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9일, 목,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전서 9장 13~18절 "위대한 ‘그러나’"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러.나.’, 그러나는 우리말의 역접 접속사입니다. 세 글자로 이루어진 이 단어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뒤 엎어버립니다.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본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그러나’를 사용합니다. 바로 15절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이 때부터 바울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왜 ‘그러나’를 사용했는지, 그가 하나도 쓰지 않은 ‘이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전반부에 해당하는 13~14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 짧은 두 구절에 바울은 구약과 신약을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먼저 13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여기에 히브리 문학 특유의 병렬법이 나타납니다. 같은 개념을 비슷한 두 단어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즉, ‘성전의 일’이나 ‘제단에서 섬기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과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 또한 동일한 일입니다.
바울이 상기시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율법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사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전적으로 섬길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맡겨진 사명을 오롯이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생활을 보장하셨습니다.
얼핏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전혀 게의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제사법을 통해 구약 성경의 현실성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허공 가운데 붕뜨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고단한 세상 살이 한복판에 뿌리 내리길 바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에서 일하고 제단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그 성직을 통해 삶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구약만이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가르침을 계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 또한 그 생활을 보장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 다른 직업 없이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적절히 보상 해야함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 자체를 전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언급하며 막강한 권위도 부여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위대한 접속사를 인용합니다. 바로 ‘그러나’입니다.
15절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 심지어 모세 율법과 예수님까지 인정한 권한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 여행 기간동안 경비를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물론 바울역시 필요할 때, 일정 부분 다른 사람들의 후원과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완전히 자기 힘만으로 사역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일관적이고 분명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서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과감히 내려 놓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은 남달리 우월한 도덕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초인적인 절제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를 강렬히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16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연상시키는 고백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 예언자는 이렇게 절절히 토로합니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복음이란 단단히 결심하고 절대 전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 외칠 수 밖에 없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마치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 같고 골수에 사무치기 때문입니다.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해 견딜 수 없습니다. 마침내 그 모든 어려움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17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이렇게 담담히 선언합니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헬라어 원문은 여기서 ‘받았다’는 동사를 ‘현재완료직설법’로 표현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순간적’인 동시에 ‘지속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돌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은 분명 지난 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날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전도자로서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본문 1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구했던 상, 그가 바라고 원했던 보상은 넉넉한 재물이나 사람들의 환호 혹은 눈부신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초라하고 별 볼일 없게 여겨집니다.
실제 바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변부에 있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철저히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일생동안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갖은 오해와 무시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를 위대한 사도로 기억하고 존경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그.러.나.’의 신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나’의 원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희망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진심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일상 속에 ‘그러나’를 실천해야 합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속한 공동체에서 허락된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대놓고 뭐라할 사람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약한 이들을 늘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누구나 손에 든 재물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다 건강하게 하는 일에 소비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항상 둘러보고 즐겁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처럼 날마다 ‘그러나’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바울의 삶을 닮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을 높이 쓰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참 은혜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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