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0일 월요일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2020년 8월 9일, 포항제일교회 주일 3부예배, 목사 정대진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영성작가 헨리 나우웬은 내적 성숙을 위한 고독의 길을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이 구절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doing nothing, being useless를 말하곤 합니다. 해당 단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긴급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라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들에 도움이 되기보다 종종 방해 되곤 합니다. 
We always seem to have something more urgent to do and ‘just sitting there’ and ‘doing nothing’ often disturbs us more than it helps.

하지만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쓸모없이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은 모든 기도의 핵심에 속합니다. 
But there is no way around this. Being useless and silent in the presence of God belongs to the core of all prayer. 

처음부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무질서한 소음을 더 크게 듣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In the beginning we often hear our own unruly noises more loudly than God’s voice. This is at times very hard to tolerate.

(중략)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But slowly, very slowly, we discover that the silent time makes us quiet and deepens our awareness of God.

그러고 나서 곧 우리는 분주함으로 빼앗긴 순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Then, very soon, we start missing these moments when we are deprived of them,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점점 더 많은 침묵 속에 이끌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곳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내면의 추진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and before we are fully aware of it an inner momentum has developed that draws us more and more into silence and closer to that still point where God speaks to us.

저는 오랫동안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doing many-thing, being use-full”,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기도는 무조건 크고 오래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고3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 매일 한 시간 이상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제 목소리가 이렇게 느끼하게 된 이유입니다.

게다가 또래 그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는 물론이고 저녁예배와 수요, 금요 기도회를 적어도 제 의지로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뜨거운 성령체험과 극적인 간증에 심취하며 각종 부흥회와 찬양 집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흔히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신앙 경험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과거를 이야기하면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겨운 아픔을 느낍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지난날의 그 종교 행위들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끔찍한 강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사랑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를 다그치는 분이라고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저의 연약한 자아가 존재했습니다. 주님의 무한한 은혜보다는, 나의 열정과 헌신이 신앙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통해 해방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도리어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기대했던 화려한 성공과 성취보다는 심각한 고통과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일찌감치 신학의 길로 인도하셔서 진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라”는 이 따스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무언가를 많이 해내고 쓸모 있게 존재하라는 거짓 신앙과 단호히 결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함에 짓눌리기보다는 그분의 위대함에 기꺼이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눈부신 이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폭군 아합 왕에게 온 이스라엘 가운데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 거라고 예고하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사르밧 마을에 사는 과부가 한 줌의 보릿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그를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힘 있고 화려한 사역들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에서 찬란한 절정에 이릅니다. 이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종일토록 자신들의 신을 향해 자해 하면서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엘리야가 제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그곳에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 것과 엘리야는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의 주체는 엘리야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 역시도 감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홀한 승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엘리야는 몹시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했던 삶입니다. 어쩌면 이제 아합과 이세벨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를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권력은 결코 탐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기가 꺾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냉혹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 엘리야에게 조금 전까지의 호기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죽음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하셨습니다. 기운을 차린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로 그곳에서 나눈 주님과 엘리야의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9절과 1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바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입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은 원문과 좀 더 가깝게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같은 질문에 역시 동일한 답을 10절과 14절에서 계속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간단명료한 물음과는 달리 엘리야의 대답은 무척 장황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본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면 보시면서 1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 함께 읽겠습니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우리는 여기서 문장의 주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내가” 열정을 불태웠고, “나만” 남았고, “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 시대, 엘리야만큼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온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졌고 심지어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엘리야 혼자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이세벨이 보낸 군사들이 일으키는 자욱한 흙먼지와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 앞에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그가 힘겹게 토로하는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닌 까닭이 무엇일까요? 어느 샌가 그의 내면에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뭐래도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그가 보인 찬란한 희생과 눈부신 업적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사람의 능력도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총명도 하나님의 지혜 앞에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막중한 사명감에 짓눌린 나머지 그만 그 진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만이 기울어져 가는 민족을 되살릴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겼습니다. 

허나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했습니다. 눈앞에 살아있는 권력자 이세벨과 그가 섬기는 우상 바알과 아세라에 비해 하나님은 너무나 무력하고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대체 내가 지금까지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는 허무함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자책하였습니다. 그런 자신을 가여워하며 억울함 속에 하염없이 몸부림 쳤습니다.

정리하자면 엘리야는 ‘나’라는, ‘자아’라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은 사라진 채 오로지 나로만 가득한 ‘과잉 신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 극심한 탈진과 끝없는 절망 가운데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산 앞에 세우시며 당신의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본문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과 14절에서 주님과 엘리야 사이의 같은 질문과 동일한 답변이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위치하는 11~12절을 통해 핵심 주제를 드러내는 문학 구조를 이룹니다. 이 두 구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고 그 앞을 주님이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불”이 타올랐습니다. 하나같이 커다랗고 강력한 자연현상입니다. 이 모두는 지난날 그가 보여준 눈부신 이적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동안 그가 행했던 화려한 사역들을 상징적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곳에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을까요? 12절에 보면 불 다음으로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마치 속삭이듯 작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이 음성은 앞서 나타난 웅장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는 명백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미미하고 고요한 목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겉모습에 눈길을 뺏길 때는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안의 탐욕스런 소음에 귀를 가릴 때는 절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속삭이듯 작고 고요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오직! 침묵할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눈부신 성공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며 어느샌가 하나님을 오해하였습니다. 열심히 많은 일을 쓸모 있게 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면을 차분하게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듯 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여백 신앙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는 크고 강력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이 침묵 기도보다 저급하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경청할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와 삶 속에 여백을 비워두어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한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참된 침묵을 실천해 나가며 우리 각자와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이스라엘을 향해 세미하게 말씀하신 주님의 뜻은 15~18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선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는 네 길을 돌이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방향의 전환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속에 감추어진 탐욕과 교만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종으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소명은 세 사람에게 기름 붓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바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입니다. 하사엘은 가장 극심하게 대립 했던 강적 아람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외교와 전쟁을 상징합니다. 예후는 폭군 아합을 끌어내리고 뒤를 이을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를 대표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할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사엘을 사용하시고, 그 후에는 예후를, 그 다음에는 엘리사를 통해 마침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야는 어느샌가 잊어버린 소중한 진리를 자신의 온몸을 통해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삶과 생명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나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 홀로 전부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습니다. 나마저 사라지면 당장 이스라엘이 몰락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조금의 여유조차 사치로 여겼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내달려야 한다고 스스로 몰아 붙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엘리야를 향해 바알을 섬기지 않는 칠천 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엘리야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틀에 갇히지 말고, 좁은 생각과 경험에 얽매이지 말고 천천히 넓게 바라보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가 앞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경험하였듯이, 가끔은 잠시 멈추어 쉬어가도 된다고 다독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분명히 살아계신 당신의 통치를 믿고 의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꺼이 내려놓고 비워내는 여백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진정 노력해야 할 목표는 무언가를 채우고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기꺼이 비우고 지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감히 덧칠할 수 없는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준비를 위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논어(論語)구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한(子罕)편 제4장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子絶四(자절사)러시니 毋意(무의), 毋必(무필), 毋固(무고), 毋我(무아)러시다” 

뜻은 이러합니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단절하셨다.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 (국역: 이기동)

비록 유학의 가르침지만 우리 역시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경구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면 이기적인 욕심과 아집과 오만을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만이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과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여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 다음과 같은 찬양을 남깁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철저히 무력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사람이 되셔서 당신을 온전히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온 세상을 위한 우리 주님의 여백 위에 솟아올랐음을 반드시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날마다 분명히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추악한 야망을 붙잡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탐욕을 그럴듯한 신앙 논리로 포장하며 스스로 속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교묘한 죄악을 단호히 분별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욕망을 숭배한다면, 열정을 다해 달려가면 갈수록 자신과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헨리 나우웬의 글을 마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귀 기울여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독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What do we do in our solitude? the first answer is nothing. Just be present to he One who wants your attention and listen!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쓸모없는” 존재감 속에서 명확하게, 우리는 힘과 통제에 대한 망상을 점점 죽이며 우리 존재의 중심에 숨겨진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It is precisely in this "useless" presence to God that we can gradually die to our illusions of power and control and give ear to the voice of love hidden in the center of our being.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노력과 커다란 세심함을 필요합니다. 
But "doing nothing, being uesless" in not as passive as it sounds. In fact it requires effort and great attentiveness.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현존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청을 요구합니다."
It calls us to an active listening in which we make ourselves available to God's healing presence can be made new.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화려한 무언가를 당장 이루어 내라는 조바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릇된 탐욕을 끊어내야 합니다. 뿌리 깊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대신, 저마다의 내면과 세상의 혼란스러운 소음 사이를 헤치며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주신 말씀의 핵심을 가장 명징하게 정리한 한 문장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기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리야처럼 너무나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이루어 내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몹시 지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신앙조차 그 어리석은 기준으로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시나브로 나지막이 다가오심을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주님의 크고 위대한 계획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진리를 따라 나 자신을 우상화하는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욕망과 자아를 비워내는 여백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여백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 여백을 살아내고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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