은 사랑과 다스림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기독교라는 종교 형식에서 벗어나 있고 자세한 교리를 알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주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성경 말씀을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두신 양심을 따라 당신의 뜻을 전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확고한 진리를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습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가고 복음을 이해하며 전해야 합니다.
다만, 그 옛날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씀의 의미와 경계를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소중히 여기되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풍성한 구원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편협한 경험과 고집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성경 지식과 그럴듯한 종교생활은 자랑하면서 정작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밀어내고 배척하는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온 몸과 마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는 잘못된 특권의식과 고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마음을 내면 깊이 품고 그분을 닮아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참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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