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9일 금요일

창세기 10장 1~32절 "모순적인 현실에서"

2022년 8월 19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0장 1~32절 "모순적인 현실에서"

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창세기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인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각각 거대한 민족을 이룹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그동안 상당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인류학적인 기록으로 잘못 이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종이 나뉘는 장면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즉,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종,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너무나 허무맹랑한 궤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꽤 오랜시간 이러한 낭설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심지어 인종차별을 정당화 하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는 어제 읽은 9장 25절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합니다. 그러면서 함이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거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저주대로 함의 자손들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논리를 성경으로 억지로 끼워 마친 사례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이런 견해가 왜 잘못되었을까요? 본문의 의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종’이라는 생물학적인 분류는 성경의 관심사가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의 시각입니다. 특히나 수천년이 흘러 대서양에서 이루어진 잔악무도한 흑인 노예무역에 대해 그들이 알고 평가할 리가 없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하고 그것을 처음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논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무엇이 더 중요했을까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 통치입니다. 본문에는 세 아들의 후손들이 퍼져나가 살았던 지역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지역들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세계 전체였습니다. 따라서 구약 학자들은 창세기 10장을 글자로된 ‘세계 지도’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다시금 되짚어 보시길 바랍니다. 온 땅에 죄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다짐하셨습니다.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방주에 노아의 가족과 각종 동물들을 태우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온 땅이 물에 잠겼습니다. 세상이 황폐해 졌습니다.

그런 다음 인류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열어갑니다. 노아는 아담을 이은 인류의 두 번째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척박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생명의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다시금 구원의 뜻을 펼쳐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와 같았던 재난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루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특별히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고 바벨론에서의 포로살이 했던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새힘을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보이실 것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며 너무나 지치고 어려운 순간을 경험합니다. 풀 한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광야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돌보심을 신뢰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계획을 기대하고 그 뜻을 따르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세기 10장의 족보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둘째, 함의 족보가 셈과 야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야벳의 후손은 2~5절, 셈의 후손은 21~31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함의 후손은 무려 6~20절까지 적혀있습니다. 절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계산하면 셈과 야벳의 자손을 합한 것과 같습니다.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준엄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창세기는 그런 함의 자손들을 비중있게 소개할까요?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8~9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전체적으로 족보가 이어지는 10장에서 잠시 흐름에 빗겨나 한 인물을 집중합니다. 그가 그만큼 주목할만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함의 손자 니므롯입니다. 그는 ‘용사’라는 칭호를 받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또한 용감한 사냥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추정컨대 니므롯의 강력한 힘 덕분에 함의 후손들은 강성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상당한 모순을 발견합니다. 함의 자손들은 분명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신세가 되는게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함의 후손들의 위세에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기가 죽어 보입니다. 

이것은 셈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로서 더욱더 가슴 아프게 읽었을 대목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여러 제국에 의해 짓밟혔을 때, 그들 눈 앞의 또다른 니므롯의 폭력으로 신음할 때, 창세기 9장과 10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부조화로 인해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묵상을 통해 혼돈을 넘어서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함도 니므롯도 이집트도 앗시리아도 바벨론도 로마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제아무리 악하고 강한 용사가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할지라도 그 역시 창조주의 손길 아래 있습니다. 그 어떤 거인도 하나님의 홍수 앞에 무력하게 휩쓸립니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미련할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노아입니다. 주님의 뜻을 참으로 이어간 사람들은 미약해 보였던 셈과 야벳의 후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승리합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어 당신의 통치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이시려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완전했습니다. 죄악 가운데 주님의 창조 계획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처절하게 죽임당하셨습니다. 마치 니므롯과 같은 강력한 함의 후손들에 의해 핍박당한 셈의 후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또 믿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패배를 통해 이 세상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죽음을 통해 찬란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홍수 이후의 그 어떤 황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일구는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일에 당신의 자녀들을 참여 시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현실의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한 이들의 화려한 성공을 보며 갈등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승리자이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 가운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구원의 복된 능력이 살아숨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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