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4일 수요일

야고보서 1장 12~27절 "흠 없는 경건"

2023년 1월 2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야고보서 1장 12~27절 "흠 없는 경건"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은 여정입니다. 신앙은 한순간 결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 이후로 저마다의 경건을 올바로 가다듬기 위한 과정을 이어갑니다. 모든 성도가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이렇듯 진리는 총천연색입니다. 단 한 가지 색으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같은 목적지라도 사람마다 좋아하는 길은 다릅니다. 어떤 누군가는 거칠더라도 빠른 길을 선호 합니다. 다른 누군가는 좀 멀리 돌아가더라도 평탄한 길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채롭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다양합니다. 다름을 충분히 존중해야 합니다. 함부로 누군가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도 무려 네 권이나 되는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서들은 각자 개성을 지닙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예수님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다른 걸 넘어 틀리는 것입니다. 모든 걸 다 포용할 수는 없습니다. 명백히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다양성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표적으로 잘못된 신앙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행위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근거가 선한 행위라고 믿는 생각입니다. 

물론 착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문제는 착한 행실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매우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선행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나름의 착한 일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선행’을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한겨울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광장에 커다란 온도계를 설치하는 것을 간혹 보셨을 것입니다. 목표한 후원금을 정하고 그 수치에 따라 온도계 조형물 눈금을 빨갛게 표시하곤 합니다. 만약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 그러한 온도계 눈금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인간은 그 누구도 그 모든 목표를 완성할만한 도덕성을 갖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는 그 어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굉장한 추앙을 받다가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 손가락질 받은 사람들을 금세 떠올릴 수 있으실 겁니다.

이렇듯 착한 행실만을 경건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헛된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리하게 몰아붙이게 됩니다. 지나치고 위축되거나 교만하게 합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다그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오류에 대한 반발로 또 다른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잘못된 신앙을 발견합니다. 바로 행위는 무시하고 믿음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인간은 높은 도덕성으로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거짓입니다. 동시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천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이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철저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무력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을 지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의지나 신념도 아닙니다. 마치 어른이 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 아이가 손을 내밀 듯이 구원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절대로 우리의 공적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잘 믿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맹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은 자기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다치게 합니다. 가슴 아프게도 주변에서 쉽게 보셨을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집니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보내는 일상은 무너집니다. 지나치게 교회에만 매달리곤 합니다. 정확하게는 종교 생활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점점 공허해집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은 사라지고 허무한 열정만 남게 됩니다.

이렇듯 두 가지, 대표적으로 그릇된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둘은 양쪽 끝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행위에 집착합니다. 다른 하나는 과도하게 믿음에만 매달립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 땅에 시작된 이후 계속 이어온 갈등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올바른 신앙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편지들이 오갔습니다. 그 편지 중 일부가 신약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야고보서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신앙의 여정을 온전히 걷기 위한, 바른 경건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본문 27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제멋대로 오해하는 경건, 세상의 거짓에 뒤틀린 경건이 아닌, 주님께서 참으로 바라시고 원하는 경건입니다. 그것은 둘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고아와 과부로 대표하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실천입니다. 내 곁에서 피눈물 흘리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위선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기꺼이 나누고 섬기고 보듬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수평적인 경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나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믿음을 온전히 지킬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은혜에 안겨 자신을 돌아볼 때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가 그러하듯이 수평과 수직이 아름답게 교차합니다. 착한 일을 통해 업적을 쌓고 인정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삶을 돌아보지 않고 믿음만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되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서는 됩니다. 특히나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과 마주하며 내면을 돌아보고 신앙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경건을 주님께서 분명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의 여정 가운데 신실하게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를 소망하며 오늘도 성숙과 성장을 경험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