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9일, 포항 YMCA-YWCA 국제친선주간 연합예배
요한계시록 11장 18절; 21장 1절 “하늘과 땅을 새롭게”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포항제일교회 정대진 목사입니다. 뜻 깊은 자리에 말씀 전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보고 조금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요한계시록은 많은 성도들에게 경계 대상입니다. 그동안 심각한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단들이 악용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본래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문자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계시록에 기록된 종말 심판을 확고부동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연구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굉장히 유별나고 특이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당시 강력한 힘을 휘둘렀던 거대한 로마제국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황제가 아닌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위대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양하고 화려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1차적으로 로마가 곧 몰락할 것을 선언합니다. 즉, 계시록이 향하고 있는 심판의 최종목적지는 바로 ‘바벨론’으로 언급되는 로마 제국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종말 환상 이야기의 절정이 바로 일곱 번째 나팔입니다. 이제 세 번째 재앙이 시작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장면입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 성도들이 이 책을 낭독하는 것을 들을 때 침을 꼴깍 삼키며 몰입해 들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을 읽는 우리도 집중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요한은 바로 이 때, 독자들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을 거듭 들려줍니다. 바로 하늘 어전에 있던 24장로들이 부른 찬양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1장 17~18절입니다. 17절 제가 다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모든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또한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즉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찬양이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처음 기록되고 전해졌던 1세기 교회 상황에서는 절대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제국 반역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곧 주님이시라는 외침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습니다.
특히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제국을 이룬 황제를 주님으로 숭배했던 시대 상황 때문에 고난 받는 교인들조차 움추러 들었습니다. 심지어 신앙을 저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혼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주님입니다. 이 복음을 이 시간, 다시금 마음 깊이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내 삶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소망합니다.
따라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입니다. 18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마지막 문장들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18절의 문장 구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신약 원문도 순서가 거의 비슷합니다. 먼저 전반부에 주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상을 노래합니다. 이 자체로 상과 심판이라는, 충분한 완결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접속사 ‘또’, 혹은 ‘그리고’가 굳이 등장합니다. 심판 받을 무리에서 특정 사람들을 떼어서 분명히 언급합니다. 게다가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 시킨다는 언어 기교를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어 원문도 같은 어근의 단어를 두 번 변형해 사용했습니다. 이토록 요한계시록이 엄중하게 심판을 경고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관련해서 요한계시록이 “땅”에 대해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땅을 <게>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가 마태복음 27회, 마가복음 9회, 누가복음 16회, 요한복음 4회, 사도행전에서 18회 나옵니다. 모두 합하면 74번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땅이라는 말이 몇 번 언급될까요? 무려 82번입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한 것보다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칠게 정리하자면, 요한계시록에서 땅은 단순하게 자연 중 일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태질서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한 땅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의 가장 처참한 피해자가 됩니다. 관련해서 계시록 16장 1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자세히 읽지는 않겠지만 요한계시록 16장은 일곱 대접 심판을 묘사합니다. 그 대부분은 환경 파괴와 연결됩니다. 더 이상 생태 질서가 유지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감탄한 창조세계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세상은 도무지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 못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땅에 일곱 대접이 쏟아진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요? 자연이 심판 대상일까요? 역사가 끝날 때 환경이 어쩔 수 없이 파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계시록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 운명론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습니다. 땅을 포함한 자연 질서는 인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판에 희생 당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24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멸망이 있습니다.”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직접 해당되는 사람들은 분명합니다. 바로 로마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몰락을 우선 겨냥합니다. 특히나 17장에 기록된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여러 묘사들은 단연코 그 시대 일반적으로 이해했던 로마에 대한 상징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가 영원하듯이 주님의 심판 경고도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여전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오늘날의 로마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분간해야 합니다. 현재 급속도로 진행되는 기후 위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적극 대처해야 합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당신을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잘못을 찾아내고 벌주기 위해 눈에 불을 켜지 않으십니다. 드넓은 은혜 가운데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역사의 마지막에 반드시 완성하실 줄 믿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의 공의 또한 분명히 세우십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것을 절대로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무너져 가는 생태질서를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분노하고 심판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역사 종말이 하나님의 진노로 끝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완성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사도 요한은 역사의 마지막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물질적인 개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새 사람이 됩니다. 이 때, 그 전의 몸은 완전히 사라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형체는 그대로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의 전 존재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질서가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마치 잘못 구운 도자기를 가지고 도예가가 그러하듯이 마음에 안 든다고 깨서 버리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새로움의 근원이신 주님 품 안에서 하늘과 땅을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신의 뜻 가운데 우리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태계를 지켜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심판을 두려워 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 이루고자 하시는 가장 간절한 소망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 경고를 듣고 뉘우치고 돌이켜 당신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키길 바라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 이 곳에서, 바로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이런 다짐 가운데 무력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너무나 연약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환경 보호를 위한 여러 실천을 결심하지만 금세 좌절하곤 합니다. 개개인의 작은 걸음이 대체 거대한 기후 위기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회의감에 사로잡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분명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듭 명심해야할 복음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께서 극복하지 못할 절망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거듭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온갖 종류의 불의와 폭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끝내 이루실, 주님의 참 생명이 우리를 통해 온 세상에 가득히 흘러넘칠 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담대히 걸음을 내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 선하신 뜻 가운데 지은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인간의 탐욕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급속한 기후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땅을 망하게 한 어리석은 죄악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끝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창조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생태 질서를 다시금 아름답게 만들도록 헌신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참사가 있었습니다. 무려 156명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갑자기 잃은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부상 당한 149명이 속히 치유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건을 목격하고 후유증을 겪는 이들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포항 YMCA와 YWCA가 지금껏 그러하였듯이 앞으로도 더욱도 주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시는 이들 가운데 한 없는 은혜와 평화를 덧 입혀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자료
안용성 [두 이야기가 만나다](새물결플러스)
구기정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요한계시록의 땅 이야기"(신약연구 제 12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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