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창세기 9장 18~29절 “보이는 것 너머”

2022년 8월 18일, 목,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9장 18~29절 “보이는 것 너머”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와 같습니다. 무한한 넓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본문 속 노아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

바른 답을 찾기 위해 창세기를 읽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엄밀한 과학 논증이나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책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한 성경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적절히 거리를 두고 얼마든지 해석 가능합니다.

동시에 유념해야 합니다. 우선 창세기의 이야기 자체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중간중간 우리의 선입견이나 판단을 집어 넣기 전에 분문이 들려주는 내용을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해석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거대한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 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들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아픔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 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 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보이는대로 함부로 판단했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부터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승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히히덕 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 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었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은 함과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하체’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나체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옷을 벗은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련에 지쳐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의 가장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조롱하려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들들이 자기 몸을 봤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그럼에도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두 아들은 노아가 지나온 삶, 그로 인해 아픔으로 일그러진 내면을 바라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았습니다. 그 눈길을 따라 따뜻하고 사려깊게 아버지를 대했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을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마치 혈기를 부렸다는 이유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자칫 운명론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은 범위를 좁혀 묵상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더 많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 없이 노아가 겪어온 고통어린 순간들을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멸시 당하던 세리와 창기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처참한 실패와 저주의 형틀로 봤던 십자가를 놀랍고 위대한 생명과 은혜의 상징으로 변화 시키셨습니다. 그러한 우리 주님을 본받아 이 시대의 셈과 야벳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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