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일 일요일

로마서 2장 1~11절 "심판이 있는 사랑"

2020년 7월 23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로마서 2장 1~11절 "심판이 있는 사랑"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악독한 황제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은 백성들에게 당신의 힘을 과시하고 억누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꺼이 양보하고 희생하고 인내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만큼 놀라운 깊이와 넓이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중심에 늘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결국 허울뿐인 위선과 종교 생활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연약한 기대와 경험을 넘어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망각하는 것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사랑에 대한 오해 입니다. 주님을 나의 모든 욕망에 동의하며 실없이 웃는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성경이 알려주는 사랑의 정확한 의미에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한 진리를 깨우쳐 줍니다.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진노입니다.


본문 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 있는 단락과 긴밀하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어제와 그저께 함께 살펴보았듯이 로마서 1장 후반부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해진 사람들의 악행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결과 성적 방탕을 비롯한 각종 폭력과 거짓과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연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만약 자기 역시도 똑같은 죄인이며 주님의 진노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말씀 앞에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은 그러한 죄악의 목록들과 전혀 무관한 완전한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죄인들을 향해 증오와 혐오를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제멋대로 심판관이 되어 정죄의 칼날을 무모하게 휘두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1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와 같은 1절 말씀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는 로마서 1장 후반부의 죄 목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안겨줍니다. 즉, 우리는 죄에 대해 이해하고 경계할 때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죄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나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오염된 문화에 맞서, 복음과 반대되는 분명한 죄악의 정체를 고발하고 담대히 알려야 합니다. 그 결과 누군가가 죄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그저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기만 할 때, 동일하게 같은 정죄를 받는 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에 빠진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는 심각한 오만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향해 손가락질하다가 정작 본인이 가장 심각한 죄의 늪에 빠져든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바울에게 있어 막연한 추측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드러난 그의 감정은 목회와 선교 현장에서 생생히 경험한 치열한 현실을 반영하였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를 설명하였는데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만 바쁘고 정작 진리의 넓은 품에 안기지 못한 교인들을 그는 숱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때로 그들로 말미암아 억울하고 답답한 일들도 적지 않게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2~4절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인자하심에 대해 격정적으로 토로합니다. 석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바울은 다른 사람은 함부로 정죄하면서 정작 본인이 똑같은 죄를 저지르는 오만한 이들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넉넉히 품어주시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죄를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심각하게 오해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고 꾸짖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께서 사랑으로 다가오신 복음을 함부로 훼손하는 태도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부모님의 넉넉한 마음만 믿고 그 안의 끝없는 인내는 무시한 채, 끊임없이 패륜을 저지르는 자녀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들의 악행에 찾아올 결과에 대해 5~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닥칠 결과는 분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입니다. 그 어떤 시련에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주님의 참된 생명과 은혜가 넘치지만 그 반대의 죄악을 저지르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진노가 쌓이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준엄한 경고입니다.

이렇게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보이신 무한한 사랑과 모순돼 보이기도 합니다. 정반대로 사랑 없이 공포와 불안에 근거한 잘못된 신앙 생활의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 과연 인간의 노력과 행동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많은 의문점을 남깁니다. 사실 이 모두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기나긴 신학의 역사 자체가 그러한 힘겨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어찌 보면 무척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드넓은 생각과 구원을 인간이 감히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성경을 앞에 두고 너무 큰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일단 지금 눈 앞에 있는 말씀에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도 자녀들을 심판하신다는 진리입니다.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화를 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있어 진노와 분노는 그분의 사랑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앞서 들었던 예를 이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녀들이 비행을 저지를 때 바로 꾸짖기 보다는 혹시나 더 삐뚤어질까 조심스러워 부모는 사랑 가운데 묵묵히 기다리게 됩니다. 하지만 잘못이 반복되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마냥 참고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 단호히 훈육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 때는 너그러운 미소와 따뜻한 말투를 거둔 채 매섭게 눈을 뜨고 차갑게 꾸짖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 부득이 회초리를 들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만을 두고 부모를 가리켜 자녀를 함부로 대하는 폭력적인 사람으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 훨씬 더 많은 시간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훈육은 훈육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시금 자녀가 바로 서길 바라는 사랑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심판 없는 사랑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의 참된 사랑을 깨달아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드넓은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동시에 죄악을 물리치는 참된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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